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공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셨음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60,1-6)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가
벌떡 일어나 세상의 중심이라는 예루살렘을 비추실 것인데
그분의 빛으로 오히려 세상에는 어둠이 짙게 깔린다고 합니다.
어둠이 짙으면 빛이 더욱 밝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빛이 비춰지면
온 세상 임금들이 모두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라고 외칩니다(즈카 8,20-22; 시편 102,13).
오늘 읽혀진 화답송(시편 72,1-15)처럼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이 예언은 오늘 복음(마태 2,1-12)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이상한 별빛을 따라서 베들레헴까지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면서 경배하고 돌아갑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두려워하던 헤로데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는
꿈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복음은 이 짤막한 언급을 통하여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방법이 얼마나 섬세한가를 말해줍니다.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다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들,
특히 당시의 최고 권력가들과 지식인들을 포함한
모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아보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기 위해
하늘의 별빛에만 의존했듯이
우리들도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으려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려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대단한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임금 행세를 하고 있는 이방인 헤로데와 박사들의 만남(2,3-9a),
그리고
유다 지방의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분,
유다인들의 진정한 임금(다윗의 후손이신 임금)이신
어린 아기 예수님과 박사들의 만남(2,9b-12)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유다인들의 가짜 임금(헤로데)-박사들,
그리고 베들레헴-유다인들의 진정한 임금(아기 예수님)-박사들.
이 두 가지 만남에서 간계(사도 7,19)와 섭리가 드러납니다.
간계는 예루살렘에서 펼쳐지는 것으로서
박사들의 말을 듣고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려는 헤로데의 모략이며(마태 2,16-18),
섭리는 베들레헴에서 펼쳐지는 것으로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려고 왔던 박사들이 돌아간 뒤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천사들의 지시(마태 2,13-15)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렇게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대립을 계속해서 말해왔습니다(이사 7,14; 미카 5,1; 2사무 5,2).
오늘 복음은
“경배”라는 똑 같은 단어를 반복하면서
헤로데와 예수님의 대립,
그리고 헤로데와 박사들의 대립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별을 보고 온 박사들의 경배와
별이 아니라 인간들을 보고 마지못해 뒤따라가서 하겠다는 헤로데 경배가 대립됩니다.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경배와
구세주를 배척하게 될 거짓 경배의 차이를 말합니다.
별이 머물렀다는 표현을 통해
진정한 왕권은 거대한 도시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초라한 시골인 베들레헴에서 나오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경배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무너지는 예루살렘의 왕권과
경배를 받기 때문에 일어나 비추게 될 베들레헴의 왕권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별을 따라서 왔던 박사들이
헤로데를 알현할 때에는 화려한 왕궁,
진수성찬, 로마 병정들의 도열, 대신들의 배석,
그리고 황금으로 도금된 의자에 자주색 옷을 입고 앉아서
온갖 권위를 부리는 헤로데의 거만한 태도를 잘 보았을 것입니다.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를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은
화려한 왕궁의 현관이 아니라 헛간을 보았고,
도열한 의장대가 아니라 동물들을 보았으며,
대신들의 배석이 아니라 아기를 돌보고 있던
초라한 모습의 요셉과 마리아를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황금으로 도금된 의자가 아니라 초라한 구유에,
자주색 옷을 입은 권위 있는 왕이 아니라 허름한 포대기에 싸여있는
연약한 아기뿐이었습니다.
박사들은
왕은 고사하고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게나 어울리는 곳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뵙고 구세주로 믿고,
극진한 정성으로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고 떠납니다.
주님을 만난 박사들이 더 없이 기쁜 나머지
헤로데가 손짓하던 세속적 권력이 넘실거리는 길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길로 돌아갔습니다.
유다인들의 참된 왕이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거짓 왕인 헤로데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사들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이방인들인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서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서방교회의 신심행위들 가운데
성주간 행사와 더불어 가장 화려한 주제로 남아있습니다.
사실 서방교회에서는
로마인들의 태양신 숭배일인 12월 25일이 성탄축일로 확정되기 전까지
주님의 공현축일이 예수님의 탄생축일이었고,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중세기에 와서
동방의 세 박사들이 성 미술의 핵심 주제가 되면서
이들의 출신지로서 아라비아와 인도,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가 거론되었습니다.
중세 후기부터는
교회의 전승에 바탕을 둔 이름과 피부색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가스파르는 수염을 기른 흑인 젊은이로,
멜키오르는 수염이 많은 노인으로,
발타사르는 갈색피부를 가진 사람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사들이 가져온
황금은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상징하고,
몰약은 예수님의 죽음(마르 15,23; 요한 19,39)과 인성을 상징하고,
유향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사제이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황금은 이성적 지혜와 신앙을 뜻하고,
유향은 기도와 사랑을 말하며,
몰약은 절제와 희망으로 이해하면서 신앙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황금은 가난한 예수님의 부모를 위해서,
유향은 마구간의 악취를 위해서,
몰약은 어린 아기의 건강을 위해서 봉헌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이 즐거워서 기쁨이 넘치고,
우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며,
얼굴이 밝아진다면(시편 34,6; 잠언 15,13; 집회 13,26)
우리도 역시 그분께 황금을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난다면
우리도 역시 그분께 유향을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1티모 1,5)이
“성령의 불”(1테살 5,19)과 함께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 독서의 말씀처럼
성경에 드러난 계시를 통하여 그분의 신비를 알게 되었다면(에페 3,3)
우리도 역시 그분께 몰약을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2코린 3,18; 1요한 3,2-3 참조).
동방의 박사들처럼
주님을 만난 우리들도 기쁨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주님께 선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강론] 주님공현대축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
2007. 1. 7. 오전 9: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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