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형제가 종신서원을 하였습니다. 요셉 수도원의 최 빠꼬미오 신부님께서 1주일 동안 피정 지도를 해 주셨고, 종신서원식 미사 강론을 하셨습니다. 종신 서원식 사진입니다. 제목: 물 위를 걷는 노하우 복음: 마태 14,28-33 윤원진 비안네 수사님, 이광식 예로니모 수사님, 양창환 세라피노 수사님, 문해철 제르마노 수사님! 종신서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사실 용돈 하라고 한 일억 원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아이고! 이게 웬 떡이냐? 이걸로 한 살림 차려서 장가나 가야겠다.”라고 할까봐 그렇게는 못하고, 대신 얼마 안 되지만 일억 원짜리 제 수도생활 노하우를 알려 드릴까 합니다. 뒤에 앉아 있는 분들에게는 한 십 억 되겠지요. 저는 일 억입니다. 무슨 노하우냐 하면 ‘물 위를 걷는 노하우’입니다. 물 위를 걷는 것. 이거 어려운 것 아닙니다. 아주 쉽습니다. 조금만 연습하면, 물 위에 앉아서 밥도 먹을 수 있고 물 위에 누워서 잠도 잘 수 있습니다. 아주 쉬워요. 왜 쉬우냐 하면, 그 물이 H2O, 풍덩풍덩 하는 그 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물이 뭐냐? 라틴말로 ‘무르무라씨오(murmuratio)’라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읽으면 ‘물무라씨오’인데 ‘불평’이란 말입니다. ‘아! 이 물이 불평이구나’ 하고 생각해 보니까, 복음이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들은 복음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주님께 가다가 물에 빠지는 그런 이야기죠. 사도들이 어느 날 호수를 건너는데 주님이 안 탔습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쳤어요. 그런데 저기서 밤에 주님이 걸어옵니다. 베드로가 반가워서 쫓아가다가 물에 빠지고, 주님이 건져 주시고, 주님이 배에 오르시고, 폭풍우가 그치고 뭐 이런 이야기죠. 이 이야기는 단순히 호수에 일어났던 이상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서를 좀 공부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앙체험을 상징하는 이야기입니다. 공동체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나, 하는 것을 물위를 걷는 이야기로 설명한 겁니다. 공동체가 뭐냐? 한 몸입니다. 한 배를 탄 사람이 공동체입니다. 도망갈 수도 없고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게 공동체죠. 오늘 종신서원을 하신 네 분 수사님들은 그러니까 이제 왜관 수도원이라는 배에 완전히 올라타시는 겁니다. 탔다 하면 이제 내릴 수도 없습니다. 물론 뛰어내린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배 바꿔 탄 사람도 봤습니다. 바꿔 탄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떠나갔으니까요. 하지만 뛰어내린 사람은, 제가 보니까 고기밥 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뛰어내리신다면 말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네 분 수사님들이 가만히 보니까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왜관 수도원 배가 겉은 멀쩡해도 가만히 보면 바닥이 쫙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 좀 샙니다. 한쪽에서는 바가지로 물 퍼내느라 정신이 없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물이 새는 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배가 어떻게 아직까지도 안 가라앉고 있는지 신기해합니다. 비안네 수사님, 예로니모 수사님, 그리고 세라피노 수사님, 제르마노 수사님! 아직도 안 늦었습니다. 이래도 종신서원 하시겠습니까? 물위를 걷기는커녕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릅니다. 다들 가만히 계시는걸 보니까 물에 빠져 죽을 각오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물위를 걸을 수 있는 기본 자격을 갖춘 셈입니다. 여기 복음에서 호수가 뭐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물이 뭐냐? 우리를 둘러싼 현실입니다. 현실은 천국이 아니고 불평투성이입니다. 문제투성이입니다. 여기 있는 수사님들은 전부다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그러니까 하늘나라를 위해서라든지 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 등등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기대가 깨집니다. 그리고 상처도 받습니다. 기대가 컸던 사람일수록 실망도 더 하고 배에 대한 애정이 컸던 사람일수록 상처도 더 깊습니다. 누구 한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고, 죽 둘러보니까 배에 탄 다른 사람들 다 힘들어하고 아파합니다. 지금은 편안하게 다 웃고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배가 기울고 있습니다. 때로는 곤두박질치기도 합니다. 물도 샙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함을 쳐댑니다. 어떤 고함인가, 제가 가만히 들어보고 분석해 보았습니다. “수도원 공동 기도에도 안 나오고 왜 자꾸 밖으로만 돌아다니지?”하는 불평. “다들 말로만 사랑을 이야기하고 힘들고 더럽고 비천한 일들은 다 내가 하잖아. 정말 너무 한다 너무해.”하는 불평. “수도원에서 큰일은 내가 다 하는데 왜 아무도 안 고마워하는 거지?”하는 불평. “수도원에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 뭐해 나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다 나를 너무도 몰라도 몰라.”하는 불평. “수도생활 좀더 잘 해보려고 뭐 좀 배우려 하는데, 왜 자꾸 못하게 막는지 모르겠다.” 하는 불평. “점점 놀자 판으로 바뀌는구나. 이거 한다고 이래 빠지고 저거 한다고 저래 빠지고 도대체 일은 언제 하냐?”하는 불평. “맨날 수도생활, 수도생활. 나도 다 아는데. 야아, 숨 막힌다.”하는 불평. “요새 후배들은 도대체가 말을 잘 안 들어. 말도 막 하고 말이지. 내 때는 정말 안 그랬는데. 아! 본전 생각난다.”하는 불평. “가만히 보자보자 하니까, 고요한 수도원에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골치 아파 못 살겠다. 어디 산 속에 가서 좀 조용히 살고 싶다.”하는 불평. 상황이 이쯤 되면, 누가 아무리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 소리가 묻혀 버립니다. 아무 소리도 서로의 귀에 안 들립니다. 이럴 때 영적으로 깊이 있는 분이 도와준답시고 “힘내시오,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무서워하지 마시오.” 이렇게 말하면, 그 소리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립니다. 안 들어오죠. 왜 안 들어오냐? 너무 소음이 심해서 안 들어오죠. 갈릴래아 호수에서 사도들이 만났던 그 바람과 파도의 정체가 뭐냐? 바로 이 불평입니다. 성 베네딕도께서 그렇게 불평을 경계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실 불평이 없는 사람은 바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필연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 아직 천국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작은 되었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평이 있다는 것은 ‘아, 저거 고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불평은 배를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바람이 좀 살랑살랑 불면 오히려 배가 잘 갑니다. 노 저을 필요도 없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저 사람 하는 말 가만히 들어보면, 처음엔 기분이 좀 나쁘지만 따라 하다 보면 배가 잘 갑니다. 그렇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사방팔방에서 부는 광풍은 배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가고 배를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습니다. 배가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에 서로 다 공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불평의 바람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왜냐? 내가 하는 불평은 배를 살리자는 정당한 불평이기 때문에 위기가 커질수록 더 세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배는 어떻게 되는가? 아무도 배의 침몰을 원하지 않지만, 잘못하면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수도원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보니까 많은 수도원들이 침몰했더라고요. ^^ 그래서 오늘 종신서원을 하는 네 분 수사님들께 제가 현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러분도 지금은 사랑과 순종의 마음으로 충만해 계시겠지만 이제 종신서원을 하시고 한 몇 달 지나면 조만간 저희들과 같이 불평의 대열에 합류하실 것입니다. 불평은 적절하게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불평불만이 많다는 것은 뒤집어 말해서, 그만큼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많다는 뜻입니다. 다만 한 가지!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이 배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고 커지고 불평이 걷잡을 수없이 나오게 되면 그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아무리 정당한 불평일지라도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의 그 정당한 불평 속에서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진실을 짚어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정당한 불평도 의심을 해야 됩니다. 내 판단이 옳은데, 내 느낌이 정확한데, 내 계획이 더 합리적인데, 하는 자기 정당화를 넘어서려면 맨 정신으로는 안 됩니다. 제 정신 가지고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베드로처럼 사실 앞뒤 가리지 않고 주님만 보고 주님을 향해서 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게 다른 사람 눈으로 보면 미친 짓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알고 보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분명히 맞는데, 하는 그런 자기 인식을 넘어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지 말란 말이냐? 그게 아닙니다. 불평이 필요하죠.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불평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면서도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거죠. 어떻게 일어납니까? 사는 게 전부 불만거리죠. 성인들이 불만이 제일 많습니다. 온 세상을 보니까 모든 게 다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이 한 몸 바쳐서 섬기겠다는 마음을 먹는 게 성인입니다. 사는 게 다 불만거리인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 불평의 폭풍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요? 파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불평하는 자기 정당화를 의심하기 시작할 때부터 불평하는 다른 형제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 올 것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들어보면 조금씩 전부 다 일리가 있는 말들입니다. 그래서 이 목소리 저 목소리 잘 종합하면 폭풍은 가라앉고 불평은 사라지고 수도생활의 배 안에 주님이 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네 분 수사님들! 하느님은 사람을 통해 오십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오십니다. 불평할 게 늘 있는 그 사람을 통해서 오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시오’ 하고 부르십니다. 물위를 걷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오늘 네 분의 형제님들이 죽을 때까지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수도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공동체 안에 문젯거리가 있을 것이고 여러분의 삶 속에도 불평 거리가 있겠지만 여러분은 그 불평의 물위를 너무나 놀랍게도 걸어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주님을 보았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닥쳐올 시련을 잘 극복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최종근 빠꼬미오 수사님 (2004. 1. 15 왜관수도원 종신서원식 강론) |
[강론] 물위를 걷는 노하우[최종근 수사님] /2007.01.10
2007. 1. 11. 오전 1: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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