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란 영화가 생각난다...........
어느 유명한 건축가가 하루는 전원주택을 설계했다. 사람들은 스위트홈의 포근함이 가득한 설계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설계는 최대한 가족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게 짜여진 것이였다. 가족이란 떨어져 있으면 그립다가도 같이 살다보면 서로에게 질릴 수 밖에 없는 것 -그들이 기본적으로 화목하건 아니건- 이다. 가족성원들에게도 자신만의 영역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타인과 -가족도 타인이다- 얼마간 물리적 거리를 두어야 생리적으로 편하다는 과학적 결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속 11살 춤에 미친 소년 빌리는 엄마가 돌아가신 황량한 집에서 늙고 병든 할머니를 수발하며 탄광파업과 가난에 지쳐 포악해진 형과 아버지 아래에서 그야말로 개판 오분전인 생활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이 영화에선 오히려 어린 빌리가 가장 성숙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보여지며, 결국 그들의 희망이 되는 모습이 장엄하게 묘사한다. 그의 꿈은 춤인가? 아니다 오디션에서 11살 꼬마는 ´춤이 왜 좋은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어른들에게 말한다. 어른들은 계속 무언가 끄집어내려고 어리석은 질문을 던질 뿐이다. 세상이 고해라는 건 일찌기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셨지만 이렇게 어릴때 알아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그건 성자가 되거나 불우한 가정의 대를 잇거나 할 뿐이다.(내가 미륵이잖여~)
어른들은 계속 그를 윽박지를 뿐이다. "입닥치고 자", "레슬링 따위를 해라", "너는 춤을 춰야해" 등등이지만 빌리는 기죽지 않는다. 이건 교훈이나 금언이 아니다. 몸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춤이 주요 소재로 쓰이기도 했지만 유난히 이 영화에서는 몸과 몸의 부딛침, 대립으로 모든 해결을 이끌어낸다. 과격한 테러를 감행하려는 아들을 때리는 아버지, 시위대와 경찰들의 몸싸움, 탄광에 나가는 아버지를 말리다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아버지와 아들, 마을을 떠나기 전 아버지의 배를 올라탄 빌리 등 탄광 깡촌 남정네들의 투박함이 그들의 부둥킴으로 제대로 살아나고 있고 이것은 빌리에 의해 모두가 탄복하는 발레로 승화되는 것이다. 성인이 된 빌리의 라스트신에서의 도약은 그래서 해피엔드를 위한 해피엔드로만은 보이지 않는다. 99%의 고난과 해프닝과 마지막 1%의 행복을 바꾸라면, 당신의 삶에 적용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도 빌리처럼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과 좌절은 귀하지만 굳이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것일까? 빌리를 런던으로 보내고 막장으로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광부아버지와 형이 자꾸 눈에 아린다. 이건 무슨 60년대 강원도도 아니고, 아들 뒷바라지하며 그게 한가닥 희망이라니....
영화는 소년 빌리 엘리어트의 고향 탄광촌을 배경으로 철의 여인 대처시절에 행해진 탄광산업의 폐기화에 따른 사회문제들 - "사회복지개론"시간에 배웠지롱~- 이 심심치 않게 보여진다. 경찰들을 피해 도망치는 빌리의 형이 지가나는 부유층의 집에 있는 레저와 여가를 즐기는 광부 아닌 사람들과의 괴리감, 빌리의 춤과 데모장면의 교차편집의 일체감은 많이 보여주지 않으면서 영화의 배경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장치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장면과 장면을 연결해주는 으뜸은 음악이다. 마치 뮤지컬의 장면들 같이 빌리가 춤추며 다니면 음악이 퉁퉁거리며 투박한 마을과 칙칙한 집들을 환하게 채색해주던 효과는 앞으로도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80년대 중반, 영국의 스우 타운센드가 쓴 "비밀일기"라는 책이 그시절(나를 포함해) 사춘기 소년소녀들을 수줍고, 으쓱하게 그리고 눈물 쏙빼게 한적이 있다. 자신을 ’발견되지 않은 지식인’ 이라고 믿는 13과 3/4살의 아드리안이 실업자 아버지와 철없는 어머니 아래의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작가의 꿈과, 여자친구 판도라에 대한 소박한 욕구로 고민하는 모습은 지금 읽어도 나를 다시 사춘기로 돌아가게 한다. 내 안의 사춘기...
모든 어른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사춘기를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형욱이의 상가에서 이틀밤을 새며 내가 얻은 결론이다.
다시 옛시절로 돌아갈 순 없을까...........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기도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