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바람에 대한 짧은 이야기4

2000. 2. 15. 오후 4:27:56

글자

역경과 수난

 바람은 환희와 기쁨, 사랑과 그리움, 삶의 존재론적 성찰 외에도 절망을 상징할 때가 많다.

 

빈 들을 휩쓸어 돌며,

때도 아닌 낙엽을 최촉(催促)하는

부는 바람에 쫓기어

내 청춘은 내 희망을 바리고 갔어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 위에

소리 없이 달이 오를 때,

이러한 때에 나는 고요히 혼자서

옛 곡조의 피리를 불고 있노라.

                                    -김억 ’피리’

*최촉하는 : 재촉하는

 

 이 시에서 바람은 모든 희망을 몰아내는 부정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빈 들을 난폭하게 할퀴며 모든 것을 부수는 바람은 젊은 희망의 싹마저 앗아간다. 희망을 박탈당한 젊음은 검은 지평선 위에서 달이 오를 때 그저 영화롭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흐느낄 뿐이다. 과거로 도피할 뿐이다. 바람은 우리에게 진취적인 희망을 노래하게끔 하지도 않고, 존재론적 성찰을 권유하지도 못한다. 다만 알 수 없는 비애와 상실감을 줄 뿐이다.

 다음 시 역시 상실감을 노래하기는 마찬가지다.

 

쓸쓸한 곳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진흙 빛 산과 들을 건너

황량한 도시의 등불을 죽이고

떼지어 오는 통곡 소리,

 

램프에 심지를 돋군다.

비인 밤에 가득한 벌레 소리에

눈이 감긴다.

 

항시 돌팔매에 쫒겨 온 서른네 해

내 가는 길에

또다시 찬비 뿌리고 잎이 돋는다.

                                              -김광균 ’비풍가(悲風歌)

 

 제목이 말해 주는 대로 이 시의 바람은 슬픔이다. 황량한 도시의 등불을 죽이고 알 수 없는 통곡을 몰고 오는 잔인한 슬픔이다. 도시의 등불이 밤을 밝히는 한줄기 희망이라면, 바람은 그 희망의 싹마저 철저하게 앗아 가는 잔인한 아픔이다. 마치, "빗속으로 돌아가는 부두 노동자들의 쓸쓸한 잔등이나 보여 주고/어둠 속으로 버려진 난파당한 폐선 몇 척이나 보여주고./폭풍에 참담하게 부러져 나간 방풍림의 꺾인 가지나 보여 주(장석주 ’조용한 개선’)"는 우울한 바람과 같은 것이다.

 윤동주 역시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와/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바람이 부는 데/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바람이 불어’ 에서)라며 바람이 주는 괴로움과 절망을 자탄한 바 있다. 이처럼 바람은 자주 절망과 손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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