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절두산 갑니다.

2000. 3. 10. 오후 7:49:20

글자

저번에 말씀드렸던 성지순례 건입니다.

 

절두산에 전화를 했더니

 

미사는 10시 30분에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좀 미리 도착해야겠죠?

 

합정역 8번 출구에서 9시 30분에 만납시다.

 

뭐, 특별한 계획이 있냐고요?

아직은....

무책임하다고요? 저는 원래 그런 놈입니다.

아무튼 전대사를 받고 싶으시면 회개 많이 하신 다음 고백성사 드리고 오세요.

지금 계획은 일찍 가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묵주기도 드릴 수 있으면 좋겠고,

미사 후 주모경 바치고 그럴 예정입니다.

그 다음에는 한강 고수분지에 가서 도시락을 나누어 먹을 생각입니다.

 

준비물 : 묵주, 미사도구,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을 도시락

 

아래의 글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군요.

 

 

절두산 천주교 성지

 

 

절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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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은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가을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말은 원래 우리 말의 ’들머리’ 즉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불쑥 솟은 자세가 누에가 머리를 든 모양 같다 하여 잠두봉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곳 절두산은 양화도의 동쪽 언덕에 있다고 하여 양화진이라고도 불렀는데 양화진이라는 지명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양화진 주변은 잠두봉과 아울러 이름난 승경으로서, 투금강이라고 불린 곳이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빼놓지 않고 다녀갔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왔다고 한다. 한편 양화진은 한재가 들 때 기우제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서 기우제를 지내면서는 호랑이를 물속에 넣었다 한다. 그 이유는 강에 용이 있다는 전설 때문인 듯 싶은데, 용두봉과 관계하여 흥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대원군에 의해 1866(병인)년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양화진 잠두봉이 절두산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때 바로 이 자리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당하여 순교한 때문이였다.

파리외방 전교회에서 1924년에 발행한’조선내의 천주교’라는 책에서 "1868년 9월까지에는 이미 2천명의 신자가 박해자의 칼날에 쓰러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 최수, 김인길, 이용래, 원후정, 박성운 등 이름이 전해지는 신자 외에도 연초에 박해가 전개되면서 내려진 선참후계령에 따라 그 얼마나 많은 신자들의 피가 이곳에서르려졌겠는가? 강변에서 목을 베어 달아 매기도 하고 혹은 산봉우리 위로 끌고 올라가 칼로 치거나 또는 결박당한 교우들을 산 채로 낭떠러지 밑 강물로 차던져 죽이기도 하였으니 그 참상 얼마만했으면 잠두봉, 들머리, 용두봉 등, 이 좋은 이름들 다 놔두고 이곳을 절두산이라 했으랴!

그러나 교황 비오 9세는 박해가 계속되고 있던 병인년 12월 19일(양력)에 이땅에 생존중인 신자들을 따뜻이 위로하는 가운데 "교회안에 다시 생겨난 순교의 영광, 순교자들의 피에서 거두어질 새롭고 더욱 풍성한 수확"에 대하여 거룩한 질투를 느낀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 간 이땅의 모든 순교 선열들, 특히 이름조차 남김없이 목숨을 바친 그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야 말로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영광스런 부활 생명을 위해 바쳐진 십자가 죽음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모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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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7월(김몽은 제5대 관장)에 성모 동산 남쪽에 이어서 성모동굴(마사비엘)을 꾸몄다. 9월 26일 복자 축일 미사가 끝난 뒤에 교황대사 안젤로니 대주교에 의하여 축성, 봉헌되었다. 1858년 3월 25일 성모님이 프랑스 남쪽 루르드의 동굴(마사비엘)에서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셔서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서 루르드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을 만들어 성모님을 모시게 되었다.(한국 천주교회가 성모 무염시태의 타이틀로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게 된 날은 1841년 8월 22일이다.) 비용은 강정순씨가 지원하였다.

 

 

 

 

 

김대건신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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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초 정채석(비오)에게 성인 김대건(안드레아)신부의 성화를 의뢰하면서 고증 작업을 시작하였다. 먼저1925년 7월 5일에 있은 79위의 시복 자료를 위한 김대건 신부 유해 조사 당시 책임자였던 박병래박사와 가톨릭 의과 대학 조규상학장 등 6인으로 ’유해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나서 같은 해 3월 12일에 가톨릭 대학(서울)에서 그곳 신학원 성당에 모셔져 있던 성인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과 미리내 경당과 절두산 기념과에 각각 모셔져 있던 하악골과 치아 등을 한자리에 모아 일일이 계측하였다. 이때 과학적으로 실측 조사한 수치와 균형에 의하여 김대건 신부의 성화가 그려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확인된 자료를 토대로 성인 김대건 신부 동상을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탄생 1백50주년을 맞아 기념 제작한 것으로서 역시 정채석 씨가 제작을 맡아 그의 축일인 7월5일 건립되었는데 좌대 높이 1.7미터, 본상높이 2.4미터의 화강석상이었다. 비용은 명동 본당 신자인 김송절(마르띠나)씨가 지원해 주었다. 그런데 이 석상은 약 1년 뒤에 지금의 김대건 신부 동상이 건립되면서 가톨릭 대학내의 성당 앞으로 옮겨졌다. 이때 좌대는 대로 남아 있었는데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순교자 석상’이 1973년에 만들어져서 그 위에 세워졌다.

현재 기념관 동쪽 뜰에 우뚝 서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은 1972년 5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의 동상 축성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을 대리한 김종필 국무총리, 노기남 대주교, 양택식 서울 시장 등에 의해 제막되었다. 좌대 높이 5.8미터, 본상 높이, 4.5미터의 웅장한 모습이다. 이 동상의 제작은 전뢰진 교수(홍익 대학교)가 맡아 주었고 소요 자금 2,000만원은 전액을 대한 생명 보험의 최성모 회장이 지원하였다.

 

 

 

 

 

순교자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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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석상은 1973년 8월 1일에 세워졌다. 성인 김대건 신부 석상을 혜화동 가톨릭 대학 성당 앞으로 옮기고 좌대만 남아 있었는데, 여기에 절두산 순교성지를 상징하는 본상 높이 2.2미터 크기의 화강암 석상을 세운 것이다. 제작은 서울 대학의 최종태(요셉)교수가 맡아주었고 비용은당시 양화진 본당 복자 부녀회의 우명신(루시아)회장이 지원하였다.

석상은 3인 가족의 순교자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다시 몸통 위에 받쳐 놓은 형상으로 120년 전 절두산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순교 광경을 연상시켜 주는 작품이다.

 

 

 

 

 

형구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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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구돌은 병인 박해 때에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으로 1974년 8월 5일에 충청북도 괴산군의 연풍 공소(수안보 본당 관할)에서 이전해 왔다. 당시 수안보본당에서 사목하던 메리놀회 소속 정 로버트 신부가 순교자 관계 유물로서 제보한 것을 박희봉 기념관장과 오기선 신부가 확인하여 옮겨온 것이다. 공소 집은 포도청사였다고 하는데 1886년 한.불 조약에 따라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땅 속에 묻혔던 것을 발굴해 내게 된 것이다.

 

이 돌은 둘레가 3미터, 앞 구멍 지름 30센티미터, 뒷구멍 지름 6센티미터, 원추형 구멍의 앞뒤 거리 30센티미터로서 전체가 일그러진 원 모양을 띠고 있다. 앞 구멍에 머리를 대고 목에 밧줄을 건 뒤에 뒷구멍에서 잡아당겨 질식시키는 교수형 집행 기구였던 것으로 그곳 공소에도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형구돌이 전시되어 있다.

 

 

연풍은 험한 새재의 산세로 피난하기 좋을 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요로였던 까닭에 신자들이 초기 박해 때부터 깊이 숨어살면서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성인 김대건 신부에 이어 1849년에 사제가 된 최양업(토마)신부는 11년 동안 이 고장에서 사목하다가 새재 아랫 마을인 문경 진안리에서 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 고장 출신의 신앙 선조들 가운데에는 성인 황석두, 성인 이윤일, 순교자 조 아우구스티노, 추순옥 회장, 김마르티노, 김 마태오 부자 등이 있다. 그리고 1969년 4월 23일 연풍에서 위의 형구돌로 김요셉과 전 바오로가 순교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영광의 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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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으로 올라오는 길 입구에 세워져 있는 돌기둥은 서울 대학 미대 교수였던 이순석(바오로)교수가 1973년 가을에 기증하였다. 높이 2.25미터, 둘레 1.8미터의 검은 돌기둥으로 앞면에 ""영광"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는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글이 십자로 새겨져 있다. 이순석 교수 자신이 강화도 근처 바다 밑에서 발굴한 자연석을 소재로 원형대로의 상태에다 직접 글을 새겼다.

 

 

 

교 통 :

지하철2호선 이용 합정역에서 하차 후 합정 로타리에서 도보로 15분 거리

 

주변명소 : 국회의사당, 여의도 공원, 한강시민공원

 

위 치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6-1

 

문 의 : 절두산 성당 (02)3142-4435, (02)335-0213

 

 

http://www.netsgo.com/basic/museum/sun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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