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요한 20,1-2.11-18)

2013. 7. 22. 오후 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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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2일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교회의 전통으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라자로와 마르타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치에 있었다’(루카 10,39 참조).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 보았듯이, 마리아는 시중드는 데에 분주했던 마르타와 달리 그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2).
여기서 ‘좋은 몫’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깊고 오묘합니다. 그것은 부활 체험의 근본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뵙자마자 그분 발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 또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기도 하였습니다(요한 11,2 참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주님 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마르 15,40 참조).
그렇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치에 머물렀고, 심지어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뒤에도 그 발치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목숨을 잃은 학생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그 유가족에게도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 런지요?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사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제1독서 아가 3,1-4ㄴ
복음 요한 20,1-2.11-18
이명언 마태오신부
언젠가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신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제게 “신부님, 저는 행복을 느낄 수가 없어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고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들 역시 일이 잘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 성취감도 느끼고 자신감도 갖습니다. 단지 우울증 환자들은 그러한 정서를 오랫동안 간직하지 못하는 것이랍니다. 즉, 즐거운 감정은 금세 잊어버리고, 우울한 감정은 길게 끌고 가는 것이 우울증에 빠진 환자들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이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가 우울한 감정을 줄이고 대신 좋은 감정이 드는 횟수를 늘려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정을 간직하는 시간이 적을 뿐이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회가 복잡 다양해짐에 따라 이러한 정신적인 아픔을 겪는 분들이 많아집니다. 어쩌면 위의 방법, 다시 말해 좋은 감정이 드는 횟수를 늘려 나가는 것이 이렇게 정신적인 아픔을 겪는 분들에게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대부분은 “다 필요 없어.”라고 자포자기식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들으려하지 않고 또 행동하려고 하지 않으니 자신의 병이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듣는 것은 이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순간이 있을 때 항상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셨지요. 공생활 시작 전에 혼자 광야에서 40일간 단식기도를 하셨고, 12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도 홀로이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직전에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중요한 순간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행하셨던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바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가요? 주님도 하신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축일을 맞이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더욱 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죽어 무덤에 묻히게 되었지요.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발견할 수 없어 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무덤 속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누군가 훔쳐갔을 것이라는 세상의 판단만을 내세웠기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판단만을 내세울 때,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홀로이 조용한 곳을 찾아가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귀한 사명을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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