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흙덩이[유시찬신부님] /2007.01.16

2007. 1. 16. 오전 10:15:54

글자
흙덩이
    
    글 : 예수회 유시찬 보나벤뚜라 신부님 
    
    요즘은 아예 뛸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조금씩 걷는다
    시골길 구불구불 돌아가면 쌍으로 누워 있는 무덤도 나오고 
    상추밭도 나오고 무우청 시퍼런 밭도 있고 
    고구마 캐는 부부의 웃음도 흐르고 채 거두지 않은 벼이삭들이 
    먹고싶을 정도의 아름다운 황금색으로 흔들거리기도 하고 
    담장 너머 감나무에 감 하나가 달려 있기도 한다 갈아엎어 놓은 흙이 오늘따라 유난히 따뜻하고 부드럽고 고맙게 다가왔다 이 몸도 누우면 쟤네들과 하나가 될 것인데 얼굴색이나 흙색이나 거의 닮은꼴인 할아버지, 아저씨들이 아줌마들과 더불어 밭일하는 모습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하루종일 거의 건물 방 안에 갇혀 있는 내모습과 비교되며 도시스타일이란 느낌도 많지만 하루종일 저렇게 햇빛 받으며 바람 쐬며 새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일하는 삶의 모습이 좀 더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처럼 그저 시골에 가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인터넷은 되고 수세식 화장실은 있어야겠다 한 차례 앉는다고 핸드폰을 꺼 놨다 다시 켜니 동생에게서 부재중전화가 두 통이 찍혀 있다 가슴이 철렁한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래도 아닐 거야 어제 동생들이 아버지 모시고 원체 좀 가라앉아 계시기에
    바람 좀 쐬게 해 드리겠다고 경주에 가 하룻밤 자고 오겠다고 했는데 허나 예감은 맞았다 아침에 아버지께서 세수하시러 욕실에 들어가셨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지셨단다 머리가 부딪혔고 뒷머리 부분이 좀 찢어졌고 피가 좀 나고 의식을 순간 잃으셨고 그래서 동생들이 부랴부랴 119를 부르고 그저 약간의 응급처치만 한 후 그대로 수원 빈센트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란다 오후에 응급실을 통해 재입원하셨다 동생들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난 피정 중인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강론도 하고 헛소리도 지껄이고 웃기기도 하면서 CT촬영결과는 뇌 속에 출혈이 좀 있다고 당장은 수술을 해야 할 형편은 아니지만 앞으로 출혈이 계속될지
    더 두고봐야 한다고 그리고 부딪히며 목뼈를 다치셨는지 현재론 뼈부분이 약간 어그러져 있다고 내일 다시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봐야하겠다고 대개는 의식이 맑고 아직은 괜찮으신데 가끔씩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로 떨어져 이상한 말씀도 하신단다 전화통을 통해 들려오는 동생들의 목소리를 향해 블랙홀처럼 에너지가 빨려들어간다 그나마 한 이틀에 걸쳐 조금 올라오는 듯하던 에너지가 금새 바닥이 나 버린다 흐물흐물 가라앉으려 한다 충대병원에 있는 동생이 한 고비를 넘겼다는 소식을 어제 받았다 의외로 담담했다 한 시름 넘기고 있었더니 다시 아버지다 퇴원하신지 한 달 만에 재입원이다 내일 나는 순천공사장에 미팅하러 갔다와야 한다 그냥 일찍 자는 게 좋은데 잠들기가 싫다 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신의 충만함 안에서 눈물이 나고 기쁘다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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