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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1.목
| 마르코 복음 1장 40-4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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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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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별을 없애신 예수님 이중섭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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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나병을 천형(天刑)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살았고, 성한 사람을 만나면 ‘부정한 사람이요’ 하고 소리치며 먼저 피하여 도망쳤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런 나병환자와 대화하고 손을 대시어 나병을 고치십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은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와 대화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정결제도를 거부하셨습니다.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제도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 앞에서 정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부정한 사람은 구별하고 분리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아파해야 할 자비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속성 중에서 거룩함보다는 자비하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어떤 사람이 의로운지 아닌지 따지며 구분 짓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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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의 손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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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 듯 말 듯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우울함, 그러나 벗어버릴 수 없는 책임감이 머리와 가슴을 메우고 있었으므로 누군가가 그리웠다. 엄마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분, 때로는 너무 측은해 내 기도의 대상이 되곤 하는 분, 십여 년을 형님이라 부르며 동고동락해온 그분이 그리워 집을 나섰다. 세상이 고해라고 느껴지게 하는 고통은 과연 몇 가지나 되는지 몰라도 그 고통을 골고루 뼛속 깊이 살고 있는 분, 하느님 나라는 어떠한 곳일까 더듬게 될 때 그분의 얼굴과 발걸음에 그 나라는 펼쳐져 있다. 이제 더 이상 부수어질 것도 내려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하느님은 풍향을 바꾸지 않으시고, 그런데도 그분의 치마폭은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기댈 어깨가 필요할 때 다 부서져버린 그분을 찾는다. 시장 한구석의 아주 작은 팥죽 가게, 그곳은 여럿 가난한 사람들의 안식처이다. 이상도 하다. 가슴 아픈 사람도, 배고픈 사람도, 지친 사람도 그곳에 가면 쉼을 얻는다. 늘 새벽 미사로 하루를 여는 분, 호구지책으로 그 가게를 시작할 때엔 먹고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셨겠지.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지만, 언제부터인가는 ‘주님, 배고픈 이웃 더 많이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하신단다. 그들의 굶주림을 채워줄 수 있는 오늘이 감사하단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흔들리면서 내가 바라는 것과 그분이 바라는 것의 차이점을 껴안고 짐을 덜고자 하는 마음과 짐을 지고자하는 마음이 악수를 한다. 그 버스가 계속 달려주었으면 했다. 오늘 만난 예수님, ‘내 멍에는 가볍다’고 하시는 분과 더 긴 여행을 하고 싶어서였다. 종점은 바로 그분의 팥죽가게일 것 같아서였다.
오석자 | 경남 진주시 신안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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