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작품도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성찰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달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갈대’
시인은 칠흑 같은 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통해 인간의 나약한 존재에 대해 명상한다. 갈대는 곧 인간을 비유한다. 갈대처럼 연약한 인간은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린다. 그러나 시인은, 흔들림은 외부에서 가해 오는 어떤 힘 때문일 수도 있으나 대체로 인간의 내부에 자리한 원초적이고 운명적인, 어떤 알 수 없는 슬픔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알 수 없는 슬픔과 비애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움직임으로 성찰한 것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통해 삶의 양면성과 모순을 노래한 ’유치환’의 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
높게 달린 깃발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를 향해 미친 듯이 휘날린다. 바닷바람은 얼마나 기세 등등한가. 그 거센바람에 찢어질 듯 펄럭이는 깃발은 바다를 향해 무엇인가를 호소하기도 하고 부르짖는 것 같기도 하다. 푸른 바다가 꿈꾸는 동경과 이상을 상징하고, 깃발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상징한다면, 미친 듯이 날리는 깃발은 꿈꾸는 이상 세계로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의 애처로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상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의 제약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땅에 굳건하게 뿌리 박힌 깃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깃발의 운명적 상황과 같다. 인간은 꿈을 꾸고 살지만 현실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럴 때 인간은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어차피 그게 인간의 삶인 것을 어쩌겠는가. 바로 이것이 삶의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이 때 바람은 그 현실적 제약을 떨치고 이상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매체로 작용한다. 우리는 바람을 통해 삶의 모순과 한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은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사물의 흔들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공허한 듯 하면서도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양식도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