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위한 안식일>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오늘은 안식일 법에 대한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논쟁의 핵심적인 의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법은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법이 법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인간을 위한 보편적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어떤 법이 인간을 너무 통제하는 쪽으로 흘러 인간이 이 법에 의존하기 시작함으로써 사람이 오히려 그 법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법을 ‘악법’이라 하며 개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에는 악법도 법이라면서 사회적 질서를 위한 법과 규범은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일 세상 모든 이가 각자의 이익을 기준으로 법을 바라본다면, 하나의 법이 누구에게는 악법이 될 것이요 누구에게는 유용한 법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옳은 규범을 가져다주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시면서, 사실 이 둘은 본질상 하나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 법이 하느님을 위한 법으로 제정되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람을 위한 법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면 하느님도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모든 법은 사람을 살리고자 만들어졌으며, 그런 이유로 동시에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2장 18절에서 3장 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벌인 논쟁입니다. 어제 복음인 2장 18절에서 22절까지는 단식에 관한 논쟁이고, 오늘 복음인 2장 23절에서 28절까지는 안식일의 주인에 관한 논쟁이고, 내일 복음인 3장 1절에서 6절까지는 안식일 치유에 관한 논쟁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식과 안식일과 치유의 근본정신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동차 문화도 이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과시용으로 중형차,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점잖은 사람도 자기 자동차를 누가 스치거나 긁기라도 하면 돌변하여 목청을 높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동차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자동차를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안식일 규정은 예수님 시대에 중요한 규정이었고, 의로운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잣대로 모든 것을 쟀기에 근본정신을 잊었던 것입니다. 근본정신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법의 근본정신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한 가지 방편은 법을 지키는 데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그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교통법규는 꼭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긴급차량이 지나가야 할 경우에는 복잡한 도로에서도 서로 협력해서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중앙선을 지킨다거나 갓길로 차량을 운전해서는 안 된다고 비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통법규의 목적인 안전한 운행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전과는 거리가 먼 지나친 단속이나 자신과 이웃의 안전에 심각한 위험이 있는 음주 운전 등은 법의 목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경우도 생각해 봅시다. 가끔 교우들이 미사에 빠지거나 미사 시간에 늦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면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는 생각하지 않고 편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법을 잘 지키면서도, 그 법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리지 않는 참다운 신앙인들이 되도록 다시 한번 다짐하고 노력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