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박통과 농촌 새마을 운동

2008. 10. 2. 오후 7:31:36

글자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박통은 5,16 후 조국 근대화 기치를 내 걸며 중공업 입국을 천명했다.
그리고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구로동 수출산업 단지와 포철 그리고 울산공단 구미공단 등 중화학공업 기반조성과 육성에 진력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이 전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을 중시하여 
도요다  포드 피아트사와 제휴하여 합작공장을 설립하고 코로나 코티나 피아트 자동차를 생산했는데
그 전에는 미군이 폐기한 찦에 드럼통을 망치로 두들겨 펴 덮은 차체의 시발택시 밖에 없었다.
   
박통의 여러가지 정책들과 계획들이 한치 오차도 용납 안 되는 치밀한 군 작전을 방불케 했다 한 것은
성격이 달라 상관 없어 보이는 여러 사업들이 서로 크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동반 성장을 한 때문이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하여 분명하게 조국 근대화와 경제 개발을 위한 것이라 했는데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어떤 정치인이 목청 높여 비난하기를 
 
"기존의 신작로도 차가 없어 아무 문제 없고  현재도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굶는 형편인데 
 멀쩡한 논 밭을 쌀 한톨 안 나는 길 만드는 것이 나라를 망치는 짓이지 어떻게 경제개발이란 말인가?"
 
뭘 모르던 많은 국민들도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동조했지만 박통은 정확히 앞을 꿰 뚫어 보고 있었다. 
바로 경부고속도로 때문에 자동차와 여타 산업들이 하루가 멀다며 급속도로 눈 부시게 발전한 것이다.
아마도 젊은이들은 모르리라 생각되는 그 당시 일화 한 토막
경부고속은 처음에 수원까지 29km만 개통했는데 멋진 훌륭한? 새차들이 기흥쯤에서 퍼져 버렸다.
 
그리고 수원 차수리 공장에 견인되어 바가지 쓰고 수리했는데 고장 원인은 부실한 국산 엔진오일 때문.
말만 국산 차였지 차체와 타이어 그리고 내부장식 엔진오일 정도만 국산이라 사실상 국내 조립이었다.
따라서 저질의 국산 엔진오일이 100km 이상 장시간 고속도로 주행에 무리인 것은 당연했다.
 
여하튼 수원의 엔진보링 공장들이 한동안 톡톡히 재미를 보았으며.
그것은 또 장기간 기술을 조금씩 쪼개어 팔고자 했던 합작사들의 횡포를 미리 예방한 결과가 되었다
그 시절 차에 무식한 한국인들에게 엔진 성능이 나빠서 그렇다 소문나면 차가 팔리겠는가?
합작사들은 즉각 고품질 생산기술을 지원했으며 100km 이상 장시간 주행용 오일이라고 광고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가 완성된 후 또 많은 차들이 부산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고장났다.
그리고 각 회사들이 부산을 왕복해도 전혀 문제없는 차...라고 광고했으니 당시 수준을 알만 할 것이다.
국산차 생산 초기의 많은 문제점들이 단기간에 개선된 것은 그처럼 순전히 경부고속도로 덕분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아파야 병원에 가듯이 차량도 문제가 있어야 개선되고 기술이 발전되는 것이다.
 
자동차 산업이 여러 분야에 미치는 엄청난 기술 파급으로 발전의 큰 축임을 부인할 사람 아무도 없다. 
박통은 그것을 잘 알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고속도로 건설과 동시 합작사들을 끌어 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계획하고 추진한 정책들은 정치인 누구도 말한 일 없는 새롭고 신선한 것들이었으며
모든 여건들이 힘들고 어려웠음에도 차질없이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마치 군 작전과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박통은 무조건 죽일 ×이라며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은 쥐뿔도 모르고 독제 타도와 민주화만 떠들었던 자를 훌륭하다 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그는 그 당시 조국 근대화를 위하여 매진하던 박통의 방해꾼 역할 밖에 한 것이 없었다.
만일 박통이 그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 들였다면 그의 정책들은 실패했을 것이 틀림 없다.
따라서 당시 빈곤 탈출을 위한 근대화 정책과 민주화 요구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했는가 토론은 좋은데.... 
 
암튼 어쨌던 도시에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크고 작은 공장들이 도시 빈민들의 일손을 필요로 하고 있을 즈음에
전국의 각 농촌에선 새마을 운동이라 하여 농민들이 엉뚱한? 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시절 새마을 운동이 크게 성공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그리고 우리 보다 못한 많은 나라들이 그것을 배우려고 줄 지어 방문했지만
내가 과문한 탓인지 그들의 어느 국가도 우리처럼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어 본 일 없다.
 
만일 그들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원인은 아래 중에 한가지 이상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때문이리라.
먼저 강도 약도 아닌 적당한 강제.. 또 그것은 조금의 융통성도 없이 엄격하고 철저해야 한다.
다음은 농민들이 부지런해야 하고 오랜기간 강제에 길 들여져 불평없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1년 중 농사 일에 지장이 없거나 적은 농한기가 있는 나라여야 한다 등이 필수적 조건이다.
 
적당한 강제와 융통성 배제는 성공의 절대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어려운 사정을 봐 주고 싶은 것이 인정이고 또 평소 잘 아는 사이면 모른체 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또 민주화에 인권이 보장되면 정당한 댓가가 아닐 경우 사정사정하며 추진해야 하지만.
우리는 군수와 읍 면장들이 군사정부의 서슬이 시퍼런 군대식 지시를 누구도 감히 거부하지 못했다.
 
각 지역에 파견된 새마을 운동 책임자가 
동네 이장들을 집합(오십시오 아님)시켜 언제까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어려움을 호소하면
당신들 동네를 살기 좋게 만들자는 것이고 농사를 수월하게 하려는 것인데 불만이냐며 호통쳤다.  
그래서 애로 많은 어느 이장이 비밀히 접근했다가 공개 망신과 함께 동네까지 불이익을 받은 일도...
 
그렇듯 새마을 운동 책임자의 엄격함이 무섭기는 했지만 상부 지시에 철저하다는 신뢰감은 있었다.
당시 새마을 운동의 주요사항을 크게 보면
기존의 여러 농로(農路) 확장과 초가지붕 개량 그리고 동네 공공시설 개선 등이 주였다.
그 중에서 먼 논 밭들까지의 농로 확장은 고속도로 경우처럼 새마을 운동의 핵심이나 다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지게와 느린 소 뿐이라 힘만 들고 능률이 저조했던 시절에 사람과 지게 3~4배의 경운기가 가능하고. 
또 힘이 약해 큰 도움 안 되던 여자들과 밥만 축내던 아이들이 리어카로 어른 두배의 일을 한다면.
어느 집이든 아이들이 많아 모두가 일하면 왠만큼 큰 일 쯤은 하루에 마칠 수 있고 비용도 필요없다. 
 
즉 기존의 여러명 일꾼들 품삯과 그들에게 하루 5끼니를 욕 안 먹게 대접하려면 소흘히 할 수 없고
그리고 부엌 일에 여자들이 온종일 매달려야 하는 수고와 그에 따른 비용이 절약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 보다 몇 배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오히려 몇배의 능률이 가능하니 놀라운 일 아닌가? 
 
그런데 경운기로 농사지으려면 모든 전답들을 반듯하게 개량(농지정리)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구불구불한 논과 논 사이의 경계 둑을 바둑판처럼 정리해야 일 하기가 쉽고
겨우 지게 짊어진 사람과 소만 다니던  비좁은 농로 확장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또 경운기와 리어카 통행을 위해 높고 가파른 여러개의 고갯길을 깎아 평지처럼 낮추어야 했다. 
 
그런 모든 작업을 각 동네마다 농민들이 품삯없이 자체적으로 했는데 농한기를 활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겨울철 농한기라 해도 제 밥먹어 가며 공짜 일이 즐거울 턱 없다.
그래서 어느 동네나 있는 몇몇 말 많은 사람들의 불평 불만은 당연 
하지만 그 불평꾼들도 새마을 운동 책임자에게 불려 갔다가 오면 찍 소리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각 농로 확장시에 인접한 전답을 조금씩 편입 당한 땅 주인들의 손해가 문제였는데. 
혼쾌히 자발적으로 협조한 경우는 극히 일부였고 대개들은 마지 못해 협조했다.
그에 대해 재산 가치는 종전대로 유지되어 손해 없고 단지 수확이 약간 적어진 것 뿐이라 하면서.
그 까짓 쌀 몇톨 쯤은 농로 확장에 따른 이익으로 충분히 보상되고 남는다며 무시했다.
 
그리고 실제로 훨씬 좋아진 여러 부가적 이익을 고려하면 그 말이 맞아 불만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당시 개발자금이 어려워 그랬다면 훗날 어떤 식으로든 보상해야 옳았다는 생각이다.
여하튼 지적도에 경계 둑과 여타 농로들이 전답에 포함되어 재산 피해는 없었지만.
그게 지금도 그대로인지???
 
새마을 운동은 초가지붕을 기와 또는 양철(함석)과 스레트로 교체하는 일도 주요 항목이었다.
보기에도 그렇고 가을마다 이엉 엮어 덮는 수고도 하지 않아 좋기는 한데
후에 통일벼가 쌀 수확량을 확기적으로 증가시켰을 때 겨울철 소 먹이용 볏짚이 문제되었다.
통일 볏짚이 푸석하여 좋지 않아 소 있는 집들은 필요한 만큼 별도로 기존 벼를 제배해야 했다.
 
그리고 전기가 없던 동네들이 해결되었고 장마철에 멀리 돌아야 했던 다리도 놓았다.
지저분하고 원시적인 공동 우물도 말끔히 개선되고 각 동네 새마을회관도 새롭게 지어졌다.
또 동네 진입로가 곱절로 넓어지고 비가 와도 질척거리지 않게 포장된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간혹 급하여 택시를 탈 때마다 이상하게 꼭 도중에 우차를 만나 곤욕을 치러야 했으니 말이다.
볏가마를 잔뜩 실은 정미소 우차를 피하려고 길 난간에 바짝 붙이다 택시가 논에 전복된 일도.....
길 난간 흙이 단단하지 않아 차 무게에 무너진 때문이다.
 
우리 동네 경우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완료되었지만 고향을 자주 방문하여 자세히 알고 있다.
겨울철에 눈 없는 날마다 동네 사람 모두 동원하여 3년 쯤 했다는 기억이다.
그리고 처음에 리어카와 경운기에서 몇년 후 다기능의 트랙터로 빠르게 발전했는데.
트랙터 정도 중량의 농기계를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모든 농로를 포장해야 가능함은 물론이다. 
 
새마을 운동에서 무엇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듯 엄청난 농촌 개혁을 했어도 국가에서 지원한 비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당시 동네가 한 일 전체를 정당한 인건비로 계산한다면 지원이 겨우 3~5% 정도나 될런지?
시멘트와 다리 공사용 철근 약간 정도라 거의 동네 돈과 인력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 아니었다.
 
전기를 끌어 들이던가 지붕 개량에 따른 비용은 몇 년간 동네 또는 각자 분할상환 방식이었다.
많은 시멘트가 필요한 새마을회관과 동네 진입로 공사는 거의 동네 부담이나 마찬가지.
매년 시맨트를 조금씩 주어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동네에서 자체 비용으로 해 치웠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들이 사용할 회관이고 진입로라 하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농사가 기계화 되자 인력이 남아 돌게 된 점이다.
그 때문에 땅 없는 젊은이들이 살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며 고향을 떠나 상경했는데.
돈을 벌지 못하면 당장 굶어 죽을 판이라 겨우 차비 뿐인 무조건 상경이었다. 
그렇듯 가난한 젊은이들이 대거 도시로 간 배경에는 새마을 운동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서울은 돈 없으면 굶어 죽는 곳이었다. 
또 설령 돈이 있어도 뻔히 눈 뜬체로 코 베이 듯 날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살벌한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굶어 죽을 형편이니 장소만 다른 것이다.
뱃장 좋은 한 사람이 서울행 열차를 타자 너도 나도 친구 따라 강남으로 간 것이다.
나 역시 몇년 전 무작정 상경이지만 본격적인 무작정 상경은 그 무렵이었고 또 전국적이었다.
 
새마을 운동 성공에 대하여
조상 대대의 원시적 농촌을 완전히 바꾸어 현대화시킨 농촌혁명이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또 각 도시의 눈 부신 발전을 도시 빈민들 삶을 크게 향상시킨 산업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혁명의 모체가 5,16이고 혁명 호칭에 이의 없이 오늘까지 온 것인데.
그런 것을 거두절미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은 쿠데타라 하면서 군사정변으로 바꿔 버렸다.
 
그래도 그들은 쿠데타는 인정하지만 국가발전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긍정적 시각이다. 
또 독제가 새마을 운동과 여타 사업들을 강제했지만 그것이 성공의 핵심이었다며 긍정적이다.
당시는 박통 같은 추진 능력의 정치인이 없었고 정부 사정도 정당한 방법이 통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민주화와 인권이 실현되었다면 조국 근대화 정책이 불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의 여러가지 여건과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은 점을 중요시한다.
즉 독약도 잘 쓰면 병에 좋듯이 5,16이 바로 그 경우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반만년 역사에 딱 한번 찾아 온 그 기회를 박통이 적절하게 잘 활용한 것이라 하면서
오늘 날 5,16 비판은 적절하지 않고 좀 더 훗날에 전체를 고려하여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그 당시 농촌에 살면서 보고 느낀 5,16을 말했다. 
오늘의 기성세대들 대부분이 농촌 출신이므로 아마도 나의 시각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래서 박통을 잊지 못하는 원인과 근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이 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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