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 주간 휴가인 관계로 이전 강론을 올립니다.
연중 제 5 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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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절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절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절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절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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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단락은 따로 떨어뜨려서 읽는 것이 아니라 전후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를 쓰면서, 앞에서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완고한 제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뒤에는 예수께 적대적인 바리사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믿음을 가진 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당시의 풍습으로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침상에 올려 거리에 두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픔을 함께 하고 위로를 건네주었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그렇게 병자들에게 다가서고 계시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께서는 치유자로 계신다는 것이죠. 병자들은 그 예수의 술만이라도 만지려고 안달이 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는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려는 사람들, 그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병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예수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비록 육체적으로 병을 앓고 있지 않다 해도 우리 역시 세상에 앓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오늘 복음 전의 말씀이 빵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의미로 쓰여졌다면, 오늘 복음은 비록 빵의 기적은 모르나 믿음을 표현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빵의 기적을 알고 있습니까?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개신교 번역이다)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베트의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빵으로 만든 죽이나 먹으러 모인 우중충한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너무 많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 필립 얀시)
우리는 주님의 만찬에 나아오면서 무엇을 바라고 왔을까요? 분명 그 의도는 바람직한 것일텐데, 나는 무엇을 얻고 갈까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비록 그때의 비장함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요? 선택된 자만이 참여할 수 있었던 만찬에 거저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을 얻은 우리. 과연 옷단의 술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는 저들의 음성이 들리기나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