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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그룹의 신자들과 마주앉아 차를 한 잔 같이 하게 됐습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자 자신들이 소속된 본당 신부님들께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습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경쟁하다시피 칭찬들을 하시는데,
제가 샘이 다 날 지경이었습니다.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신자들이 겪는 고초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함께 눈물 흘리는 사제,
겸손하게도 신자들에 앞서 먼저 인사하는 사제,
본당 재정 적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홀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제,
미사 시작 1시간 전에 가장 먼저 성체 앞에 앉아 기도하는 사제,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사제,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사제,
신자들에게 민폐 끼치기 싫다며 죽기 살기로 축일 행사를 마다하는 사제,
전철 잘 운행되는데 자가용은 무슨 자가용이냐며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제,
인사이동 때면 모든 것 그냥 두고 모든 것 나눠주고 손가방 두 개만 챙겨서
바람처럼 떠나는 사제,
세례자 요한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는 사제….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은 지체없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오."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로서 적격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예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신은 누구요?"란 사람들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습니다. 자신은 조연에 불과하고 주인공은 자기 뒤에 서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시는 예수님이 더욱 높이 올라가도록,
더욱 빛을 발하도록 자신을 최대한 낮춥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을 덜 닦은 사람이었더라면,
선구자로서 삶의 준비가 부족한 사람이었더라면 백성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올라갈 때까지 올라갔던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개인적 야욕이 스며드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파견하신 이유를 상기하면서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강도 높은 피정과
자기 쇄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다스렸습니다.
고독과 침묵 속의 광야 생활에 충실했기에
세례자 요한은 지속적으로 하느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세례자 요한을 사람들이 그냥 뒀을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저녁 한번 사겠다',
'차 한 대 빼드리겠다'고 괴롭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은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며
"저런 저런"하면서 음식보따리를 싸들고 따라다녔겠지요.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욱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청빈한 삶, 더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겸손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평생 예수님 선구자로서의 삶, 구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인 연극에서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평화신문서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