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대한 두려움
교도소에 갇혀있는 사람들과 면담을 하다보면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릴때부터 받아온 상처가 너무 깊어서, 그 아픔이 너무 무거워서
대부분 상처입기 싫어하고,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줄이거나 피하려고 하고
결국 자신을 굳게 굳게 닫아 걸고
그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교도소에 갇혀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사람 사는 일에 어찌 상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서로 자라온 환경과 사고가 달라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오해가 빚어지고
크든 작든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그에 대해 상처란 것을 입는다.
그 상처의 크기와 깊이라는 것도 저마다 달라서
허리가 부러진 사람이든 손가락이 부러진 사람이든
제 나름대로는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름대로 정당하며, 또 그렇게 타인에게도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상처에 대한 첫 번째 오해가 빚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상처의 상대성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경중을 비교하고 가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상처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의 것이어서
내가 더 크네, 네가 더 깊네, 하고 따질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말이다.
오로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영역에만 속한 일이다.
상처에 대한 두번째 오해는 바로 상처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 내가 상처를 피하면
다 무리 없이 스리슬쩍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이기심.
단순한 농담 한마디 건네받는 중에도 오해가 발생하고
의미 없는 손동작 하나에도 의심이 생기는 것이 인간의 사귐이라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가장 원초적인 것이
생각의 다름으로 인한 오해이며 그 결과로 상처가 생긴다.
어찌 상처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찌 달아날 수 있다고 믿는가?
어찌 주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가?
상처는 결코 해로운 것이 아니다.
육체가 밥을 먹어야 살듯, 잠을 자야 살듯, 영혼은 상처를 입어야 성숙하다.
무수한 상처와 끊임없이 함께 살아야 성장한다.
사람에 대하여 실망했다고?
그것은 한 번도 사람을 제대로 믿어본 적이 없는 이의 핑계이다.
흔히 기대와 믿음을 착각한다.
믿는답시고 내 나름의 기대를 가져버리면
당연히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서운함뿐이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그가 어떻게 살건,
그가 어떤 식으로 나를 대하건
나는 절대 그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내 의지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피를 토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그리워할 수 있다면,
그 스스로 가장 싫어하는 모습마저 내가 받아들이고 부둥켜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그럴 수 있다면,
그 인생, 그 누구보다 가치있는 삶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상처입은 우리의 마음 구석 구석 까지
예수님은 오늘도 어루만져 주고 계신다..
그 따뜻한 손길을 느껴보아라.
이 얼마나 큰 위로이고 힘인가.
나는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고 싶다.
박 안드레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