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하고 친해지면 안 되나요.”
“신부님께 가까이하고 싶은데...”
“친해지셔도 되는데 신부들 주변에는
질투(?)하는 사람이 많아서 힘들실 거예요.”
어느 교리 시간에 열심한 교우 한 분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 질문에는 본당 사목자와 좀 더 격이 없는 관계를 바라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어는 사이에 교우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사목자와 양들 사이에 보다 더 친밀한 관계 보다는 행정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그것은 도심의 공동체들이 갖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점점 더 공허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공동체의 외적인 성장에서 비롯되는 공동체 안에 이러한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는 소공동체 운동을 전개하여 조금이나마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런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합니다.
“보통 교우들이 혼인성사를 통해 어느 배우자와 하나 됨을 지향하지만, 사제들은 어느 한 개인하고 관계를 맺는 신분이 아니라, 공적인 교회와 혼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사제들과 친해지는 것은 좋지만, 그 관계가 사적인 특징을 지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어느 때 관계를 멀리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려 주세요.”
이러한 답을 드리고 나서 사제들의 생활에 대해서 이해를 구하였습니다. 공적인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적인 관계를 멀리 한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공적인 관계는 그 지향을 하느님께 두고 있습니다. 사적인 관계는 잘 못하면 그 대상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내 뜻에 맞지 않으면 섭섭함과 불편함으로 닥아 옵니다. 그 불편함과 섭섭함은 생명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곧 하느님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관계를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관계를 무시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발견해 내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발견하지 못하면 죽음의 관계가 될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 자격 조건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그를 위해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의 여과기로 모든 관계에서 비롯되는 열매들을 걸러 내야 됩니다. 사제들의 기본 바탕도 거기에 있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 관계가 갖는 공적인 성격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의 친밀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친밀함입니다.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세일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은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8)
친해지면 안 되나요.[까만 사제]
2006. 11. 2. 오전 10: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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