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주간 묵상

2006. 4. 9. 오후 4: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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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르실료 - 성주간 묵상 
 
    >>>십자가의 선물(주님수난 성지주일)<<< 말씀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마태 27,32) 묵상 고통의 신비는 인간 생활과 영신생활의 가장 큰 신비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나 자매들이 고통 받을 때마다 계속해서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을, 하여간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그것은 신비로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고통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 슬픔일 이기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고통 중에도, 십자가의 무게 아래에서도…….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 우리로 하여금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점점 더 키레네 사람 시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사람들 안에서 당신이 계속 고통 받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실천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가? 어떻게?
    >>>여기에 하느님의 종이 계십니다(성주간 월요일)<<< 말씀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야 42,1) 묵상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주님의 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세주이시며, 그분은 인류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실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다리던 투쟁의 구세주와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가난한 목수가 어떻게 구세주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원수를,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구세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처형을 받은 이단자가 어떻게 구세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논리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생각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우리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분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고통 받는 종이 되신 예수님, 제게 힘을 주시어 죄의 권력 앞에서
    결코 굽히지 않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진정 사랑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당신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시오. 아멘. 실천 하느님에 대한 나의 신앙을 누구에겐가 설명해야 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우리에게 보답해주시는 하느님(성 주간 화요일)<<< 말씀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야 49,4) 묵상 이 세상에서의 생활은 매우 고통스럽고 어렵고 힘에 겨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품위 있는 사람을 영위하기 위해, 최소한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단마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한 부유한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삶은 항상 쉽지만은 않습니다.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가지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얼마나 자주 우리는 마음이 비어있음을, 불만스러움을, 서글픔을 느끼게 되는지요? 물론 삶은 아무에게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하는지를 물어보곤 해야 하겠습니다. 즉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삶인가 아니면 하느님 나라의 삶인가를 자문해보는 것입니다. 또한 단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는 것이 중요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지나가는 통로일 뿐인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여기서부터……. 이 순간부터 우리 미래의 삶을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우리의 유일한 보물이신 하느님, 제 삶이 당신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도구가 되게 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제 안에서 당신의 위로, 당신의 기쁨, 당신의 용서, 당신의 삶을 발견하게 되도록…. 아멘. 실천 나는 무엇을 삶의 첫 자리에 두고 있는가?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 목표들은 무엇인가?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성 주간 수요일)<<< 말씀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선생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26,25) 묵상 물론 우리는 “왜 가리옷 사람 유다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을까?”하고 수차례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유다에 대해 그다지 큰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가리옷 사람 유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많은 경우 예수님을 배반했으며, 또 계속 배반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처럼, 우리도 죄를 지을 때마다, 특히 우리의 형제들에 대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그분과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처럼 그분을 배신하게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돈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기라든지, 허영이라든지, 이기주의라든지, 교만이라든지, 욕심이라든지, 복수하기 위해서라든지…….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지, 예수님 또는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므로 하느님과 이웃을 배신하기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께 충성해야 할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합니다. 기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예수님, 당신의 우정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아무리 당신을 배반해도 당신의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사랑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킵니다. 아멘. 실천 나는 하느님께나 다른 사람들에게 늘 변함없는 우정을 지니고 있는가? 왜 나는 그렇지 못한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섬기시다(주님만찬 성 목요일)<<< 말씀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5)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 마지막 만찬에 우리도 참석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그들의 얼굴 표정이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분의 사명은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마지막 만찬은 곧 첫 번째 성체성사입니다. 그렇다면 성체는 단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체는 단지 성사에 불과할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눈에 보이는 현존입니다. 성체성사는 또한 하나의 도전입니다. 어떤 도전일까요? 사랑의 도전입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이며, 섬기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는 말했습니다. "신앙을 행동으로 옮길 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행동으로 옮길 때 그것은 섬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내어놓아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비로소 성체성사를 충만히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체는 의미 없는 예절로 남을 것입니다 . >>>예수님은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주님수난 성 금요일)<<< 말씀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묵상 오늘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일생 동안 좋은 일을 하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시고 증거하셨으며, 육신적으로나 영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밑에는 단지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 그리고 몇몇 여인들만이 와 있었을까요? 그분의 말씀을 듣던 그 많은 군중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다른 제자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요? 이처럼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처럼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우리보다 더 비천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지 한 차례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분은 브라질의 거리에 버려진 어린이들 안에서, 억지로 부르카(온 몸을 가리는 옷)를 입어야 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인들 안에서, 콜롬비아에서 납치되고 학살당하는 농민들 안에서, 남아프리카에서 에이즈로 고아가 된 어린이들 안에서, 이탈리아에서 윤락가로 끌려가는 아프리카 여인들 안에서, 코소보의 전쟁에서 자손을 잃은 노인들 안에서, 한국에서 부당하게 고발당하고 착취당하는 외국 이민들 안에서……. 계속해서 죽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얼마나 자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홀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도록 내버려두곤 하는지요?
    >>>침묵하시는 예수님(부활성야 성 토요일)<<< 말씀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마태 28,1) 묵상 물론, 이 여인들은 매우 슬픈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아직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친구는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보통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층 더 큰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슬펐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그분과 함께 아름답고 강한 우정을 나누면서 많은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꿈꾸어 왔는데……. 이제 매우 고통스러운 침묵만이 남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께서는 어떠하셨을까요? 마리아께는 더 이상 아드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얼마나 큰 슬픔을 당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통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고통 역시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가득한 고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계획을 끝까지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분은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단지 예수님의 어머니만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뜻에 “네‘하고 응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죄가 우리를 죽음의 침묵 속으로 떨어뜨릴 때 어떻게 하면 회개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늘 아버지의 집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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