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13) 두려워 말라 (묵시1:17-20)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그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서면 그냥 죽어 버리게 되는 그 천지의 주인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구요.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데 도저히 그 사실 만으로도 감격스러워 감당을 못할 텐데 사람들은 그 하느님을 이제 노예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소원 들어줘, 병 고쳐 줘, 부자 만들어 줘’ 하면서 열심히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문지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행동들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나?’를 두려워해야지요.
(묵시1:17-20)
17 나는 그분을 뵙자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오른손을 얹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18 살아 있는 존재이다.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내 손에 쥐고 있다. 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20 네가 보는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황금등경의 비밀은 다음과 같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고 일곱 등경은 곧 일곱 교회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구절들을 공부하면서 능력과 권세와 위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교회를 오른 손에 꼭 붙들어 보호하고 계시며 주석 같은 두발로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도 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죽은 자같이 됩니다. 삼년 반 동안 함께 숙식을 같이 하던 스승입니다. 그 중에서 유독 사랑을 많이 받았던 ‘주님의 사랑하는 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예수님을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요한은 그렇게 사랑해 주던 스승을 만났음에도 반가움과 기쁨이 아닌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그런 모습은 예언자들이나 하느님의 종들이 하느님을 만났을 때 동일 하게 나타났던 현상입니다.
(판관13:22) 22 '거룩한 분을 뵈었으니, 우리는 영락없이 죽게 되었어' 하고 마노아가 아내에게 걱정스러운 소리를 했지만,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와 그 아내가 하느님을 보고 지른 비명입니다.
(다니10:5-9) 5 바라보니 한 사람이 모시옷을 입고 순금 띠를 띠고 있었다. 6 몸은 감람석(황옥) 같았고 얼굴은 번갯불처럼 빛났으며 눈은 등불 같았고 팔다리는 놋쇠처럼 윤이 났으며 음성은 뭇 사람이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7 같이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겁이 나서 달아나 숨었지만 나 다니엘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8 혼자 남아서 그 장엄한 모습을 보다가 나는 사색이 되었다. 맥이 빠져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9 그러는데 음성이 들려 왔다. 그 음성을 듣고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다니엘은 하느님을 보자마자 온 몸에 힘이 빠졌고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한글성경에서 깊이 ‘잠들었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담’은 마치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은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사6:5) 5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이사야도 하느님을 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보자마자 ‘다마 키 오이’ 하고 외칩니다. ‘다마’는 ‘파멸하다, 파괴하다’라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 파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지옥 앞에서 심판을 받을 자가 마지막 단말마로 지르는 비명입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하느님의 사람도 그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을 직접 보자마자 자신이 얼마나 작고 추하고 더러운 인간인지 일순간에 드러나게 되어 나는 도저히 저 빛을 감당할 수 없는 자로 파멸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 게 된 것입니다.
(에제1:28) 28 사방으로 뻗는 그 불빛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마치 야훼의 영광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땅에 엎드리자, 말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서도 에제키엘이 하느의 영광을 보고 엎드렸다고 나오지요? 여기서 ‘엎드리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나팔’도 ‘죽은 것 같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마스코에서 빛을 본 후 눈이 멉니다.
(사도9:3-4)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4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출애33:18-20) 18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19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20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하느님은 그토록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 죄인들은 그 하느님의 영광 앞에 서면 ‘다마 키 오이’하고 ‘난 이제 죽게 되는구나.’ 하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 본 바대로 위대한 하느님의 종들도 그 하느님 앞에서면 죽은 듯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느님이 그 새 언약을 성취하시고 약속대로 하느님의 백성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요한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마태28:20)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면 지금 그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서면 그 냥 죽어 버리게 되는 그 천지의 주인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구요.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은 이렇게 눈도 안 멀고 죽지도 않게 되신 것입니까? 그게 바로 여러분의 신분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존귀하신 분들이십니다. 하느님과 동행하면서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그 분의 이끄심을 받으시는 하느님의 친구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십니다.
여러분, 박쥐나 올빼미는 빛에 노출이 되면 죽습니다. 쥐나 바퀴벌레도 빛을 비추면 감당을 못하고 어디로 숨기 바쁩니다. 그렇게 죄인들에게 비치는 하느님의 영광의 빛은 두려움과 경악의 심판의 빛입니다. 똑같은 죄인들이었던 우리에게 그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빛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렇게 기쁘고 안도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햇빛이 식물을 키우고 열매를 맺히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영광의 빛 속에서 평안을 얻습니다. 그 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께서 죽은 것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요한에게 ‘두려워 말라’ 라고 하시면서 오른 손을 얹어 안심을 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심판의 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하느님의 백성이십니다. 안 좋으세요?
(이사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
여러분, 그 사실이 정말 믿겨지신다면 그 사실보다 더 여러분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 물건이 ,사건이 있겠습니까? 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와 계신데 도저히 그 사실 만으로도 감격스러워 감당을 못할 텐데 사람들은 그 하느님을 이제 노예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소원 들어줘, 병 고쳐 줘, 부자 만들어 줘’ 하면서 열심히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문지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행동들입니다. 18절에 보면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묵시1:18) 18 살아 있는 존재이다.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내 손에 쥐고 있다.
여기서 ‘산자’라고 번역이 된 ‘호 존’은 관사가 붙은 현재분사 능동태입니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시점으로부터 계속 살아 계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공히 하느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여호수3:10) 10 여호수아는 말하였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게서 너희 가운데 계신다. 가나안족, 헷족, 히위족, 브리즈족, 기르갓족, 아모리족, 여부스족은 반드시 쫓겨나리라.
(시편42:2) 2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이까?
히브리어로는 ‘하이 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인 헬라어 ‘자오’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렇게 ‘산 자’ 라는 용어는 신구약에서 공히 하느님께 적용된 신적 칭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단어로 자신을 묘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전에 죽었었다’ 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죽었었다’라는 단어 ‘에게노멘 네크로스’는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과거에 한번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 분의 죽음은 영 단번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세세토록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구절을 읽으시는 하느님의 백성들도 그 죽음의 영향력이 오늘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정말 이 땅에 죽을 수 있는 인간으로 오셔서 실제로 죽으셨고 이제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자리로 복귀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확실하게 알아두셔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죽었었지만 이제 산자의 자리에 복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교는 정말 허무한 것입니다.
(로마4:25)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가된 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완전한 의가 완제품이 되어서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가톨릭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교리대로 하면 예수님이 굳이 살아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원죄가 해결되어 그들에게 의가 ’주입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義‘가 영세를 받을 때 주입이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영세를 안 받으면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 세례 안 받아도 천국 갑니까? 못 갑니까? 부득이하게 세례를 받지 못했으나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사람은 천국에 갑니다.
세례라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의 인간적인 긍정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느님의 긍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세례 행위는 하느님의 구원 사역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세례는 우리 성도의 신앙의 고백이며 구원 이해의 표출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세 때 주입된 ‘義’로 우리는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었고, 선한 행위를 함으로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게 되기 때문에 열심히 선행을 보태야 한다고 합니다. 영세를 받은 이후에 짓는 죄는 고해성사를 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된 것은 연옥에서 해결합니다. 십자가로는 원죄가 해결된 것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열심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죽으신 예수님이 아직도 걸려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기들이 완성해야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수난 받으시고 죽으셔서 우리의 원죄를 해결해 주셨으니 우리 열심히 선행을 하고 종교행위를 해서 ‘거기에 보태자’라고 합니다. 굉장히 기특한 발상인 것 같지만 그건 아주 위험한 주장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에 조금도 보탤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그 안에서 부활을 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이지 주님이 죽어주셨고 이제 부활의 몫은 우리에게도 나누어져 있는 것이라면 저는 정말 자신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할수록 관록이 붙어 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시퍼런 칼날 같은 말씀 앞에서 저 자신이 점점 더 밝히 드러나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구원은 완전한 항복입니다. 살아 나셔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의로움의 옷’ 그 이외에 우리가 보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영원히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바로 이 열쇠입니다. 메시야에게 주어진 그 열쇠.
(이사22:22) 22 내가 또한 다윗의 집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묵시3:7) 7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시면 열 자가 없는 분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바로 이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열쇠는 고대 시대를 비롯해서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에도 통치권, 권세 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왕이나 황제들이 도시를 방문할 때 그 도시의 성주나 분봉 왕들이 입구에서 왕에게 상징적인 ‘금 열쇠나 은 열쇠‘를 만들어 바쳤다고 합니다. ’여기는 당신의 통치 아래 있는 당신의 땅입니다‘라는 고백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여기서 음부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하데스’라는 말입니다. 하데스는 부정접두사‘알파’와 ‘보다’를 의미하는 ‘에이도’의 합성어로 그 끝을 볼 수 없는 아득히 멀고 깊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데스는 저주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그냥 막연히 죽은 영들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저주받을 자들이 가는 지옥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두 구절만 확인하고 가지요.
(묵시6:8) 8 그리고 보니 푸르스름한 말 한 필이 있고 그 위에 탄 사람은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지옥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땅의 사분의 일을 지배하는 권한 곧 칼과 기근과 죽음, 그리고 땅의 짐승들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죽음과 지옥을 의인화해서 마귀의 세력을 표현합니다.
(묵시20:14) 14 그리고 죽음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
바로 그 죽음과 지옥(음부)의 열쇠를 예수께서 쥐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죽음(死亡)과 지옥(地獄)의 열쇠 뿐 아니라 천국의 열쇠도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열쇠를 쥐고 계시다는 것은 통치권이 그 분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뿐 아니라 음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십니다. 음부에 묶여있는 사탄과 마귀의 세력도 예수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안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실패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사탄은 완전히 무장해제(disarmed)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욥을 시험하는 사탄에게 넘어가지 못할 선을 그어 주셨지요?
(욥기38:11) 11 그리고 나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 오지 말아라. 너의 도도한 물결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바다의 경계를 그으시고 ‘넘어가지 말아라’라고 명령하시는 그 예수님의 명령에 사탄도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거룩을 가르치시기 위해 필요한 만큼 사탄을 이용하실 뿐입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그 어느 곳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벗어난 무정부 상태의 공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잡혀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해 굳게 잠긴 死亡의 자물통을 여십니다. 사망이 자기가 포로로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모조리 끌어내십니다.
죽음(死亡)을 상징하는 애굽에 단 한 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이 남겨지지 않았던 것처럼 하느님이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한 하느님의 백성은 모두 다 그 죽음의 나라에서 나오게 됩니다. 열쇠를 우리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읽어보지요.
(이사26:19) 19 그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이미 죽은 당신의 백성이 다시 살 것입니다. 그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고 땅 속에 누워 있는 자들이 깨어나 기뻐 뛸 것입니다. 땅은 반짝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죽은 넋들을 다시 솟아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열쇠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의 문을 여십니다.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면 예수님은 천국 문을 잠가 버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의 방주에 하느님의 백성들과 회복될 피조물들을 넣고 밖에서 하느님께서 문을 닫아 거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창세7:15-16) 15 몸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것이 한 쌍씩 노아와 함께 배에 올랐다. 16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분부하신 대로 모든 짐승의 암컷과 수컷이 짝을 지어 들어 갔다. 그리고 노아가 들어가자 야훼께서 *문을 닫으셨다.
하느님의 택한 백성 외에는 절대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자물통은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치고 두들겨도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주님, 내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종교행위를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여기는 너희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너희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옥 불에 들어가 이를 갈고 슬피 울어라’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그 열쇠를 누가 가지고 계시다구요? ‘예수님’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십니다.
(요한10:1-5)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 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2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 간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 하나 불러 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양떼를 불러 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 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 간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이 이야기는 각기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야 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 당시 양의 우리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산에서 풀을 뜯기다가 동네까지 내려오지 못 할 때 일정한 장소에 양을 모아두는 임시 우리들이 여기 저기 있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우리에는 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입구에는 목자가 서서 양을 통과 시켰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께서 그 양의 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양의 문으로는 이리나 늑대는 못 들어갑니다.
또 다른 양의 우리는 동네 아래에 있는 공동 우리입니다. 목자들이 양을 먹이고 마을로 데리고 들어와서 공동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에 모두 집어넣습니다. ‘다른 집 양하고 섞이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양은 정확하게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아침에 나갈 때 주인이 양을 부르면 그 양들은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따라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갑니다.
예수님이 자케오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이 마태오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이 필립보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희한하게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조차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옵니다.
예수님이 死亡과 陰府의 열쇠, 메시야가 쥐신, 다윗의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에 나오셨습니까? 그 열쇠를 쥐신 분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믿겠노라고 분연히 일어선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보태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요한복음9장에 보면 소경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예수님이 안식일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그 소경은 출교를 당합니다. 쫓겨납니다. 쫓겨나서 누구의 품으로 갑니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볼 때는 출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유대교라는 우리에서 불려나온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10장에서 양의 우리에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불려 나오는 양들의 이야기로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신 우리가 아무리 매력적이고 강한 울타리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참 양들은 그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오직 예수만 이 문이시며 예수만이 참 목자이십니다.
(시편2:12) 12 자칫하면 불붙는 그의 분노, 금시라도 터지면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분께 몸을 피하는 자 모두 다 복되어라.
그리고 그 분은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십니다.
(묵시1:8) 8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묘사하는 이 동일한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묘사하는데 쓰십니다. 우리를 위해 인간으로 오셔서 죽으신 그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이셨다는 것이지요.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나시고 촌구석 나자렛에서 똥을 싸고 오줌을 싸는 아기부터 출발하셔서 말을 배우셔야 했고 가구 수리하는 법을 배우셔야 했고 등짐을 지고 가구를 고치러 다니셨던, 그리고 사람들에게 멸시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하릴없이 죽으셨던 그 분이 바로 하느님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처음이시며 마지막이십니다. 그분은 전부이십니다.
(잠언8:23-26) 23 땅이 생기기 전,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 24 깊은 바다가 생기기 전에, 샘에서 물이 솟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5 멧부리가 아직 박히지 않고 언덕이 생겨 나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6 평평한 땅과 땅의 흙을 만드시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요한1:1-3.14)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2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8:58) 58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고전10:9) 9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떠보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주님을 떠보는 자가 되어서는
여기에서 ‘주를 시험하다가’‘에크페이라조멘 톤 크리스톤’‘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라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불 뱀을 풀어서 많은 자들을 죽이셨습니다. 그 사건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우리의 구원 사건의 전체를 이끌고 가신 분이십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 분이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속사역을 시작하시고 수행하시고 완성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 이십니다.
그 분이 여러분을 가리켜 내 형제요 내 자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신분이 확인된 여러분이 왜 두렵고 왜 염려를 하십니까? 과거의 상처가 여러분을 괴롭히십니까? 예수님은 알파 이십니다. 아직 여러분에게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 두려우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오메가 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전부이십니다. 두려워 마세요. 힘을 내십시오.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 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나?’를 두려워 하셔야지요.
여러분의 신분이 확인되신 분들은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은 죄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여전 히 God illusion(착각, 환상) 자기가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죄 속에 머물러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해결하실 거예요. 여러 분이 원하는 대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이면 그렇게 해결하실 것이고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일이 해결되게도 하실 것이고요.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세요. 두려움을 떨쳐 버리세요.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오른 손을 얹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그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