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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번호를 지우다
어쩌다 방에서 하릴없이 TV 채널을 돌리다가,
가끔 출장이나 여행 다녀오는 버스나 기차 안에서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다가,
노곤한 퇴근 길 지하철에서,
문득 핸드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질 때가 있다.
핸드폰을 열고 전화번호부 전체를 검색해서 ㄱ부터 ㅎ까지 저장된 이름을 볼 때면 왠지 모를 뿌듯함과 그 사람들과의 얽히고 설킨 옛 시간이 제법 또렷이 기억 난다.
때론 너무 오랜만이어서, 보고 싶어서 눈물이 찔끔 나올 때도 있다.
그리고는 곧,
통화버튼을 꾹 누른다.
나에게 몇 안 되는 좋은 습관이다.
“잘 지내셨어요?” 로 시작되는 인사말,
하나같이 반가워하는 사람들,
내가 알고, 나를 아는 사람들.
나의 전화를 반가워해 하는 이백 명이 넘는 사람이 있다는게 가슴 벅차도록 행복한 순간이다.
짧은 인사 따위로 몇 년 얼굴을 보지 못함을, 그 동안의 이야기를 다 토해낼 수는 없지만, 짧아서 더 소중한 시간. 어제 퇴근길, 지하철에서 무진기행을 읽다가 문득 그들이 궁금해져 또 핸드폰을 열었다.
이름검색 하여 내려가다가 순간 내 손이 멈췄다.
'외할머니’
심장이 파닥댄다.
방충망에 갇힌 나방의 날개처럼 파닥댄다.
통화버튼을 꾹 누른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없는 번호.
호흡을 길게 내 쉰다.
그래 이제 없는 번호, 없는 분이 맞는거지...
집이 이사를 해서, 핸드폰을 바꾸어서 없는 번호가 아니라, 영원히 없는 번호.
지난 달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아마 아빠께서 전화국에 없는번호 신청을 하셨을 거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이름도 아닌데,
다시 받을 수 있는 번호도 아닌데,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전화번호를 지웠다.
살면서,
나의 핸드폰 안에 있는 많은 이름들이 꽤 오랫동안 저장되기를 바란다.
팬더/겨울님의 글, 사진: 우재호님의 블로그에서
http://www.hyulim.co.kr/jsp/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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