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국정원에서 평생을 보낸 모 차장의 글이다.
민간 정부가 들어선 지 20년이 지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국가안전기획부 포함)은 개혁 작업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필자도 재직시에 '개혁 실무대책위원장'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고 그 때마다 경험과 능력을 갖춘 수많은 간부와 직원들이 강제적으로 떠났다. 그러나 '업무의 능률화' '과학화'라는 거창한 말들이 오갔지만 결과는 외형만 바뀌었을 뿐 본질적 문제는 그대로였다.
결국 국정원 요원들만 희생되었고 업무적 측면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당연히 직원들 사기가 땅에 떨어져 일할 맛 안 난다는 불만이 비등했다. 그러나 일부 국정원장들은 할 일은 내 팽개치고 엉뚱하게 내부 직원들 기 꺾는 데만 열을 올렸다. 이처럼 내부 기강만 강화한 결과 국정원이 원장의 독재기관처럼 돼버려 차장들은 의견 개진을 기피했다.
국정원 개혁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는 한 아무리 개혁을 반복해도 소용 없다. 국정원에서 평생을 보낸 필자에게 지금 정치권이 주장하고 있는 국정원 개혁은 외형만 바꾸는 '보여주기식 쇼'로 보인다. 국정원 개혁을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개혁은커녕 오히려 후퇴만 거듭할 것이다.
YS부터 MB까지 민간 정부 20년 동안 국정원은 크고 작은 사건들 때문에 겉만 민주정권인 좌파정권의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을 때 국정원 직원들은 뭔가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초부터 국정원 직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정부도 의외로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퇴임 직후, 청와대 문건이 담긴 데이터베이스 일부를 사저로 가져갔다. 국정원은 그때 바로 회수해야 했으나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격사건 때도 대 테러 방지 차원의 국정원 개입은 없었다. 현대아산이 보고를 지연한 일 등에 대해서도 일체 조사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의 국정원은 김현희 씨에게 수 차례 이민을 강권하면서 압력을 넣었다. 그 일은 노 정권의 색채와 도덕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중대한 사건이었고 NLL을 둘러싼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못지 않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은 이 사건도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은 과거사진상조사위가 벌인 좌편향적 조사결과와 대북 송금관련 의혹, 또 좌경 인사들의 노골적인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 등도 모른 체 했다.
많은 사람들이 국정원이 실정법을 위반하고 직무를 유기하면서까지 좌파정권을 돕고 있는 것 아니냐며 우려했고 특히 이명박 정부마저 노무현 정권 이후 급증한 반국가적, 용공이적 행위를 묵과하는 데 크게 분개했다.
지금 민주당과 야권은 국정원이 정치개입을 했다고 온통 난리다. 그럼 민주당 집권 당시에는 국정원에게 정치개입을 하도록 지시한 적이 없었는가? 민주당이 원하면 필자가 그 당시 있었던 모든 일들을 공개할 수 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 문제는 민주당이 아니라 반대로 새누리당이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현재 새누리당에는 과거 민주당의 막강했던 몇몇 실세 정치인들이 있는데 아마 그들은 요즘 민주당의 행태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다. 국정원의 정치개입 문제에는 정권과 여야는 물론 과거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뜻에 따라 움직였던 국정원 직원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문제가 되는 국정원의 정치개입 문제는 국정원 개혁과 바로 직결되는 사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의 개혁 방안은 이 문제가 종결된 후에 연구, 발표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정원 개혁은 정치권이 아니라 정보 전문가들과 국정원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개혁안은 국정원 자체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며 그 후, 정치인들이 논의하는 것이 순서상으로 맞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국정원이 개혁안을 마련하기도 전에 감놔라 배놔라 하고 있는데 미 카터 전 대통령이 망쳐놓은 CIA는 현재까지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부서가 있음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들이 국정원 전체를 정치에 개입한 집단으로 몰아가고 있어도 국정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할 만큼 힘이 있었다면 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겠는가? 국정원은 정치인들이 저질러 놓은 잘못을 책임지는 기관이 아니다. 이번의 국정원 개혁은 그 점을 명확히 하여 정치권 압력에서 자유로운 제도적 장치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당의 사안에 대한 경중을 무시하는 행태도 심각한 문제이다. 국가의 안위가 걸린 NLL 문제는 은근슬쩍 넘기려고 하면서 국정원의 댓글 몇 개를 국기문란 행위라며 확대 재생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원세훈은 재판 전에 국기문란죄인으로 매도하면서 국가내란음모죄의 이석기는 재판 전이라며 제명을 유보하는 이중성도 국민을 우습게 보기 때문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