<연중 제5주간 금요일> 함구령을 내리시는 예수님
제 1독서 : 창세 3,1-8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복 음 : 마르 7,31-37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티로 지방과 시돈 지방, 그리고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지방들은 다 의미가 있는 지역들입니다. 티로와 시돈, 데카폴리스 지방은 모두 이방인 지역이지요. 그에 반해 갈릴래아 호수는 유다인들의 지역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지역과 유다인의 지역을 넘나들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가 쉽지만 당시 유다인들에게 이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죄인이며, 부정을 탄다고 하여 접촉을 금기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발걸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을 가셨을 뿐만 아니라 한 이방 여인의 청을 들어주시어 마귀 들린 딸을 치유해 주시고 그 지역에 머무르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유다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방인 지역과 유다인 지역을 넘나드신 예수님의 행적은 예수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구원이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계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명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만민구원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십니다. 손가락을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혀에 대시고 “에파타!”(마르7,34)하고 말씀하시자 귀먹은 반벙어리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좀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시고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게 놀랍고도 권위 있는 치유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만이 아니고 마르코 복음 전체를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말하지 말 것을 엄하게 이르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소문은 널리 퍼졌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널리 퍼뜨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믿으며 변화될 터인데 예수님께서는 왜 함구령을 내리시고 엄격하게 제한을 시키셨는지 우리는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의문을 놓고 볼 때 마르코 복음에서 아주 집중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끝없는 함구령을 통해서 참다운 메시아를 알려주려는 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놀라며 감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 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을 하는구나.”(마르1,27)
마르코 복음에는 이처럼 사람들이 놀라는 대목이 많이 나오고 또 그럴 때마다 바로 뒤를 이어 함구령이 내려집니다. 특히 마르코 복음 8장에는 구체적으로 베드로에게 함구령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30)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즉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를 하시지요.
끝없이 내려지는 함구령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 분의 놀라운 말씀과 행적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30)
이러한 고백을 한 베드로도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나는 붙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펄쩍 뛰며 자기도 모르게 반대를 하고 나섭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즉시 베드로를 꾸짖으시지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놀라운 기적만을 보고 경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짊어졌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경탄하며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십자가와 수난에 동참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5장 39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고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이것이 바로 마르코 사가가 원했던 고백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끊임없이 함구령이 내려지는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만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습니다. 기적과 더불어 십자가의 수난을 함께 겪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성경 저자의 의도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권위에만 감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메시아이시며 구세주이심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하고 또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고통 없는 축복만을 바랍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적과 권위만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주변을 맴돌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참된 모습은 십자가의 수난에 함께 동참했을 때 비로소 보여집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의 삶만이 아니라 우리들 인간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 친한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좋고 편안할 때는 누구나 잘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내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그 모습에서 친구의 참 우정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수난에 동참하고 하느님을 위하여 나의 목숨까지도 내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상처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하고 잘 살아가려고 애쓰는데 주위 사람들이 자꾸 흠집을 내고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처는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런 것들을 묵묵히 참아 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면서 축복만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조금 고통스러운 일이 닥치면 참고 기다리며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불평을 터뜨리기 일쑤입니다. 이는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나도 참고 걸어갈 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신자 생활을 하며 맞게 되는 어려움들, 고통들, 십자가들을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그것을 승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부활에 이를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어려움을 피하고만 싶어합니다.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고 또 어떤 요구가 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우리의 성장은 멈추게 되지요. 그런 사람은 더이상 성숙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끊임없이 함구령이 내려지는 것에는 잘못된 메시아관을 우려한 예수님의 배려가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놀라운 기적과 권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참 메시아가 되기 위한 응답으로 죽음에 이르는 수난과 고통이 함께 했던 삶이었습니다. 그것에 동참한 사람만이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 없는 예수님만을 기대하며 은총만을 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곳에는 부활의 기쁨 또한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승화시킬 때 개인이, 그리고 공동체가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마르코 복음의 메시지를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