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나

1999. 7. 22. 오전 12:22:56

8
글자

며칠 전 잠에서 깨어 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오후 늦게쯤 엄마와 누나가 함께 들어왔다. 미용실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전날 엄마와 테레빌 보던 나는 아무 생각없이

"엄마는 생머리가 더이쁜데 왜 파마를 해?"하고 핀잔을 줬었다.

그 때 엄마는 아줌마가 아줌마 파마하는게 당연하다고 말씀을 하셨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풀고 오신 것이다.

십년은 젊어 보인다는 나의 말에 엄만 정말 그러냐며 연신 거울을 들여다 보며 즐거워 하셨다. 그 때 엄마의 모습이 마치 사춘기 소녀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가끔 난 엄마의 젊은 시절과 아버지와의 연애할때의 일들을 묻곤 한다.

그 때마다 엄만 남진의 공연을 보러 갔다온 얘기,빵집에서 사관생도와 미팅을 했던 얘기,이름이 안이뻐 친구하고 가명을 지어서 불렀던 얘기등을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

한 때는 아기였던,소녀였던,아가씨였던 우리 엄마는 아빠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엄마의 머리가 뽀글뽀글하게 말아 올려지면서 여자로서의 꿈을 점차 잃어가셨고 아버지께서 출근을 하시고 누나와 내가 유치원에 가면 소와 돼지를 혼자 기르고 부업까지 하시면서 아줌마로서의 임무에 충실지만 힘든 생활을 하셨다.

내가 이상이라는 관념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을때, 나는 나의 엄마가 참 한심해 보였었다. 늘 집에만 계시고 가끔 친구분들이나 만날까, 아버지와 우리 두 남매가 집을 나가면 바로 아버지와 우리 두남매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존재일 뿐, 우리 엄마한테는 이상,혹은 꿈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이상이라는 관념을 정확히 이해하게 됐을때 나는 내 엄마가 누구보다 큰 이상을 갖고 계셨고 누구보다 그 이상을 위해 힘쓰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의 이상.

그것은 바로 나였고, 누나였고, 아버지였다. 그리고 엄만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에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그렇다면 나는 태어날때부터 성공한 인생을 쥐고 세상에 나왔을 것라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있어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나를 잘 이해해주고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친구. 그것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엄만 내가 세상에 나와 처음보았던 친구였고 누구보다 나의 고민을 잘 알고 계셨던 친구였고 누구보다 나를 걱정해주던 친구였다.

한때는 꿈많았던 소녀. 올해 초 결혼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극장에 가서 쉬리를 보고 온 엄마의  상기된 모습을 보고 난 아직 우리 엄만 소녀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눈가에 주름이 암만 많이 생겨도,엄마의 머리가 암만 하얘져도 내겐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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