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마태4,1-11)

2026. 2. 19. 오전 11: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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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2일 일요일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마태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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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사람의 창조와 원조들의 죄>(창세2,7-9. 3,1-7)

7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3,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화답송>시편51,3-4.5-6ㄱㄴ.12-13.1417(3)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2독서<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12-19)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17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복음<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마태4,1-11)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6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창세2,7-9; 3,1-7)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3,4-5)

 

창세기 3장 3절에서 여자는 선악과를 먹거나 만질 경우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낸 데 대해서, 창세기 3장 4절에서는 3절의 여자의 말을 받아 뱀이 완강히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4절이 계속적 '와우'(wau; and)로 문장이 시작되지만, 앞선 3절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 주기에 계속적 '와우'를 '그러나'(but) 혹은 새 성경처럼 '그러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창세기 3장 4절의 '말하였다'에 해당하는 '아마르'(amar)는 기본적으로는 '이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때로는 '지시하다'(창세22,3), '명령하다'(민수15,38), '맹세하다'(예레16,14)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런 뉘앙스를 살려 보다 강조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해석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말 중에 '결코'는 상당히 힘이 실린 권위적인 어투의 말이기 때문이다.

 

당시 뱀은 '결코'에 해당하는 부정사 절대형 '모트'(moth; surely)와 미완료형 '테무툰'(themuthun; you shall die)을 사용해서 동사의 개념을 강조하신 하느님을 흉내내어 마치 자신이 신적 권위를 지닌 것처럼 위장하고, 여자에게 강하게 지시하였음을 보여준다(창세2,16).

이처럼 사탄은 하느님의 위치에 서서 자신도 마치 신적 권위를 지닌 것처럼 위장하고 사람들을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한다.

 

창세기 3장 4절에 나오는 뱀의 말은 선악과를 먹을 경우 '반드시 죽을 것이다' ('모트 타무트'; moth thamuth)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창세2,17)에 단지 '로'(lo; not)라는 부정어만 붙인 형태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로'(lo)는 '아인'(ain)이나 '알'(al)이 다소 부드러운 부정을 나타내는 것과 달리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사탄이 하느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탄은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부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속이는 영이며 거짓의 아비이다(요한8,44).

 

이 시대에도 사탄은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로마6,23)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슬러 마치 죄악이 큰 기쁨을 순간적으로 가져오는 것처럼 속여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빵이 더 맛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그곳에 죽은 자들만 있음을~~,

그 여자('우둔함'을 지칭)의 손님들이 저승 깊은 곳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잠언9,17-18).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5)

원문의 '키 뻬욤 아콜르켐'(ki beyom akollkem; when you eat of it; the instant you eat it)은 직역하면 '너희가 먹는 바로 그때에'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욤'(yom)은 일반적으로 '날'(day)로 번역되지만, 특별한 시점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으며, 더군다나 바로 앞에 나오는 '키'(ki)가 시간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쓰여 '바로 그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뱀은 간교하고 사악한 동기를 가지고 선악과의 신통한 효험이 먹자마자 바로 나타난다고 말함으로써 여자의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속이는 거짓의 영 사탄은 각각의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극적인 미끼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멸망에 빠트린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2코린11,3)

 

한편 히브리어에서 '눈'('아인'; 'ain')은 단순히 보는 기능만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눈을 인간의 '외모'(1사무16,7)는 물론 인간의 마음 속 여러가지 감정을 표출하는 창구로 이해할 뿐 아니라(신명15,7; 잠언6,17; 시편18,28; 아가4,9) 때로는 지력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창세29,17).

따라서 여기서 '눈이 열리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기본적인 의미와 더불어 외모가 출중해지며 지력이 하느님처럼 향상된다는 다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열려'에 해당하는 '웨니프케후'(wenipqehu)는 단순히 '밝다'(이사42,20)는 의미 뿐만 아니라 '열다'(2열왕6,17.20), '뜨다'(욥기27,19)는 뜻도 가지고 있는 '파카흐'(paqah)의 단순 재귀 완료형이다.

이것은 어둡던 눈이 밝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장님처럼 못보던 눈이 열려 보게 되는 새로운 차원을 말한다(시편146,8; 이사42,7).

 

특히 여기서 수동의 뜻이 강한 재귀형이 사용된 것은 이러한 일이 전적으로 선악과의 효험에 의해 나타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먹는 순간 바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것임을 단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뱀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와 먹고 난 후의 상태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여자를 집요하게 유혹하고 있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5)

'하느님처럼'에 해당하는 '켈로힘'(kellohim; like God)에서 하느님의 이름 '엘로힘'(ellohim) 앞에 붙어 있는 '케'(ke)는 '~처럼'(as; like)이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이다(욥기32,19).

 

당시 뱀이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주 하느님'이 아닌, 단지 하느님의 권능을 강조하는 '하느님'(엘로힘)이란 명칭만을 사용한 것은 여자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약을 망각하게 하고 하느님의 권능을 자신도 가질 수 있다는 허영심을 부추기고자 하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탄은 단어 하나까지 선택적으로 사용해서 오직 인간을 파멸에 빠트리는데 전념한다. 이러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 승리할 수 없으며,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한다(에페6,13).

 

한편 여기서 '선'(善)에 해당하는 '토브'(tob; good)는 단순히 착함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온갖 종류의 긍정적인 것을 가리킨다. 반대로 '악'(惡)에 해당하는 '라'(ra; evil) 역시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알다'에 해당하는 '야다'(yada)는 단순히 머리로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속속들이 아는 것까지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는 이 단어가 남녀가 동침하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며(창세4,1; 1열왕1,4) '익숙하다'(창세25,27; 1열왕9,27)라는 뜻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선과 악을 구별하는 정도의 지력만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선의 속성과 악의 속성을 깊이 알며, 또한 선과 악에 익숙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처럼 선과 악을 철저히 알게 될 것이라는 뱀의 장담은 완전한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남자와 여자는 물론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류가 선에는 오히려 무지하고 선을 행할 능력마저 퇴보된 반면에, 오히려 악을 알고 악을 행하는 능력만 더 커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게 되었고(창세3,7), 인류의 모든 비극은 이처럼 '알게 될 것'('yada')이라는 사탄의 달콤한 거짓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발생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하느님께서 아시고'에서도 '아시다'는 것은 앞의 '야다'(yada)동사와 같아서 철저히 아는 것을 말한다. 사탄은 여기서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분사형을 사용해서 하느님께서 이전부터 알고 계셨으며 현재로 알고 있다고 여자를 부추기고 있다.

 

이처럼 사탄은 마치 인간에게 큰 유익이나 줄 것처럼 웃으면서 다가오고, 어떤 일의 배후에 마치 큰 흑막이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긴다. 그러나 사탄의 마음에는 온갖 부정이 가득하고 그 혀에는 간교함과 사악함이 가득하여 온갖 거짓과 위선으로 인간을 멸망에 이르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순 제1주일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해마다 사순 첫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겪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1독서의 아담과 달리 유혹에 맞서 싸워 이기신 새 아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새 아담이실 뿐만 아니라 새 이스라엘이시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이끄심대로 살기를 거부하였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그분께서는 온 삶을 하느님 손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적어도 세 번 유혹을 받았습니다(탈출 16장; 17장; 32장).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먹는 것’과 관련된 단어가 무려 901번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빵을 내려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만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나를, 곧 재화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또 날마다 주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를 얼마나 신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쌓아 놓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청하도록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두 번째 유혹은 우리가 하느님을 두고 겪는 가장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악마는 예수님께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테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지체된다고 여길 때 그분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정말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신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에 응답하시어 기적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는가?’라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에도 당신을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의 요구대로 바꾸어 기적을 행해 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유혹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빛과 희망을 주시기를 청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여러 번 유혹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으로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에 대한 오롯한 믿음으로 언제나 악마와 맞서 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으로 군림할 것인가 봉사할 것인가?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 거짓 신을 섬길 것인가?

하느님을 닮을 것인가 악마를 닮을 것인가?

 

(정용진 요셉 신부)

 


 

 


  [사순 제1주일]

 

우리는 많은 유혹 속에 살며 그 유혹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대신 다 받으시고 완성하십니다. 그 완성, 승리, 오늘 우리 모두 다 받읍시다.

 

마태3,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죄가 없으신 분, 그래서 세례가 필요 없으신 분이 죄인들과 하나(한 몸) 되시기 위해 받으신 세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 세위께서 한곳에서 한 가지 일을 위한 그 한뜻의 일치(삼위일체)로 계십니다. 죄인들과 한 몸이 되시기 위한, 한뜻입니다.

 

(마태 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 성자 하느님께서 왜 악마의 유혹을 받으세요? 그리고 악마에게 그럴 자격, 힘이 있는 건가요?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진 죄인들과 하나 되시기 위한 필요한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까지 광야40년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광야를 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렀던 그 잘못을 예수님께서 다시 걸으십니다. 40은 그리스도인들의 한 생애를 뜻합니다.

 

스테파노 또한 그 광야 40년을 교회의 모습이라 합니다.

(사도7,38-39) 38 이 사람(모세)은 광야의 집회(교회) 때, 시나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는 천사와 우리 조상들 사이에 중개자가 되어,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39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에게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제쳐 놓고 마음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 그들 모두는 이집트(세상)의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그들 입맛에 맞았던 세상 음식 그 유혹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 양식에 굶주림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40일 단식이 그들의 세상 음식을 단식하시는 것이며~ 굶주린 그들에게 하늘의 참 양식을 먹이시기 위한 단식인 것입니다. 그것이 참 단식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마태9,13)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이사58,6~) 단식입니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8,3)

= 사람들이 실패한 음식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근거로 물리치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말씀(구원의 계명)보다 사람의 말 곧 재물(빵)을 위한 신앙을 ~~ 다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당을 다니는 것은 아닌지? 오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 하늘의 성전(신앙)을 이용해 땅, 세상 것을 보도록, 갖도록 유혹(誘惑)합니다.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시편91,11-12)

=이번에도 악마는 하느님의 말씀을 근거로 유혹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 권위를 기적으로 보이라 유혹합니다.

그 기적, 신비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치유, 기적을 구원을 위한 죄의 용서, 그 표징으로 깨닫지 못하고 육을 위한 기적으로만 보고 좋아하고 원한다면~ 악마는 그 마음을 이용해 기적으로, 신비로운 일로 유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넘어집니다. 그곳에 ‘죽음이 있다’ 하셨습니다,(마태24,2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6,16)

= 그 거짓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시 물리치십니다. 말씀을 한 문장, 한 단락으로 보이는 대로 문자로 보면~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뜻으로 깨닫게 되어 유혹에 넘어갑니다.<신천지 사건을 잘 살펴보세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 세례부터 묵상한 것입니다.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 병행 루가복음을 보면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루가4,6) 오늘 말씀과 기도를 이용한 빵(재물)과 기적과 신비체험, 세상의 명예, ‘그 땅의 것들을 위한 것은 아닌지 보라’하십니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물러가라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6,13)

= 예수님은 당신의 뜻, 그 자기말로 악마를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뜻,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은 모든 문제, 사건(악)을 자기 뜻, 생각, 그 말로 해결하려 합니다. 제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마르9,28-29) 28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 기도, 올바른 기도 “아버지의 뜻이 이 땅(나)에서 이루어지소서.” 그 하느님의 뜻, 그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기도)하고 그 말씀을 선포했을 때에만 악마는 쫓겨납니다. 제자들은 사람의 뜻을 위한 그 사람의 말을 했기에 쫓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으로만 악마를 대적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모르면서 이단들을 퇴치한다? 우습지요~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세례를 받으신 후~ 신앙인들이 실패한 그 유혹을 다시 받으시고 물리치셔서~ 그 승리를 우리에게 전가 시켜 주신, 그 구원의 일을 오늘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실패, 예수님께서 승리(勝利)로 완성 하셨습니다.

 

(1코린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 세상(땅) 것을 위한 신앙이 아닌 하늘로, 그 하늘의 성전이신 승리의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오늘~~~

아멘 -

 

 

 

 

 


  오늘 복음(마태4,1-11) 해설이 없어 마르코 복음으로 대신합니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르12~13)

 

마르코 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마르1,9~11)에 이어서 예수님의 또 다른 공생활 준비인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와 루카 복음사가가 비교적 길게 기록한 내용(마태4,1~11; 루카4,1~13)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단지 두 절로 짧게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승리'라는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단락화 시킨 반면에, 마르코는 앞으로 공생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될 '사탄과의 대결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 1장 12절의 '곧'으로 번역된 '카이 유튀스'(kai euthys; and immediately; at once)는 직역하면 '그리고 곧'이다.

그러니까 '광야의 유혹'과 바로 이전의 '예수님 세례 사건'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곧'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쉴새 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마태4,1) 사탄의 유혹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가셨다는 사건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때로는 고난이나 시험의 길로 인도하심을 알게 한다(요한16장 참조).

 

마르코 복음 1장 12절의 '광야'에 해당하는 '에레모스'(eremos; wilderness; desert)가 팔레스티나 서북쪽의 콰란티니아(Quarantania)인지, 모세가 40일 동안 단식을 한 시나이 산인지, 타볼 산인지 불확실하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란,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이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는 고독한 곳, 그리고 의지할 아무 것도 없고 짐승들이나 악령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12절의 '내보내셨다'에 해당하는 '에크발레이'(ekballei; sent; driveth)는 직설법 현재 동사로서, 직역하면 '그가 내던지고 있다'이다.

특히 마르코가 사용한 단어는 마태오가 사용한 '아네크테'(anechthe; '그가 이끌리어')와 루카가 사용한 '에게토'(egeto; '그가 이끌려')에 비해서 훨씬 역동적인 뉘앙스를 준다.

또한 '광야'에서 '~로'에 해당하는 '에이스'(eis; into)는 '안으로'이기 때문에, 본문은 '그가 그 광야 안으로 내던지고 있다'가 된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람들과 단절된 고립된 상태로,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곳으로 강하게 내던져, 예수님으로 하여금 혼자 외롭게 시련과 더불어 공생활 준비 과정을 겪게 한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십 일'에 해당하는 '텟세라콘타 헤메라스'(tesserakonta hemeras; forty days)는 유대인들이 '땅'의 숫자로 여기던 '4'와 '하늘'의 숫자로 여기던 '10'을 곱한 수로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일을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하는 수이다.

성경에서는 주로 '고난의 기간들'을 상징하는 숫자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노아 시대에 모든 생물들을 없애기 위해 사십 주야 동안 세상에 비를 내리셨고(창세7,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에 광야에서 40년간 살았으며(신명8,2), 모세가 단식하며 사십 주야를 시나이 산 위에서 있었고(탈출34,28; 신명9,9.11.18), 엘리야는 광야를 사십 주야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했다(1열왕9,18).

 

마르코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시는 40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셨는데(마태4,2; 루카4,2), 이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받기 전 시나이 산에 올라가 40일 단식했던 모세의 모습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세 이상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철저히 준비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으로 번역된 '사타나'(satana)는 '적대자'(the Adversary)라는 뜻으로 구약의 '사탄'(satan)을 음역한 단어이다(욥2,7).

사탄은 신,구약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을 적대하고 하느님 대전에 참소(고발)하는 영적 존재로 등장한다.

여기서 '유혹을 받으셨다'에 해당하는 '페이라조메노스'(peirazomenos; tempted)의 원형 '페이라조'(peirazo)는 '(넘어지게)시도하다', '증거를 진술하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넘어지게 하는 유혹(temptation)의 의미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단련(test)이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도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사탄의 유혹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련은 단지 유혹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 아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단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광야와 들짐승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깨서 받으신 외적인 시련(outer trial)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고, 마태오나 루카는 예수님께서 유혹받으신 세 가지 내용을 기록하여 내적인 유혹(inner temptation)을 강조했다.

 

마르코 복음 1장 13절의 '들짐승들'에 해당하는 '테리온'(therion; wild beasts)은 사나운 야생 짐승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유혹 받으신 유대 광야에는 실제로 표범이나 여우같은 들짐승들의 위협이 항상 존재했다.

 

원조 아담과 하와는 짐승의 위협도 없고 배고픔의 고통도 없는 에덴 동산에서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지었지만, 제2의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굶으시고 주변에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련을 이기셨다.

 

끝으로, 마르코 복음 1장 13절에서 타락한 천사인 사탄과 선한 천사(히브1,14; 탈출14,19; 33,2)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탄은 하느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고 오히려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했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반면에, 선한 천사는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여 예수님을 섬기고 있다.

 



   

20260222일 일요일

[사순 제1주일]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한 사람이 붕어빵 가게에 들렀다가, ‘31,000, 1300이라는 가격표를 보고 의아해하였습니다.

보통은 많이 살수록 저렴한데 이 집은 오히려 낱개가 더 쌌던 셈이지요.

주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붕어빵을 하나씩 사 먹는 사람이 더 가난하거든요.”

천 원이 없어 한 개만 사는 사람을 위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물질 중심인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가난한 이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고, 오히려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우리는 유혹을 물리치기도, 그 유혹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는데 이는 우리 인간들이 겪는 유혹과 같습니다.

비유와 상징으로서 드러난,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아무런 노력 없이 불편함을 쉽게 해결하려는 유혹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시험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마지막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 곧 세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 유혹들을 물리칠 때, 우리는 악마가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마태 4,4).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4,7).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4,10).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우리가 사순 시기 유혹을 물리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사순 제1주일 <생명의 말씀>

 

하느님처럼 되고 싶으십니까?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 

 

여러분은 무엇이 원죄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신자들은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이 원죄라고 생각합니다일견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원죄의 전부는 아닙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이 원죄의 전부라고 한다면 솔직히 하느님께 실망할 것 같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분이 우리 하느님 아니신가요?

그런데 세상에 나무열매가 하나만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아주 소중한 것도 아닌데 고작 한 번 먹었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영원한 벌을 내리셨다고 저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 열매는 상징입니다.

본질은 나무 열매에 있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모든 마음에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는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딱 하나 그럴 수 없던 나무 열매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악마의 대화에서 우리는 원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세 번 유혹합니다.

한 번은 먹을 것으로다른 한 번은 목숨으로마지막으로는 권력으로 그분을 유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 번의 유혹을 다 이겨내십니다.

예수님이니까 배고프지 않고목숨이 소중하지 않고권력을 싫어하셔서(?)가 아닙니다.

온전한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이기에 배고픔도 느끼시고하나뿐인 목숨도 소중하고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아십니다.

하지만 이 모든 유혹의 전제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 라면이라는 데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당신 자신을 굳이 증명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무언가를 해야 합니까?

그분들의 삶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 굳이 위험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원죄의 본질은 어떠한 이유로든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을 시험해 보고 싶은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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