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을 읽고-4

2007. 8. 24. 오전 2:43:14

글자

다음에는 역시 다석 선생님 제자이시고 유불선기독교에 두루 회통하신 이화여대 교수하시던 김흥호 선생님 풀이를 좀 길게 보겠습니다. 쉽게 보기 어려운 글이라 좀 길게 인용해 봅니다. 여러분도 나름대로 느끼는게 많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내용이 너무 길어 자세한 것은 다음 인터넷 주소의 자료실로 가시면 자세히 보실수 있습니다.

 http://www.naalla.com/

 간단히 줄여서 보시겠습니다. 그래도 상당히 깁니다.

 맨 처음부터 말씀이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이 구절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신학교에서는 이 한마디를 가지고 한 학기 동안 강의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서에서도 가장 어려운 말씀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의 시대가 있었고 그 시대를 이어서 로마서, 고린도서의 바울시대가 있었는데 이 공관복음과 로마서 등을 정리하고 종합하여 다시 나온 사상이 바로 이 요한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역사로 보면 맨 마지막에 된 것이고 사상적으로 보면 가장 원숙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보통 예수님의 제자가운데 하나인 요한이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문적으로는 요한이 쓴 것인지 아니면 그의 제자가 쓴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이렇게 저자에 관해서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공관복음을 정(正)이라고 생각하고 로마서를 반(反)이라고 생각할 때, 이 요한복음은 正과 反이 合이 된 책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상적으로 가장 원숙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대개 주석을 쓰는 사람들도 이 요한복음에 대해서는 특별히 깊고 넓게 주석을 쓰게 된다.

우리가 요전에 요한복음을 읽을 때는 성서주해라는 큰 책속에 요한복음에 관해서는 안병무 선생이 많이 설명을 했는데 이것을 읽어보는 것도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안병무 선생이 가르침을 받은 선생이 불트만이라는 사람인데 이분은 실존주의 신학자로서 요한복음이라는 주석책을 냈는데 우리나라에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의 허혁씨가 번역하여 출판되어 있으니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특별히 이 요한복음은 동양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복음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마태복음은 유태사람, 마가복음은 희랍사람, 누가복음은 로마사람, 그리고 이 요한복음은 동양사람을 위해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은 특히 동양사람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쉬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루터 같은 사람도 성서가 다 없어진다고 해도 로마서와 요한복음서만 있으면 얼마든지 성서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라고 말할 만큼 로마서와 요한복음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서양사람들은 로마서를 공부하기가 쉽고 동양사람들은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쉽다. 물론 복잡하고 어렵게 전문적으로 공부해 나갈 수도 있겠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대충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이 요한복음 1장 1절을 어떻게 생각하나에 대해 말할려고 하는데 이 책(요한문학)에 나오는 주석은 여러분들께서 한번 읽어보고 그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요한복음 1장 1절은 성서의 핵심이자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양의 경전을 보드라도 논어나 대학, 중용 같은 경전의 맨처음에 나오는 1장 1절이 가장 중요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의 맨처음인 1장 1절도 동양경전과 같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맨처음부터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을 태초에 계란이 하나 있었다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즉 계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란 말은 어미닭과 함께 계셨다라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러니까 계란을 어미닭이 품고 있다란 말이다. 그런데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란 말은 계란이 곧 병아리가 되었다, 예수의 계란이 곧 그리스도의 병아리가 되었다란 말이다. 이것을 나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깨달았다라고 말하는데, 覺이란 말이 바로 계란이 병아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이것을 重生이란 말을 쓴다. 요한복음 3장 7절에 보면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계란적인 삶이 바뀌어 병아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1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시말해 어미닭 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병아리가 되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란 말은 계란이 바뀌어 새롭게 병아리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기독교란 결국은 옛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새한국이란 말을 자주 쓰는데 새것이 되는 것은 이러한 변화 없이는 새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유교 (儒敎)에서는 이것을 氣質之性(계란)으로부터 天地之性(병아리)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어떻게 기질지성으로부터 천지지성으로 변하느냐가 곧 주자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것을 性理學이라고 말한다. 이 性을 어떻게 기질지성에서 천지지성으로 바꾸느냐가 곧 性理學이다. 천지지성으로 바꾸어지면 그것이 聖이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거듭난다, 회개한다 등 여러가지 말을 쓰는데 하여튼 과거적인 내가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말해 小我的인 나가 죽고 大我的인 나로 변하는 것이다. 한번은 나의 人生이 뒤집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어거스틴이란 사람이 컨버젼(conversion)이란 말을 써서 회심이란 말로 쓰기도 한다. 그러니까 性이란 말대신에 心을 쓰면 과거의 마음이 바뀌어서 새로운 마음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이라는 글을 통해 전에는 이러 이러한 마음으로 살았었는데 지금은 새롭게 바뀐 마음으로 산다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게 된다. 바뀌어진 내용을 말하는 것이 고백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변화가 인간에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더 쉽게 말하자면 자연인(自然人)이 변해서 자유인(自由人)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데아(Idea)라고 하여 하나님(神), 영생(永生), 자유(自由), 이 세가지가 인간이 찾고자 하는 최고의 이념이다라 했다. 여기서 자유라는 말이 계란이 병아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병아리가 되기 전에는 자유라는 것이 없다. 계란속에 갇혀 있는 상태, 그것을 불교 같은데에서는 ‘속박’이라고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죄(罪)’라고 한다.

계란에서 벗어나는 것을 동양에서는 ‘해탈’이라고 하고 서양사람들은 ‘자유’라고 하는 것이다.

어미닭하고 같이 있다란 말을 칸트는 영생이라고 하고 어미닭은 神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로 말 할때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이라는 말은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는 말은 ‘임마누엘’를 말하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란 말은 ‘예수가 곧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예수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바울 그러면, 태초에 바울이 있으니 바울이 하나님과 같이 있으니, 바울의 본명은 사울이었는데, 사울이 곧 바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곧’ 이란 말이 결국은 ‘변화했다’는 말이다. 기독교로 말하면 변화했다는 말이다. 사울이 변화해서, 사울이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둘려고 쫓아다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변해 가지고 예수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이런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패턴은 우리의 생활속에 어디에나 다 적용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운동하거나 공부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거나 어디에서든 이러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자유로운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피아노를 조금도 못치던 사람이 선생을 만나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있지 않으면 ‘영생’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 같이 있지 않으면 절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있다는 말을 동양에서는 우파니샤드(Upanisad)라고 하는데 이말은 ‘선생님의 무릎밑에 앉아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임마누엘이란 말이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란 말이 되는 것이다. 이길 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무릎밑에 앉아서’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 없이는 병아리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요한복음 1장 1절을 또 내식으로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나무땜, 불사름, 내가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무땜’은 아궁지 속에 나무를 땐다는 말이다. ‘불사름’은 그렇게 하여 불이 펄펄 붙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남’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난다는 말이다.

나무가 변해서 불이 되고 불이 변해서 연기가 되는 과정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나무땜’이란 유영모라는 나무가 나에게 불을 때어준 것이란 말이다. 나는 유영모라는 사람을 보혜사라고 생각한다. 그사람이 우리 기독교로 말하면 성신(聖神)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믿고 있다. 소크라테스식으로 말하면 ‘산파’라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는 되지마는 그러나 산파가 필요하다.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유영모란 사람이 도와주었다는 말이다. 물론 내가 유영모를 만나기 전에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국에서 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었고, 일본에 갔을때에도 무교회주의자인 내촌(內村)의 제자들 중, 총본(塚本)이란 사람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과정을 겪고서도 나에게 마지막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이란 두가지 문제였다.

만일 여기다 하나더 있다면 승천(昇天)이란 문제가 되겠다. 이 십자가와 부활이란 그때 말로 하자면 속죄(贖罪)라는 것으로 나의 죄가 때워서 없어진다는 뜻인데 이 말은 아까말한 껍질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껍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또 부활이란 그때 말로하자면 구령(救靈)이란 말로 영혼을 구원한다는 뜻인데 결국은 병아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속죄 구령이란 말은 껍질을 벗고 병아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라는 것을 통해서 병아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자유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날개가 나와서 자라게 되면 승천이 되는 것이다. 하늘을 날라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그사람들을 쫒아다니며 해결할려고 해도 이 문제를 풀 수 없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목사님들을 많이 쫒아다니며 부흥회도 참석하고 산기도도 다녀 보았지만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다가 언제 이 문제가 풀리게 되었나하면 나무땜으로 풀리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나무란 십자가의 나무를 말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유영모라는 나무이다.

유영모라는 나무를 자꾸 땜으로서 결국 십자가란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속죄라고 하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 속에 불사름이 되었다.

불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내속의 정신이 살아난 것이다. 내속의 속사람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활 문제도 해결되게 되었다. 그리고는 내가 남이 되었다. 나하고 남하고를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남이다. 나하고 남하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이다.

기독교로 말하면 나무땜이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고 내가 남이란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이고 불사름이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땜」 선생님 때문에, 「불사름」 내 정신이 깨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남」 내가 나오게 되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 「내가남」을 내가 남을 비로서 생각하게 되었다라는 뜻도 되겠다. 그 이전에는 남을 남으로만 생각했는데 그후부터는 남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완성이 남이다, 모든 사람이 다 나의 완성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나는 미성불(未成佛)이고 남은 다 기성불(旣成佛)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을 다 존경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나의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무땜, 불사름, 내가남으로 요한복음 1장1절을 내식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잘 보셨습니까. 너무 길게 인용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그런대로 나름 귀중한 글인 것 같아 무리해서 길게 인용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회고입니다마는, 김 선생님과는 제가 철없던 시절 각별한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신촌 어귀의 한 학교에 다닐 적 이야기입니다. 당시 방학이 되면 여기저기 산촌 경개 좋은 절로 놀러 다니는 것이 좋아서 한 종교서클에 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찮게 길 건너 여자대학의 같은 종류의 서클에 있던 여학생을 알게 되었는데 자기 학교에 훌륭한 교수님이 계시는데 방학동안 특강을 하는데 같이 듣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눈망울 초롱초롱한 여학생을 따라 강의를 들으러 갔더니 그 선생님이 바로 김 흥호 교수님이셨습니다. 당시 화엄경인가하는, 아무튼 동양고전을 강의하셨는데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야 열 명이 채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몇 명 안 되는 학동들을 놓고 선생님께서는 정말 열강을 하셨는데 불민한 저는 그저 선생님 강의보다 그 눈빛 초롱초롱한 여학생 뒷머리를 보는데 더 열중해서 강의 내용이 별로 생각이 안 납니다만, 단지 ‘요령(要領)’이라는 단어를 풀이 하시면서 고양이를 잡는 방법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시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래서 요령이란 단어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요령 부린다.’, ‘요령이 좋다’는 식으로 사용할 때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가장 알맞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생각이 납니다.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선생님은 참 젊으신 모습이었는데 벌서 미수이시니 참 아득한 옛날입니다.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당시도 이미 당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신 큰 그릇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도 인용하고 당신과 다른 생각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그때 그 눈망울 초롱초롱하던 여학생은 지금 어떤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회고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지금까지 성경을 나름 독특하게 해석하는 몇 분 종교학자들의 글을 일별하였습니다. 물론 어떤 글을 빌미로 해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입니다만은 그래도 기독교 성경을 해설했다면 그 글은 보통사람이면 큰 무리 없이 이해가 갈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어려운 글들이 나올까요. 성경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그냥 무심하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해설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가지고, 아상(我相)이라는 렌즈를 끼고 바라보니 이런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성경말씀이 신비하고 알기 어렵고 오묘하다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천하 무지렁이들인 예수님 제자들도 알아들은 예수 말씀이 요즘같이 교육수준이 높은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쉽게 이해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은 제 생각입니다.

 제 해설을 목사로 살고 있는 후배에게 들려주고 이해가 되느냐 물으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고,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오묘하고 심오한데 그렇게 단순하게 해설을 하냐는 질책이 돌아왔습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알기 쉽게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수월하게 설명할수록 사람들은 말하는 이를 불신하는 것 같습니다. 내 교육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렇습니다. 강의 시간에 나도 잘 몰라서 알듯 모를 듯 아사미사하게 설명하면 교수님 유식하시다 하고 쳐다보고, 마침 잘 아는 내용이라 쉽게 알아먹게 설명해주면 별거 아니구나 하고 실망하는 눈초리를 보냅니다. 쉽게 가르쳐 주면 배운 것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속성인 모양입니다. 그런 인간의 허점을 노리는 사람들이 소위 사이비 종교인이겠습니다.

 성경은 마음을 비우고 읽으면 아주 쉬운 글이고, 그래야 합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잘 모르겠다고 무조건 뜻도 모르고 그냥 고개만 주억거리기만 하면 그게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니, 화장실에서 보는 신문쪼가리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면 무엇하러 그 두꺼운 책이 있어야 합니까? 그냥 신약 27서 중 짧은 것 하나 골라 주문처럼 외우면 되지요.

 원래 잘 모르는 사람이 말을 어렵게 하고 글을 난해하게 쓰는 법입니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의 말이나 글은 쉽습니다. 본인이 잘 아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데 왜 어려운 소리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을 괴롭히려는 악취미가 있지 않는 한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말하고 글을 쓰는 원래 목적과도 위배됩니다.

 모르는 것을 가지고 억지로 아는 척 하려니까 말이 어렵게 나오는 법입니다. 강의할 때도 미리 준비하고 잘 아는 것을 이야기 할 때는 말이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디 가서 강의를 듣거나 글을 볼 때 일단 구라가 어렵고 말이 왔다 갔다 하면 이 사람은 쥐뿔도 모르는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제 판단이 틀린 적이 별로 없어 매우 아쉽습니다.

 답답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을 만나면 꼭 비의를 들먹이고 신비를 찾습니다. 물론 신앙의 신비와 하느님의 깊은 뜻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좁은 차원에 갇혀서 사는 우리 인간이 알면 또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꼭 세상을 저 혼자만 다 아는 양 신비를 찾고 비의를 들먹거리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깨우친 자리만큼만 그냥 쉽게 들어내 보여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르지 못한 자리도 마치 가 본 양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어디만큼 이르렀다면 본인이 간 자리만큼은 스스로 잘 알 터인데, 저 밑에 있는 무지렁이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예수처럼 좀 친절히 일러줄 수 있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예수처럼 자상하게 일러주어도 인간들은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 어렵게만 설명하니 어찌 인간에게 바르게 실천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르는게 문제가 아니라, 적게 알아도 아는 만큼도 행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오늘 하루 반추해 보십시오. 과연 바로 옆에 가까이 있는 이웃이라도 네 몸같이 사랑했는지를. 과연 그랬다면 천국은, 하느님나라는 바로 당신 것이요. 안 그랬다면 네 서있는 자리가 바로 지옥일 것입니다.

 이제 이 글을 쓰게 된 아주 가까운 원인을 제공해준 책 한권만 소개하고 지루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먼저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성경을 읽게 된 연유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한다고 집사람에 등 떠밀려 성당에 출입한지 수 삼년이 지났으나 그동안 밥벌이에 매달리느라 성경 한줄 안보다가, 이제 그만 쉬라는 하느님의 뜻인지, 제도권 세상의 각박함인지에 따라 절반 실업자로 지내게 되어 잠시 시간이 난 관계로 이참에 성경이나 한번 제대로 읽어보자 하고 신약을 손에 들었습니다. 한번 책을 손에 잡으면 나름대로 단기간에 뿌리를 봐야하는 성미로 복음서부터 꾸준히 읽다보니 요한복음에 이르렀는데 이게 첫머리부터 좀 물 흐르듯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름 그동안 성경 읽기에 재미도 붙고 한번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이 책 저 책,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는데 곳곳마다 해설이 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나빠 그런가보다 하고 혼자 공부하다가 나름대로 위에서 풀이한대로 이해하고 그저 나만 알고 넘어가면 되지 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육방송을 보다보니 머리 짧게 깎은 내 나이또래의 중늙은이 하나가 요한복음을 해설한다고, 그것도 영어성경으로 해설한다기에 강의를 몇 번 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김용옥인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영상 강의만으로는 영 부실하고, 말하는 것이 중언부언 왔다리 갔다리 해서 좀 채로 종잡을 수 없기에 그만 그 사람이 썼다는 기독교 성서의 이해인가 하는 책과 요한복음 강해라는 책을 없는 돈 내어 사서 일독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다 읽고 나니 짜증이 났습니다. 딴에는 몇 달 동안 책을 천 만원 어치도 넘게 사서 보고 열심히 새로 공부해서 책을 썼다길래, 이번에는 나름 좀 얻을 것이 있겠거니 했으나 역시였습니다. 그래도 교계 밖에서 자유롭게 성경을 해석했다는 사람이 기존의 고식적인 틀에서 단 한치 반치도 진전하지 못하고 붓방아를 찟고 있는 것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어떻게 요한복음 첫머리를 해설했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책의 상당부문을 손으로 입력해야 하는 관계로 생략하겠습니다. 정 궁금하시면 책을 사 볼 것까지는 없고 그냥 제 글을 읽으신 후 가까운 서점에 들러 김용옥 지음 ‘요한복음 강해’ 67쪽부터 179쪽까지 한번 대충 보십시오.

이 사람 글이 원래 많은 정보를 입력해서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설사하듯 내뱄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냄새나는 이야기지만 사람의 똥도 뱃속에서 잘 삭여서 된똥으로 만들어 내보내면 제주도에서는 돼지도 키우고 그렇게 키운 돼지는 더 비싼 값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처먹고 제대로 삭이지 못하고 내쏫는 설사로는 돼지도 키우지 못합니다. 이 사람 글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어디선가 입력은 많이 했는데 그 정보가 머리 속에서 잘 익어 내 생각이 되고 내 글이 되어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컴퓨터 메모리가 부족해서 그런지 입력해 놓은 자료를 재대로 소화, 정리하지 못하고 그냥 뱉어버립니다. 예전에는 동양고전을 가지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서양고전을 가지고 그러는군요. 이름대로 돌은 돌인 모양입니다. 이 사람 글의 가치는 책 속에 많은 정보를 한 번에 집약하여 보여준다는 데서나 찾을 수 있을까요. 정작 성경을 이해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그리스어나 히브리말에 밝지도 못하고 아직 믿음도 굳건하지 못하고 글도 짧은지라 감히 성경을 나름대로 번역하겠다는 만용을 부리지는 못하겠고, 그저 내가 이해한 것만이라도 잘 정리하여 두어야겠다는 생각에, 혹시 후일 글을 아는 이가 있어 내 글을 보고 혹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하여 인터넷에 내 아호를 따라 작은집(탈공산방. 脫空山房. 네이버 카페 이름)을 지어 그 동안 생각해 두었던 글을 하나하나 정리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초입에 관한 해설에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글을 올려주시고 아마 이 부분에 관한 한은 기존의 제 교파의 견해와 근본적으로 상충한 것이 없다고 사료되어 쓸데없는 번거로움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답답한 마음에 좀 심한 표현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요한복음 첫머리 풀이가 결코 이해가 안 될 정도의 무리한 억지풀이도 아니오, 기존의 제 파들의 교리와 어긋난 것도 없으리라 봅니다. 예수를 거부하거나, 무시하거나, 위상을 깎아 내리거나 하지도 않았으니 불만을 가질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이런 걱정이 기우이길 빕니다.

강호 제현의 많은 질정과 조언을 바라며 교우들은 허심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요한복음을 일독하시기를 권합니다.

 다음과 같은 글로 부족한 제 글을 마감하려 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注)’일 것이다. 이책은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에 주희가 주(注)를 달아 놓은 책이다. 즉, ‘사서집주’는 공자나 맹자의 사상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다. 주희의 이 해석 자체가 조선 시대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하나의 ‘성전’(聖典)이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올바른 학문을 어지럽히는 적’이란 뜻의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몰렸다.

이런 주희의 해석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남인 학자인 백호(白湖) 윤휴였다. 윤휴는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그 밖의 사람은 모른단 말인가. 바로 이런 사대적 태도 때문에 학문이 진작되지 않는다.”고 여겨 경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런 결과 주희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했다.

그러자 조선 주자학의 우두머리 송시열은 “감히 주자의 학설에 반발하다니 실로 사문난적이다.”라며 그를 이단(異端)으로 몰았다. 윤휴는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라며 맞섰다. 하지만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분위기에서 사문난적으로 몰린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윤휴는 탄압을 받았다.

 요한복음 새풀이 마침

 (이로서 4장을 마무리하며 5장 보론(補論)을 두어 내 평소 생각을 정리하려 했으나, 요한복음 새해설과 같이 거론하면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 네이버 카페에 짧은 생각이라는 별도 글로 올립니다. 혹여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고 시간이 기다려 주면 요한복음 전체를 새롭게 해설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댓글 1

  • 2007년 8월 24일 오후 12:09

    수고하셨습니다. 비오 형제님의 성경에 대한 불타는 열정에 깊이 감사드리고 저도 반성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