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바람에 대한 짧은 이야기5

2000. 2. 16. 오후 1:57:42

글자

불의한 힘

 바람은 생명과 자유를 억압하는 힘의 표상으로 자주 비유된다. 물론 김기림의 ’기상도’처럼 파멸 뒤의 재생을 상징하는 바람을 노래하는 경우도 있다. 김기림은 태풍을 앍고 어두운 세계를 몰아내고 새로운 삶을 마련하는 쇄신의 바람으로 비유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바람은 재생보다는 자유를 억압하는 힘으로 자주 발견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던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풀이 생명과 자유의 표상이라면 바람은 이것을 억압하는 힘이다. 풀은 지천에 흩어져  피어 있는 민초(民草)와 같다. 따라서 바람은 민초의 자유와 생명을 힘으로 제압하여, 끝내 울게 하는 부당한 압력인 셈이다. 불의한 바람이 풀에 가해져서 풀은 눕고 쓰러져 울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다. 바람은 연약한 풀을 발목까지, 나중엔 뿌리채 뽑을 기세로 덤벼든다. 그러나 풀은 어떤 위기에 봉착해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것을 극복한다. 풀은 어떤 부당한 권력과 힘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표상한다. 이때 ’바람’이 자유를 억압하는 포악하고 불의한 힘이라면, ’풀’은 불의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인간의 본질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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