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부터
"백성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고 했습니다.
국민들을 모두 잘 살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가난한 북한 민초들을 보며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많은 기성세대들이 박통을 잊지 못하는 주된 원인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즉 그의 조국 근대화 정책이 성공하여 나랏님도 불가능한 백성들 가난을 해결한 업적을
우리 역사상 유례 없는 유일무이한 큰 치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처참했던 당시 빈곤 참상은 얼마전 '보릿고개와 박통' 에 자세히 말했으므로 생략합니다.
그런데 박통 반대자들 중에는 그의 업적을 크게 폄하하여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세상은 항상 발전하게 마련이고 박통이 먹여 주고 집을 준 것도 아니다 하면서.
전 국민이 모두 열심히 일한 때문에 잘 살게 된 것이란 주장과 그에 한 걸음 더 나아 가.
5,16만 아니었으면 민주화가 빨랐고 오늘 보다 더 발전했을 것이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여 잘 살게 된 것이지 박통이 직접 해 준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민들이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여건 즉 일자리가 많이 있었느냐? 와
또 그들 주장 이면에
가난의 원인이 마치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라 비치는 것이 문제고 아주 고약스럽습니다.
전 그래서 당시 상황을 잘 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어지간한 부자 아니면 대학에 갈 꿈도 꾸지 못했음을 여러번 말했습니다만.
요즘 높은 수능성적 아니면 어려운 일부 사립대들이 당시 빗자루 학교였음을 아십니까?
빗자루는 물론 매년 대부분 학과가 정원 미달이라 지원이 곧 합격이라는 야유입니다.
그러니까 형편이 넉넉한 부자라 해도
유명 대학도 취직이 어려운 판에 아까운 논 밭 팔아 인기도 없는 학교를 왜 다니느냐?
우골탑(牛骨塔)도 그 시절에 생긴 말인데 즉 힘들게 다녀도 농사꾼 될 것이 뻔하다는 것.
실제로 그 당시 3~4개 유명 대학교 외에는 결혼 조건 말고 도움될 일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는 장학금 제도가 없어 가정교사 등 고학생(苦學生)이 많았는데
그나마 엄청난 입학금이 가능한 집 경우이고 가정교사 등 A/R 자리도 흔치 않았습니다.
그렇듯 어렵게 또는 전답 팔아 대학을 나왔어도 농사꾼이 된 이들이 허다했던 것은
농어업이 70%였던 산업화 이전 시절이라 일자리가 없어 취직을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하지요.
당시 처녀들도 요즘처럼 농촌을 싫어 하여 편한 도시생활을 동경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출신들이 아무래도 도시생활 가능성이 높다 하여 제 1의 신랑감이었지요.
키가 작고 못생긴 건 문제 안 되고 경미한 장애마저 괜찮다 한 처녀들까지 있었으니까요.
농촌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농사 일이 불가피하여 그만큼 지긋지긋했다는 반증입니다만.
만일 제 이야기가 믿기 어렵다 생각되면 그 또한 당시 농촌을 모른다는 반증입니다.
그 시절 농촌은 가정형편 상관없이 딸들 교육을 무시하여 초등이 보통이었으며
세상 물정에 비교적 밝았던 일부 부모들만 여고를 졸업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또한 신랑 후보들은 사돈의 팔촌에 또 그들 사돈의 팔촌까지 모든 연고를 총동원하여
간신히 이력서를 보내 놓고 하세월을 기다리지만.....
그래도 딸 부모들은 부자들은 연줄이 많아 결국 취직이 될 것이라 믿고 출가시켰습니다.
제가 잘 아는 대학 출신 농사꾼 선배 몇분 예를 들었습니다만
한 선배의 부인은 남편이 60대 중반인 지금도 가끔씩 불만과 푸념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즉 속아서 시집 왔다는 불만이니 젊었을 땐 얼마나 시달렸겠습니까?
사실 부인을 속인 것은 남편이 아니라 당시의 낙타 구멍 취직난인데도 말입니다.
그 당시도 몇 안 되지만 좋다고 소문난 회사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입사가 어려워 고위 임원들 추천 소위 빽 없으면 생각조차 말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쥐약 값이 엄청 나 오해받기 십상이라 소개역할이 조심스러울 건 당연.
그러한 상황이 사기꾼을 양산하여 취직도 못하고 돈만 떼인 사람들도 부지기였습니다.
그렇듯 그 당시 어려운 사회상은 열심히 일하고자 해도 일할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취직난은 고졸들도 비슷했으며 중졸 이하들은 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농촌에선 대학과 고교를 나와 농사꾼이 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시대였는데.
천만 뜻 밖에도 5,16 후 엉뚱한? 군사정권이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준 겁니다.
물론 초기 여건은 말도 못하게 열악했지만 오랜 가뭄에 단비처럼 애타게 기다렸던 일
그저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지덕지하면서 불평없이 신명나게 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국민입니까?
한번 신명나면 한반도 전체가 들썩들썩 하도록 위력을 발휘하는 민족 아닙니까?
박통이 그 신명을 알고서였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암튼 그는 젊은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국가 발전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정책들 모두가 한치 오차도 용납 안 되는 치밀한 군 작전을 연상케 하여
대다수 국민들이 혀를 내 두르며 신기해 하면서 열열히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젊은이들은 그가 인권과 민주화를 몰라서 그리 했다 생각하지 않았으며.
두 마리 토끼가 어렵기 때문에 더 시급한 토끼를 먼저 잡고자 했다 생각했고.
또 적은 돈으로 경제개발하려면 어느 정도 독재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독재는 일 밖에 몰랐던 대다수 민초들에게는 거의 불편 없었습니다.
일부 지식인 계층의 정권 도전 또는 비판세력들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 그의 독재를 두둔하려 함이 아니라 그 당시 민초들 입장에서 말한 것이며.
박정권 부정부패 문제도 역대 정권 모두 있었던 일이라며 형평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박통이 부정부패 원조 주장은 소가 웃다가 미칠 일...광우병이 걱정됩니다.
박통 전의 이승만 정권이 3,15 선거만 부정하게 치렀다 안 다면 큰 오류입니다.
그럼.. 그 때 전국 방방곡곡 동네마다 고무신과 술 등 그 많은 비용들은 대체 어디서?
3월 15일 그 날 동네 입구 동구나무 아래 모여 막걸리 한 사발씩 퍼 마시고
모두가 팔뚝에 자유당 완장을 차고 군대마냥 줄 지어 투표장으로 가던 어른들....
그를 잊지 못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구관이 명관' 이란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승만부터 현재까지 박통에 비견되는 큰 업적의 통치자는 없습니다.
물론 다들 열심히 했겠지만 박통 같이 눈에 확 들어 오는 크고 확실한 업적은 없으며
또 간접보다 직접 피부로 느끼는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한 그들에게 반대 세력들의 지나친 감정적 폄하는 당연한 반발을 불렀습니다.
DJ부터 10년간 계속된 일방적인 비판이 오히려 크게 역 반응을 초래한 것입니다.
배 부르고 뭘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은 말 끝마다 DJ DJ 하는데
당시 그는 사사건건 박통 발목만 잡았지 민초들에 도움된 일 한가지도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욕심만 부린다며 비판한 이들이 많았으며.
그럼에도 그에게 많은 표가 갔던 것은 지나친 박통 지지에 대한 견제 때문이었고.
집권 후의 반미적 친북정책도 우리의 현실을 무시한 인기정책에 불과하여
그러한 부정적 일들이 박통과 비교되면서 박근혜 지지 형태로 비판한 것입니다.
민초들 민심은 그처럼 단순한 면도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오랜 세월을 인내로 살아 온 터라 직접 주장을 꺼리는 특징이 있으며
그에 노년의 신중을 더하여 그의 혈육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이상은 기성세대 입장에서 고찰한 것입니다만
또 저도 그들 중 한 사람이지만 그들의 견해가 옳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 같은 인식의 계층이 현 사회에 엄연히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 수구꼴통이라 비난하며 멀리 하는 행위가 옳고 최선인가?
또 그들 역시 반대 계층과 충돌하여 얻을 것과 좋은 것이 무엇인가? 인 것입니다.
세상은 변해야 하고 또 변하고 있습니다.
5,16과 박통 업적은 훗날 언젠가 공정하고 정확하게 평가될 것이라 믿습니다만.
그동안의 보수 정권과 진보 정권의 것들은 당사자들이 평가한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도 일부들이 활동 중인 상황에 '이것이다' 는 더 더욱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식견의 분들은 박통을 말함에 신중을 기함니다만
반대자들 일부는 과오 부분만 침소봉대하여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오늘입니다.
특히 '5,16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없어야 했다' 주장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업적 속에서 최대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계층이 누구입니까?
어머니가 밉다고 아들이 이룬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격이지요.
그렇듯 일단 그럴싸 한 논리를 내 세워 그녀 아들의 훌륭한 업적 전체를 부정하고
그 결과 경제발전이 5,16과 박통만의 업적이 아니다 란 주장이 통하면.
오늘 보다 더 발전하지 못한 것이 5,16 때문이다...란 헛소리까지 가능하게 됩니다..
다음에는
5,16 직전 윤보선 대통령 하의 장면 내각 상황을 민초들 입장에서 올리겠습니다.
젊은 계층들이 읽고 들어 알고 있는 사실들과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만.
민초들과 당대 지식인들 시각과 입장이 크게 달랐다고 이해하면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지식인들의 경험도 몸으로 겪고 보고 들은 제 이야기 처럼 사실일 것입니다.
다만 당시 국민 전체의 것이 아니고 제 이야기처럼 일부 즉 절반일 뿐입니다.
여하튼 장면 내각 정부가 박통 보다 훌륭하게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었는지?
아님 최소한 좋아 질 가능성.. 희망이라도 보이는 것이었는지.....
60대의 기성세대들에게
5,16은 학창시절 이후 일이라 유명인이 쓴 책을 저도 몇권 읽은 일 있었습니다만.
당시 민초들 실상에 대해선 거의 언급 않거나 간략히 하면서
자신들의 관심사인 정치인들과 정국에 대해선 자세하여 크게 실망한 일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상황의 한 부분만 편향적으로 논한 점이 문제라는 것이고.
그래서 당시 정권과 몇몇 정치인들 활동 내용이 그 시대의 역사 전부인가? 입니다.
그들의 그것이 당시를 모르는 젊은 계층들에게 오해와 편견을 초래한 것 아닌지.....
거참.. 민생고를 철저히 외면한 정권과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하긴 뭐...박통 독재에 희생된 몇몇 대학생들과 산업 전사들은 매우 귀한 생명이고
굶어 죽었거나 그게 원인되어 약도 못 먹고 죽은 수많은 민초들은 별것 아닐 터.
당시 정권과 정치인들에 신물 나 했던 가난한 농민들과 빈곤층 젊은이들이
그 몹쓸 무리들을 워카발로 짓 밟아 잘 쫒아 냈다고...그들은 왜 그처럼 환호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