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번에는 한 신학자의 논문을 볼까요. 역시 잠시 보시다가 골치 아프시면 안 보셔도 됩니다. 그저 이런 풀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인용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이번에는 배경 설명도 있고 그런대로 유익한 정보도 들어 있습니다.
1. 내용 구성
요한복음은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리스도 찬양시인 프롤로그(서시)로 시작 한다(1:1-18; cf. 빌 2:6-11; 골 1:15-20; 딤전 3:16). 요한복음 프롤로그는 신약성서의 주요 구절 중에서도 아마도 가장 많이 연구되어 온 부분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발표되는 신약 관계 논문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New Testament Abstracts라는 저널을 보면 지금도 요한복음 프롤로그에 대한 논문과 전문서적이 끊임없이 산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학자들에 의해서도 요한복음 본문 중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곳도 바로 프롤로그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프롤로그가 계속해서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본문이 “성서에서 가장 심오한 구절 중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R. Alan Culpepper, The Gospel and the Letters of John, 110).
요한복음 서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1-8절)을 ‘세상을 향한 로고스’라고 한다면 마지막 부분(14-18절)은 ‘교회를 향한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중간부분은 교회론적 혹은 구원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9-13절). 전통적으로는 로고스의 성육신과 성육신에 대한 신자의 체험을 말한 14절을 포함한 마지막 부분에 요한복음 프롤로그 핵심 사상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역사비평을 통해서 재구성한 원시(原詩, Vorlage)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현재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을 말하는 12-13절을 포함하는 중간 부분에 그 핵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부분은 창조주로서의 로고스의 사역이 펼쳐지고 뒤 부분에서는 로고스의 사역이 그를 믿는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데 중간 부분은 그 피봇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요 1:12; 3:16; 20:30).
여기서 한 가지 논의해 볼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 프롤로그와 본문과의 관계이다. 먼저, 대부분의 학자들은 프롤로그가 복음서의 서론(introduction)이 된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에서 프롤로그가 본문을 인도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프롤로그가 복음서의 요약인가(summary)? 아니면 이것이 복음서 이해의 열쇠인가(key)? 아니면 헬라 독자들은 위한 해설인가(note)? 아니면 복음서가 서문의 핵심 주제에 대한 주해인가(commentary)? 혹은 서문이 예수 이해를 위한 렌즈인가(lens)? 요한복음 프롤로그가 복음서의 정확한 요약도 아니며 단지 헬라 독자들을 위한 해설도 아니다. 그러나 프롤로그의 논지는 복음서의 핵심 논지와 상응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레트의 말을 빌리면 요한복음 프롤로그는 “복음서의 주 논지에 대한 철학적 원리(rationale)이다.”(C. K. Barrett, The Prologue of St John's Gospel, 6). 요한복음 본문은 프롤로그의 핵심 내용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프롤로그의 핵심 내용(1:12-13)은 요한복음의 기록된 목적(20:30-31)과 상응한다.
2. 세상의 창조자이신 로고스(1-8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책 제목으로 시작하고(마 1:1; 막 1:1) 누가복음이 책 서문으로 시작한다면(눅 1:1-4), 요한복음은 서시로 시작한다(요 1:1-18). 요한복음 서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었다”(1절)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 다음 두 절은 이 구절에 대한 요약 내지는 주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인격체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던 분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강조되고(2절), 이 분이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설명한다(3절). 만물이 이 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창조된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이 분을 통하지 않고는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한 신성을 가진 분으로, 하나님과는 구분되지만 동질적 신성을 가진 한 인격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 성서에서 예수를 로고스로 소개한 경우가 이곳이 유일하기 때문에 그 동안 요한이 어떻게 기독론적 명칭으로 로고스를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종교사적 배경을 캐는 작업이 방대하게 이루어져 왔다. 우선 로고스에 대해서 연구해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 서시에 인격적 개념으로 사용된 로고스는 필로가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적 개념을 결합시켜 이해한 신적 중재자 로고스 개념과 유사하다. 둘째, 인격화된 개념과 창조의 관여자라는 면에서 요한복음 서시의 로고스는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에 나타난 인격으로서의 지혜의 기능과 역할과 매우 비슷하다(cf. 잠 8:22-31). 셋째, 그 내용과 동일한 단어의 쓰임새를 볼 때 이것은 창세기 1장 l절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구약의 고대 아람어 역본인 탈굼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을 하나님의 말씀(멤므라)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 동안 학자들은 위의 배경 중에서 어느 하나가 요한복음이 사용한 로고스와 가장 근접한가를 논의해왔다. 하지만 여기서 요한복음 서시의 로고스 개념의 기원으로 위의 배경 중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헬라사상과 유대사상이 상호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던 시기로 양자를 완벽하게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로고스에 대한 종교사적 배경은 어느 것이 주 배경이든지 간에 복합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한은 아마도 헬라적인 배경의 독자들과 유대적 배경의 독자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보다 폭넓은 독자층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을 기독론적 명칭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창조자이시고, 신성을 가진 말씀이라는 인격체를 소개한 후 요한은 그 인격체의 본질과 성격을 생명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구체화 시킨다. “그분 속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인류에게는 빛이었다. 그 빛은 어둠 속을 비추었지만 어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4-5절). 생명(혹은 영생)은 요한복음의 주제로서 서시 이후의 본문에서 예수의 가르침 속에 자주 나타나는 용어이다. 이후의 본문에서 생명이 주로 예수를 믿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는 그 무엇이라면 여기에서의 생명은 먼저 예수 안에 거하는 그 무엇이다. 이 생명은 예수가 소유한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소망이요 빛이다. 그런데 이 생명이 빛으로서 어둠 속을 비추었지만 어둠은 그것을 깨닫지(혹은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에 대한 결과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카텔라벤(kate,laben)이라는 동사는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깨달았다”라는 말로 취하면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을 “이겼다”라는 의미로 취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어둠의 세력인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요한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주 의미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두 가지 의미를 다 포괄하는 것을 의도한 결과였을 것이다.
세상을 위한 창조자이신 말씀에 대해서 소개 하면서 요한은 세례 요한에 관한 내용을 끌어 들인다(6-8절). 그 내용은 요한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와는 달리 이 사람은 “빛”이 아니고 빛에 대해서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이 없으면 5절에서 9절이 더 매끄럽게 연결되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15절과 함께 이 부분을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본다. 그럴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내용 자체가 원문이라는 견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선, 어떤 글이든 자연스럽다는 것이 원문임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6-8절은 현대 논문에서는 각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당시에 그러한 글쓰기 방식이 없던 시절에 이 부분은 각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최근의 문학비평적 연구들에 따르면 현재의 서시는 교차대구적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문학적 일치를 이룬다고 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을 굳이 원래의 시에 추가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더구나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가 하고 생각하던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cf. 요 1:19-28) 예수를 소개하면서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너무 길게 인용했나요. 미안합니다. 책이라면 쓸데없이 페이지만 늘렸다고해서 용납될 수 없겠지만 인터넷 상이라서 그나마 마음 놓고 인용을 할 수 있군요. 그나저나 역시 그 뜻이 잘 이해가 되세요?
그러면 이들 기성 교단 해설의 맹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이들의 해설은 요한복음 본문을 글의 논리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무조건 자의적으로 단어를 해석하고, 끌어다 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설이 길어지고 내용이 명료하지가 못합니다.
먼저 ‘태초에, 한처음에’라고 번역하고 있는 아르케라는 말을 볼까요. 아르케 [arche], 철학용어로는 '원리(原理)'라고 번역합니다. 일련의 사건의 시초라는 것이 기본관념이며 여기서부터 다른 것이 의존하는 '원리' '원인'이라는 뜻이 생겼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일의 과정 상 맨 먼저, 처음에 하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선 신과 인간의 관계 맺음에 있어 말이란 것이 있었다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로 말미암아 인간과 신의 교류가 있을 수 있었다. 하는 설명입니다. 꼭 시간적인 ‘태초’라는 개념으로만 새겨야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어 잘 모르지만 아르케라는 말이 꼭 시간의 맨 처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태초 이전은 어떻고, 이는 시간 개념을 넘어선 절대 시간을 의미하고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 ‘로고스’라는 말을 볼까요. 이 말은 히브리어에는 없는 말인데요, 이것 역시 그리스어의 ‘말하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냥 ‘말’이라고 새기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무조건 서로 경쟁적으로 예수님이라고 새기고 있으니 처음부터 바른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벌써부터 예수님이 등장할 필요 없습니다. 글의 문맥상 논리적으로 이 말은 우선 ‘말’이라는 명사 자체로 이해하시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실 성경해설을 하면서 이렇게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서로 경쟁적으로 무리해서 걸핏하면 예수님을 먼저 끌어다 붙이게 된 숨은 사연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유대교에서의 야훼의 의미와 이후 기독교에서의 하느님의 의미 변천, 그리고 종교 개혁이후 하느님에서 예수에게로 치우쳐가는 신구교간의 경쟁에서 오는 무리한 성경의 해석 등 한참 길게 이야기 할, 그야말로 신학 박사학위 논문 과제를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다루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조만간 따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내 생각에는 ‘태초에 예수님이 있었는데 바로 하느님이었다.’라고 요한복음 저자가 말하고자 했다면 지금의 요한복음 1장 1절처럼 말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저자가 다음의 자연스러운 예수님의 등장을 위해 신과 인간간의 관계맺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전체 글의 도입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을 위해 먼저 카페트를 깔고 있는 것이지요. 다짜고짜 ‘옛날에 한옛날에 예수님이 계셨는데 바로 하느님이었다네.’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름지기 글이라는 것은 해설을 해 놓고 그 해설에서 다시 원문으로 역으로 줄여보아 바로 원문과 같아지면 바로 해설한 것입니다. 제 파들의 해설이 무리하다는 것은 바로 해설해 놓은 것을 보고 저자의 입장에서 다시 써보면 절대로 요한복음 원문과 같아지지 않는지라, 그러면 요한복음을 제대로 해설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다음에는 좀 색다르게 독자적인 종교 사상을 전개하는 종교학자이신 박영호 선생님이 쓰신 다석 류영모선생님의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잃어버린 예수’란 책속의 해설을 한번 볼까요.
내용이 많아 자세히 보시려면 아래 인터넷 주소로 가시면 구체적인 자료가 있습니다.
http://www.dasuk.or.kr/bbs/view.php?id=bulleti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63
여기서는 간단히 줄이겠습니다.
2) 하느님은 말씀(성령)으로 계신다
“요한복음 1장 1~18절을 우리는 흔히 요한복음의 ‘서문’이라고 부른다. 이 단락에서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말씀은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이었다(1~3절).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더군다나 이 말씀은 하느님이 세상과 교통하는 방식이며 하느님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요한복음서 서문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보도된다(14절).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람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였다(17절).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 말씀의 성육신(成肉身)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이미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스스로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은 그를 통해 세상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버트어만, 『성경 왜곡의 역사』)
우리에게 예수의 공생애 동안의 언행(言行)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서의 본면목이라 하겠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첫머리는 예수의 언행과는 관계없이 복음서 저자의 신관, 우주관, 그리고 그리스도관을 펼치고 있다. 거기에 요한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일체 쓰이지 않는 로고스(λόϒος, logos, 말씀)라는 낱말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요한복음서 본문을 쓴 저자라면 로고스라는 낱말 대신에 성령(πνευμα, 얼)을 썼을 것이라 믿어진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의 1절에서 18절까지를 버트어만의 주장처럼 요한복음의 ‘서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 밖으로 나가서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라고 하는데 그 디아스포라 가운데 필론이라는 이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로 이름이 나있다. 필론처럼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크리스천이 서문을 써서 요한복음 머리에 서문으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어 요한복음을 돋보이게 한 점도 있지만 오도한 점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그리스도의 출발을 하느님의 말씀에 둔 것은 동정녀 탄생설보다는 차원이 높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독생자의 성육신의 설명이 불충분하여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실수라 아니할 수 없다.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 공동번역)
사람은 시간 공간에 갇혀 있어 언제나 시간의 벽에 부딪힌다. 그래서 맨 처음(태초)이라 맨 마지막(종말)을 말하지만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셔 맨 처음이 맨 마지막 넘어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영원한 현재로 계신다. 하느님에게 태초라는 말을 붙이면 하느님께서도 시작과 종말이 있는 상대적 존재로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서문 저자도 천지가 창조되기 전이라는 말을 넣은 것 같다.
‘말씀이 계셨다’는 것에서 ‘말씀’은 ‘얼(성령)’로 바꾸어야 한다. 성령이 사람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일치(一致)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말씀으로만 나타내면 사랑이 빠지게 된다. 그러면 사랑이 징발되고 이치만 따지는 종교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과 사랑을 포괄하는 성령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음에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새번역에는 곧 하느님이시니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비논리적인 알쏭달쏭한 말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란 낱말을 써서 이렇게 된 것이다. 성령으로 바꾸면 이런 어색한 문장이 안 된다. 하느님은 성령으로 계시니 성령이 하느님이시다라고 했어야 논리가 서게 된다.
프로스(προς, with)를 ‘으로’라고 옮겨야지 ‘함께’라고 옮기면 안 된다. 함께는 따로 따로 둘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인 것이다. 하느님 따로 있고 성령(말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은 얼(성령)로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과 성령이 둘이 아니다. 하느님이 유비쿼터스(ubiquitous)로 아니 계시는 곳이 없게 두루 계시는 것은 얼(성령)과 빔(허공)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절에 “그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분명히 잘못된 표현이다. 하느님은 성령으로 계시는 것이지 성령(말씀)과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다.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빅뱅(Big Bang)이 일어나기 전에 다시 말하면 물질세계가 벌어지기 전에는 빔(허공)이요 얼(성령)이신 하느님만 계셨다. 빔(허공)안에 물질세계가 벌어졌다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나 빔이요 얼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얼(성령)의 일부가 절대성을 버리고 개체의 물질이 된 것이다. 창조한 것이 아니라 변태한 것이다. 변태는 오래 못가기 때문에 다시 얼(성령)과 빔(허공)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을 유(有)에 붙잡힌 사람들은 멸망(사망)하는 것으로 끔찍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은 귀일(歸一)의 본화(本化)인 것이다. 그런데 물질세계가 하느님의 영역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무변허공의 하느님의 품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세계의 개체 기준으로 생각하니 개체들이 생기는 것이 좋고 개체들이 없어지는 것을 흉(凶)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얼과 빔으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 거룩한 것이다. 얼과 빔의 거룩을 잃어버리고 상대화하여 물질의 낱동(개체)이 되는 것은 변질이요 타락인 것이다. 그래서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몸(물질)에 갇혔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낱동(개체)으로 나온 것은 참 못난 것이다. 물질에 갇혀 있는 것은 못난 것이다. 이 몸의 틀을 쓴 것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못난 것이다. 내 말의 마지막에는 빔(허공)과 얼(성령)을 말하는 것이다. 빔(성령)과 얼(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 어머니가 낳아준 나는 참나가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없이 계시는 얼나가 참나다.”(류영모, 『다석어록』)
그런데 이 세상 사람은 어리석어 몸뚱이 개체 생명을 낳아 놓고는 축하를 하고 개체생명이 죽어지면 애통해마지 않는다. 사실은 그 반대라야 한다. 우리는 본모습인 빔과 얼의 없이 계시는 데로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바로 살 줄 알고 말씀을 아는 사람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리고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잘 모르고 산다. 죽는 것이야말로 축하할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이렇게 사는 것을 부지지생(不知之生)이라고 한다. 살려 준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없고 죽이겠다고 해서 흔들릴 것도 없다. 나는 모름지기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흔 살에 가깝다. 일흔이라는 말뜻은 인생을 잊는(忘)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래서 내게는 이 세상에서 좀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은 없다. 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더 살고 싶다고 소리소리 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하고 말을 알려고 하고 말이 심판을 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나로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3)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한 1:10)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말로 나타내기가 어렵고 글로 쓰기가 어려운 사람의 오관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형이상의 실체인 얼과 빔의 하느님 얘기를 하자니 비유를 들었다가 말을 뒤집었다가 하다가 보면 논리의 비약과 논리의 모순이 있어 언뜻 보기에 횡설수설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일장에 서문이 바로 그러한 문장이다. 논술시험에 이런 작문이 나왔다면 합격점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어리둥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나라 성경을 읽어도 보고 여러 번역을 비교해 보아도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습니까. 이해가 잘되세요. 사실 이분은 요한복음 원문해설을 하시는 게 아니라 요한복음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독자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시는 분들 중에 이런 분들 많습니다. 그리고 이글에 나오는 다석 선생님처럼 나름대로 한 소식 하셨다는 분들 중에 이러시는 분들 꽤있습니다.
미욱한 제가 다석선생님 같은 선각자의 생각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단지 저는 여기서 요한복음을 이렇게 해설하는 분도 계시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과연 여러분은 이글을 통해서 요한복음이 바로 이해가 되시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