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형제들만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기에 집안은 늘 엉망이었고 즐거운 놀이터였죠. 중학교 2학년 때 쯤인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밑에 동생, 그러니까 차남인 둘째가 어느 날 방에 들어와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죠. 그날은 제가 동생을 때리거나 못살게 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당황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동생이 그렇게 울면 나중에 어머님께 내가 혼나니까 어르고 달랬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님이 돌아오셔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머님이 동생을 불러 방으로 데려갔을 때 저는 한편으로는 혼날까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제가 왜 그런 것이지 하며 의아해했죠. 그런데 잠시 뒤에 방에서 나오신 어머님의 표정은 묘했습니다. 슬픈 듯 기쁜 듯 웃으시면서 저에게 동생에게 잘해주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이 그랬다고 합니다. “흑! 흑! 저는 사랑이 부족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동생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말에 어머니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셔서 다시 물었죠. 그러자 동생이 “형은 첫째라고 사랑해 주고, 준(막내)이는 막내라고 잘해주는데, 저는 가운데 끼어서 사랑받는 게 없어요. 저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해요.” 지금도 가끔 형제들이 모였을 때 “흑흑, 저는 사랑이 부족해요.”하고 흉내 내며 다 큰 동생을 돌리곤 합니다. 그 사건 이후 어머니는 옷을 사거나 선물을 살 때 늘 이 사건을 기억하셨던 것 같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부모님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더 아픈 손가락이 있고, 덜 아픈 손가락이 있죠. 부모님 자체도 더 마음이 가는 자식이 있고, 자식들 가운데서도 부모님의 마음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부모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거나 애틋하게 만드는 것은 상처입거나 약한 자녀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많이 그 은총과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더 민감하게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그를 보며 더 많이 아파하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하는 것은 그 한 마리가 입은 상처와 아픔을 당신도 같이 느꼈고 계셨기에, 그 상처와 아픔이 나았을 때 느끼는 기쁨임을 어찌 우리가 모르겠습니까?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아흔 아홉에 속하던, 다시 찾은 한 마리 양의 무리에 속하던 주님께 우리는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열 손가락이자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께 은총을 받아 누리며 자신만을 위해 살 때 하느님은 우리보다 먼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가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대림시기 여러분더러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 상처입고 슬퍼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가 이 대림시기에 기억하고 애써야 할 것은 나도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며, 그 은총의 손길에 우리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발걸음은 주님과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길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사랑의 여정에 우리를 당신의 동반자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주님의 사랑을 닮아 자신의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는 주님의 동반자가 되어 보십시오. “주님, 저는 제가 늘 한 마리 양이 되길 원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만을 찾아 길을 떠나 주시길 청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상처 받기 싫어하고 아파하는 것도 피했고, 길 잃은 양이 되어 헤매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의 여정에 따라 나서지도 못하면서 당신의 사랑과 은총만 갈구하는 저를 오늘은 데려가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
아흔 아홉 혹은 한 마리 - 이회진 신부님
2006. 12. 12. 오후 6:32:13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