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2월 15일 일요일
[연중 제6주일] 율법의 완성 (마태5,17-37)
제1독서<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집회15,15-20)
15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16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17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18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19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20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
<화답송>시편119,1-2.4-5.17-18.33-34(◎1) ◎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
○ 당신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
○ 당신 종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제가 살아 당신 말씀 지키오리다. 제 눈을 열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가르침 바라보리이다. ◎
○ 주님, 당신 법령의 길을 가르치소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
제2독서<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는 지혜를 미리 정하셨습니다.>(1코린2,6-10)
형제 여러분,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8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복음<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5,17-3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字) 한 획(劃)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연중 제6주일 제2독서(1코린2,6~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0ㄴ)
원문에는 원인인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가 포함되어 있어 본문은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비밀스런 지혜를 열어 보이실 수 있는 이유 및 근거를 제시하고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하느님의 지혜를 보이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 곧 하느님의 깊은 비밀(경륜)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통찰하십니다' 로 번역된 '에라우나'(erauna)는 '탐색하다', '주의깊게 조사하다', '탐구하다' 를 뜻하는 '에류나오'(ereunao)의 현재형이다.
이 동사는 고대 검사관의 보고서에 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파생된 '에라우네타이'(eraunetai)가 바로 세관 업무를 보는 '검사관들' 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로마서 8장 27절에서는 바로 이 동사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까지 살펴 보신다' 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것을 완전하게 아시는 분이심이 분명하다.
여기서 바오로는 이 동사를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시제인 현재형으로 씀으로써 성령께서 통찰하시는 그 일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바오로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비밀' 까지도 통찰하신다.
여기서 '깊은 비밀' 이라고 번역된 '바테'(bathe)는 '깊이', '깊음'(로마8,39) 혹은 '충만'(2코린8,2)을 뜻하는 '바토스'(bathos)의 목적격으로서 인간이 감히 예측할 수 없는 깊고 풍성하신 하느님의 비밀을 의미한다(묵시2,24 ; 로마11,33 비교).
바오로는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심오한 뜻과 속성,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의 계획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시므로,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본문은 하느님의 오묘하신 뜻과 섭리는 제3위 하느님으로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되시는 성령만이 알 수 있고, 또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연중 제6주일]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나라를 잃고 성전도 없던 수많은 세월 동안 이스라엘은 회당에 모여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회당 전례의 중심은 언제나 토라(율법)였습니다.
바룩 예언서에는 이스라엘이 복된 백성이며 그것은 자신들이 토라, 곧 “하느님의 명령과 길이 남을 율법을 기록한 책”(4,1)을 통하여 “지혜의 길”(3,27)을 가르쳐 주신 하느님을 알고 섬기는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특별한 자부심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말씀을 참으로 존경하며, 그 말씀에 온전히 매료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어릴 적부터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예배를 드리며 율법을 들어 익히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어조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당시의 율법 학자들이나 라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율법의 근본정신을 잊고 인간의 구원과 사람의 선악을 구하지 않는 이른바 ‘문자에 얽매인 해석’에 골몰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통하여 그 법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의 뜻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이 온전하게 유효함을 인정하시면도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성에 이르기를 바라셨습니다(마태 5,48 참조).
예를 들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만드신 사람을 다른 사람이 해칠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살인하지 마라.’는 율법의 중요한 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자기 형제에게 해가 되는 어떤 말이나 행동도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만든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봉사하고 그를 섬기며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고 참 생명의 길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말씀이 지켜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당대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어느 라삐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고 죽을 때까지 결코 여인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의 규정과 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것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걸어가신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지침이 되게 하려면
우리의 속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에 닿을 수 있기를,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6주일] 독서와 복음묵상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우리가 청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지혜 (1코린 2,6-10)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 영광(히브리어 독사)은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이 가시적으로 드러나 나타난 것을 독사-영광이라 합니다.
그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 십자가입니다.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 그 사랑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인 영광입니다.(콜로2,9 에페1,4-7참조)
8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오늘 복음 산상수훈을~ 인간의 지혜로 들으면 헛된 양식이 될 것이고, 성령- 그 하늘의 지혜로 깨닫게 된다면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 (마태 5,17-37)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다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 이루어야 죽어서 부활할 수 있습니다.(야고2,9-10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대속의 십자가- 그 십자 나무가 율법의 완성, 하느님 계명의 완성입니다.(탈출15,25참조)
19ㄱ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예수님으로, 율법이 그냥 폐지되는 것으로 가르치면 ~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작은 자가 없습니다. 주님과 짝하며 그분의 지체로 가기 때문에 다 큰사람입니다. (루가7,28참조)
작은 자라 하심은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19ㄴ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스스로 지키는 것, 율법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음을 믿는 것, 그래서 율법의 행위를 끊어버리는 (단식)것, 십자가를 진리로 먹는 것, 그것이 지키는, 실행입니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율법의 의로움입니다.
(루가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자신이 죄인임을, 자신의 그 죄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주님의 신앙관입니다. 죄인임을 깨달아야 십자가의 대속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덕과 윤리의 십계명으로 스스로 의인이 되려 한다면~ 참 하늘의 의로움 그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 사람의 관점 그 지혜로 받은 계명입니다.(탈출20,13) 살인해서는 안된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 하늘의 지혜로 들어라. 입니다. 육의 이웃을 형제로 듣는 것, 인간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요한20,17)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형제, 그 십자가의 예수 그 형제께 바보 멍청이라고..... 그분의 십자가의 길이 바보, 멍청한 짓이라면 당연히 불붙는 지옥에 가지요. 그는 대속이 주는 구원의 의로움, 그 거저 받는 그 은총을 못 받아 죄인의 모습으로 그대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하느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 죄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듯 하느님의 율법의 십계명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졌기에 하나의 계명, 곧 사라의 계명으로 요약된 것입니다.(갈라5,14참조)
그러니 십계명을 열 개의 계명으로, 도덕과 윤리로 가르치면 십자가의 대속, 그 계명에서 분리시키니 우리의 구원의 짝,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과 분리시키는 이혼이 되는 것이고 간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그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만들었으니 하느님의 계명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이후 33절까지의 말씀이 다~ 그 잘못을 말씀하십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 사람의 맹세는 깨어지게 돼 있습니다. 베드로의 배반 같이 말입니다. 맹세는 하느님께서 하시고 그 맹세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신명28,9) 9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면,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희를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실 것이다.
= 하느님의 계명, 대속의 십자나무를 구원의 계명으로 믿으면(지키면) 하느님의 맹세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 그 안에 하느님의 맹세가 수 없이 기록(적혀)되어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맹세, 그 약속을 먹는 것, 신앙생활입니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큰 계명입니다.
(마태22,37-40)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아니요 저는 할수 없어요’라고 솔직히 답합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믿느냐? 하셨을 때 얼른 답합시다. “예”라고요~~ 그 이상의 것- 사람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 악입니다.
(티도1,14) 14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2베드1,21) 21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
♡ 아멘 -*^ㅇ^*-
연중제6주일 복음(마태5,17~37)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2)
한글 새 성경에는 단순히 '형제'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는 인칭대명사와 정관사가 붙어 '토 아델포 아우토'(to adelpho autou; to his brother)에 해당하는 '(바로)그의 형제에게'가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형제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이나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다(루카10,29~37). 그러니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랑으로 감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pas; whosoever)라는 단어는 '전체'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그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의노)는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도 악한 자들에게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진다 (마태3,17; 마르3,5; 사도10,16).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의 '성을 내는 자'에 해당하는 '오르기조메노스' (orgizomenos; who is angry with-without a course)가 일시적인 흥분을 나타내는 '튀모스'(thymos)와 달리, 주로 악한 뜻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킨다.
더욱이 표준 원문에 삽입된 '까닭없이'에 해당하는 '에이케'(eike)는 정당한 사유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리켜준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악한 뜻(악의)을 가지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을 살인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많은 경우의 살인이 바로 성을 내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실제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동인(動因)인 그 마음에까지 살인하는 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바보'에 해당하는 '라카'(Raca)는 히브리어 '레크'(req)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레크'(req)는 또한 '황폐하다', '비다'는 뜻을 지닌 '루크'(ruq)에서 유래하여 '빈말', '허사', '헛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머리가 텅 빈) 모자란 자'나 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잡류', '건달'(판관11,3), '무뢰한'(2역대13,7)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이다. 그리고 '멍청이'로 번역된 '모레'(More; You fool)는 '모로스'(moros)의 호격이다. '모로스'(moros)는 '입을 다물다'는 뜻이 있는 '뮈오'(myo)에서 유래하여 '말하지 않는 자', '우매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집회서 22장 11절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단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단죄이며, 멸망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라카'(Raca)보다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욕설을 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심판권을 남용한 죄를 범한 것이며, 영혼의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새로운 기준이요 동인인 내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러한 자가 받게 될 형벌이 재판 받음, 최고 의회에 넘겨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짐으로 묘사하신다. 이것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삼중 점층법적 묘사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난'(geennan; hell)의 원형 '게엔나'(geenna)는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이'(gai)와 예루살렘의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힌놈'(hinnom)이 결합되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까이힌놈'(gaihinnom)의 음역(소리나는 데로의 번역)이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는 예루살렘 남쪽과 남서쪽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데, 역사적으로 이곳에서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하여졌으므로(2열왕23,10) '살육의 골짜기'로도 불리워졌다(예레19,6).
이처럼 이곳은 사람을 불태워 우상에게 제사지냈던 끔찍한 범죄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쓰레기들이 태워져서 늘 연기가 나며 불이 타오르는 더럽고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범죄한 자가 죽은 후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힌놈 골짜기'에 비유하였다. '힌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게엔나'(geenna)가 '지옥'으로 번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6년 02월 15일 일요일
[연중 제6주일]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고속도로를 달리던 초보 운전자가 있었습니다.
정속 주행을 고집하던 그는, 앞에 가던 스포츠카가 빠르게 달려 나가자 갑자기 속도를 높여 따라붙었습니다.
옆자리 친구가 당황해하자 그는 말하였습니다. “앞차와 간격을 100미터로 유지하라고 배웠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규칙을 따르는 듯 보였지만, 통행 속도 제한이라는 법을 어긴 것입니다.
배운 대로 움직였을지 몰라도, 정작 주변 흐름과 안전이라는 근본 목적은 놓친 것이지요.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규칙에 집착하면서 정작 그것이 왜 필요한지 잊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전례부 활동을 하며 전례 규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런데 방학 때 본당에 가면 전례에 관하여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초를 왜 저렇게 켜지?’, ‘종은 저렇게 치는 게 아닌데 …….’ 주님을 위한 수단이던 규정이 어느새 주님을 가리는 장벽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은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요.
차량 간 거리를 지키려다 과속한 운전자처럼, 형식에만 얽매이면 더 본질적인 계명을 놓치게 됩니다.
모든 규정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 규칙을 이끄는 방향이고, 규칙은 사랑을 구체화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에 참되게 응답하는 삶이며, 우리를 자유와 기쁨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화답송)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가해)연중 제6주일 <생명의 말씀>
목표를 잊지 말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방종우 야고보 신부
유학하던 시절, 매일 아침 수영장에 가서 1km씩 수영을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공부 때문이었어요.
책상에 오래 앉아있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했고 삶의 활력을 위해서라도 운동이 필요했거든요. 꾸준히 수영을 하자 허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밤에 잠도 잘 왔습니다.
이런 장점을 느끼자 공부가 끝나도 꾸준히 수영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그런데 애초에 목표로 했던 공부가 끝나고 나니 그러한 결심이 금방 사라지더군요.
목표가 사라지자 수영은 이제 짐처럼 느껴졌어요. 결국 차일피일 미루다, 그 후에는 몇 번 가지도 못하고 체력이 바닥난 채 귀국하게 되었지요.
이 경험을 떠올려보면, ‘목표’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정확한 목표가 있으면 우리는 그 일에 기꺼이 성실하게 임하지만, 목표가 없거나 간절하지 않을 때면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바로 목표를 잃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본래 ‘하느님의 사랑’이었는데, 이것을 ‘현세의 권위’와 혼동하기 일쑤였거든요. 그러니 결국 꾸준히 행해야 할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한 권위 행사와 교만으로 그릇되게 표출되곤 했어요.
성실한 삶을 겉으로 드러내고자 했고, 율법만을 강조하다 보니 자비와 이해 없이 남을 억압하고 종용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하셨지요.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살인, 간음, 거짓 맹세)에 앞서 원천적인 동기(원망, 음욕, 맹세 자체)를 차단할 것을 강조하시지요.
사실 성경의 계명들은 때때로 짐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을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 이를 회피하곤 하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해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크나큰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일단은 쉬운 계명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성실히 지킬 것을 다짐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목표를 잊지 말고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실행한다면, 하느님을 향해 헤엄치는 우리의 영적인 체력은 더욱 좋아질 것이고 어느덧 사랑을 행하는데 지치지 않는 건강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가끔 실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좋은 영양분을 다시 공급해 주시는 하느님이 곁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결국엔 다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무엇보다 그 용기를, 그 마음을 전능하신 하느님이 알아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