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튼의 [칠층산]을 다시 펼쳐 봅니다.
[칠층산]에는 많은 보석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글의 큰 줄기는 저자의 성장과 회심을 시간적으로 따라 가는 것이지만 중간 중간 만나는 머튼의 솔직한 발언들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어김없이 읽는 이의 가슴을 팝니다. [칠층산]의 감칠 맛은 이들을 찾아 음미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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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본성은 자유로웠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습을 따라 횡포와 이기심의 노예이기도 했다. 이 세상은 나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인간들,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면서도 공포와 절망적인 자기모순 속에 허덕이며 사는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칠층산], 11쪽)
"행복이 초자연적인 은혜와 아무 관련도 없는 단순히 자연적인 문제뿐이었더라면, 나는 어른이 되었을 때 절대로 트리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12쪽)
"사람은 어느 누구나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나의 일생이 다른 이들에 의하여 형성되고 규제되듯이, 또한 다른 수천 명의 사람의 운명이 나 자신의 선택과 결정과 욕망에 의해서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나는 이제 윤리적 우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안에서 나는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와 관련을 맺는다. 이 안에서 벌떼처럼 한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우리'라는 집단은 선 아니면 악, 전쟁 아니면 평화라는 공동 목적을 향하여 서로 끌어당긴다." (23쪽)
"(종교에 대해 아는 것) 이것은 인간 내면에 새겨져 있는 인간 본성이다. 집을 짓고, 땅을 경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공동의 아버지이며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인류가 공동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승복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있기를 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요구다." (25쪽)
"악마는 어리석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을 천국에 대해서도 느끼도록 한다. 그는 사람들이 죄악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은총의 수단도 꺼리도록 만든다. 밝음이 아니라 어둠을 통해서,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로서, 명백함과 본질로서가 아니라 꿈과 정신착란의 환상을 통해서 악마는 인간을 그릇되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란 얼마나 나약한지 조금만 힘이 들어도 진리를 찾아내는 일을 포기하고 만다." (42쪽)
"진실로 많은 이들이 너무나 늦게까지 깨닫지 못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고통은 피하려고 애쓸수록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진리다. 상처입을 것을 두려워하는 만큼 더 작고 사소한 것들에서조차 괴롭힘을 당하게 마련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제일 바둥거리는 그 사람이 결국에는 가장 심하게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지극히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부터 오는 까닭에 그것은 이미 남이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그의 고통의 주체요 원천이다. 따라서 그의 존재와 의식자체가 가장 지겨운 고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마귀가 철학자들을 시켜 인간 본성에서 선행의 능력을 내장을 빼내듯이 몽땅 빼내어 오히려 인간 자신임을 거역하게 하는 또 하나의 크나큰 타락이다."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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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층산]에 널린 보석들 소개는 맛배기로 이쯤에서 끝내고 '외폭건'을 읽으며 느낀 점을 하나 보탭니다.
직업이나 취미로 글을 쓰는 처지는 아니지만 가끔 글을 썼을 때 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제 글에 대한 읽는 이들의 반응입니다. 대체로 제 글을 건조하고, 관념적이고, 재미없는 쪽으로 보는데 제 생각에도 이는 사실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사회에 나온 이후의 행적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로 기획쪽 일을 담당하면서 논리, 생략, 간단명료 등의 원칙에 길들었습니다. 자연히 글도 연역적으로, 앞뒤 논리에 맞추어, 잡설은 빼고 쓰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얼마전 바바라 민토의 [피라미드 원칙 - 논리적 기술]에 '귀납적 추론은 창의적 두뇌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연역적 추론에 비해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에 크게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논리적, 연역적으로 쓰는 글이 훨씬 어렵고 고상하다고 느껴왔던 터였습니다.
다음은 제 사고의 패턴과 실생활인데 꼭 제가 제 글쓰듯이 생각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합니다. 자기 테두리 안에서 확실하고 명료한 것만을 좋아하면서 살다 보니 차츰 생각과 행동이 좁아졌는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평화신문에 기나긴 연재를 하셨던 양승국 신부가 떠올랐습니다. 그 신부님 글의 소재는 어김없이 자신의 생활속에서 나옵니다. 일상에 충실하는 만큼 쓸거리도 많다는 것이지요.
'외폭건'을 읽으면서 많이 부러웠습니다. 이렇게 예쁜 글을 쓸 수 없을까 입맛을 다셨습니다. 제 생활이 충실해질 때 쯤 그런 글이 나올 법 한데 그 생활이란 것이 갈수록 진리와는 멀어지니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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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가 진정한 나의 힘이 되려면, 상대의 탈렌트에 곧추세워져 있는 나의 시선을 선회하여 나만의 고유한 탈렌트에 신뢰를 걸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불려 나가려는 의지가 생길 때이다." ([외로움의 폭넓은 지류을 건너다], 8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