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을 읽고-2

2007. 8. 24. 오전 2:41:32

글자

4. 새롭게 풀이하게 된 연유

 우선 곧장 결론부터 한 마디 하겠습니다. 기존의 해설이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기 시작한데 있으니 바로 1장 1절의 ‘엔 아르케(’한처음에‘, ’태초에‘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시간적으로만 해석하고 ‘로고스’라는 단어를 ‘말’이 아닌 ‘말씀’으로 번역하고 이를 바로 예수로 연결하여 해설하는데서 오는 오류입니다. 무조건 좋은 말, 높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예수, 하느님에게 끌어다 붙인다고 성경이 저절로 이해되고 신앙이 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예수는 순서대로 나와도 예수입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다소 길게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왜 요한복음인가. 하는 데서부터 말을 풀어가지요. 잘 아시다시피 현재의 신약성경은 마태, 마르코(마가), 루카(누가), 요한의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네 복음서와 사도들의 행적과 다양한 편지들, 그리고 예언서인 계시록 등해서 서기 4세기경 한 주교에 의해 27서가 확정, 공포되고 이후 그것을 교계에서 공식 수용해서 지금까지 죽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예수의 행적과 말은 대개 4복음서에서 그 말을 한 상황과 서로 연결되어 전해지는데 복음서마다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다수가 마르코복음이 맨 먼저 만들어지고 다음에 마태, 루카 그리고 맨 나중에 요한복음이 지어진 것이라는데 합의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 이 4복음서들이 보고 참고한 예수의 어록- ‘자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자료는 아마도 도마복음서와 같은, 말한 주변 상황이 배제된 어록집 스타일로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맨 처음 지어진 마르코는 글이 제일 간소하고 예수 행적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만을 전하는데 예수 사건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라는 사실 전달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다음 마태복음은 예수의 의미를 유대족속들의 구세주라고 하는데 초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습니다.(민족사건) 다음 루카는 먼저 마태가 예수를 단지 유대족속들의 구세주라 정의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라 하는데 초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습니다.(인류사건) 이들 세복음서는 비교적 같은 관점에서 예수사건을 서술했다 하여 후대에 공관복음서라 부릅니다. 반면 4복음서중 마지막으로 지어진 요한복음은 시각을 좀 달리하여 예수 사건을 탈역사적인, 시공을 초월하여 벌어진 사건으로 기록, 이후 기독사상의 기틀이 됩니다.(하느님 사건)

 복음서 양식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공관복음과 달리 1장 1절부터 18절까지 프롤로그 부문에 저자의 의도를 확연히 들어내는 서시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그 의미를 두고 여러 학자들 사이에 성경의 백미로 꼽히는 부분이기도 하고 해석이 분분하여, 그래서 저까지도 지금 이 글을 써서 그 의미를 밝히게 되는 앞에서 우리가 해설한 바로 그 구절입니다. 사실 이 부문만 바로 알고 들어가면 성경 전체의 구조와 의미 그리고 이후 기독교 사상의 전개까지도 쉽게 알 수 있는 성경의 키 센텐스이기도 합니다.

 어떻든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논란을 감안하더라도 복음서 양식의 최정점으로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현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관심을 가지고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이제 좀 지루하지만 기존의 교계의 요한복음 첫머리 해설과 여타 신학자, 종교학자들의 해설을 한번보시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어디서 가지고 왔다는 출처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싶지 않으나, 밑에 다른 글씨체로 되어있는 부분은 일체가 그래도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종교 단체와 신학자, 종교학자들의 홈페이지에서 그대로 가져와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글의 분량이 늘어나 최소한으로 줄였습니다. 더 자세하게 보시려면 인터넷으로 요한복음 해설 하고 검색하시면 엄청나게 많은 문서를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는 친절하게 성경의 여러 우리말 번역본과 영어 원문을 비교 대조하고 있어, 한 가지 영어 본문을 놓고도 우리말 성경마다 각각 이렇게 다르게 번역을 하는구나, 하느님의 말씀이 한가지로만 옮겨지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어 먼저 살펴봅니다. 가톨릭성경은 맨 앞에서 인용한고로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1. 요한복음 1:1

 본문 [개역성경]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공동번역(개정)]요 1: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표준새번역(개정)]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현대인의 성경]요 1:1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KJV]요 1: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NKJV]요 1: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NIV]요 1: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RSV]요 1: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해설

태초(엔 아르케, in the beginning)

 “태초”는 “아르케”라는 헬라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태초”는 창세기1:1의 “태초”와 같은 개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요한복음의 “태초”는 두가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1) 시작과 공간의 시작

(2)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의 개념

 칠십인역은 창세기의 “태초”(히: 베레쉬트)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 “아르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물론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의 태초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과 공감의 시작적인 개념으로 보는 반면에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의 개념으로 봅니다.

(중략) “말씀이 태초에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처음, 시작, 근본이 된다는 그러한 뜻이 됩니다. 요 17:5을 보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라는 구절에서 “계시느니라”라는 헬라어 동사는 “미완료과거형”입니다. 즉 예수님은 “과거에 계셨다” 혹은 “과거에 태어나셨다”라는 단순한 과거시제의 뜻이 아니라, 완료가 되지 않고 계속되어지는 “태초부터 존재하여 오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선재(先在), 즉 영원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계시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로고스: the word)

 사도요한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말씀)라고 기록하였는지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이론이 다양합니다. 그당시 “로고스”(말씀)란 말은 두가지의 이론적 배경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헬라적인 배경입니다. 헬라의 스토어철학에서 “로고스”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이성, 법칙, 생각”등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신의 이성, 혹은 만물의 이성적 원리를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중략)

두 번째는 히브리적인 배경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적인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의인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시33:6, 잠언8장등) (중략)

또한 사도요한이 예수를 로고스라고 표현한 이유가 오직 헬라적인 철학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에서의 로고스는 첫째, 인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며, 두 번째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셋째, 성육화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요한이 예수를 말씀(로고스)라고 표현한 가장 첫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하나님의 뜻과 감추인 지혜를 알게 하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즉 태초부터 선재한 신성을 말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께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사도요한은 예수가 태초부터 선재하였던 말씀이였으며,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임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는 “함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인격에 대해서 구별하고 있었습니다. (중략)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마주 보고 계셨다는 인격적인 구별을 표현하고 있으면서,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대담한 신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단어 앞에 "the"(호)라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것을 the god 이 아니므로 a god(하나의 신) 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우리는 성경본문과 같이 “말씀이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역으로 “하나님이 말씀이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음에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동일한 속성과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이 아니므로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집니다.

 1장 1절만 가지고도 참 많은 풀이를 해놓고 있는데 아주 간단히 줄여보았습니다. 해설이라기보다는 단어 풀이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겠습니다마는 그런데 그 단어 풀이도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말씀을 예수님이라고 하다가 또 하나님과 같다고 그러다가 다시 다르다는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풀이하면 예수님이 하느님과 따로 나란히 있다가 다시 또 갑자기 하느님이 되기도 하는군요.

 하나 더 볼까요. 보시다가 골치 아프시면 안 보셔도 됩니다. 사실 별로 가치 있는 글은 아니니까요. 단지 요한복음 1장을 가지고 이렇게도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구나 하는 샘플로 보여드리는 것이니까요.

 해설=====1:1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 원어상 '말씀(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략)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엔; 메타; 파라;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데오스) 앞에 관사 '호'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말씀이 계시니라'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중략)

 =====1:3

만물이 - 원문상 '만물'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존재하는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 )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중략)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 )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 )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중략)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 )는 '영원한'(*,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중략)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습니까. 풀이가 1절부터 4절까지 밖에 안 되는데도 간단히 줄여서 그렇지 매우 긴 글입니다. 이해가 잘 되십니까? 사실은 더 긴 풀이도 많습니다. 여기서 참 많은 신학박사도 만들어지고 목회자도 많이 생기고 합니다

 다음에 가톨릭에서 해설한 것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 편찬한 신약성서 새번역 4권 요한복음서에 실린 내용을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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