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4)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 (묵시1,4-8)
이 7 이라는 숫자의 개념은 원래 창세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 안식하신 것에서 ‘안식의 수’ ‘완전수’라는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묵시록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운명 지어진 그 영광과 기쁨과 승리와 평화를 ‘삶의 내용으로, 과정으로 누리고 있는가‘ ’믿음으로 지켜내고 있는가‘를 확인해서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성경의 그 확실하고 명확한 언약을 마음에 새겨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어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묵시록이 기록된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묵시1,4-8)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5 그리고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6 우리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또 당신의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서 영광과 권세를 영원무궁토록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7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3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묵시록은 여느 성경과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며 복을 받은 자들은 그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심판의 필연성과 확실성과 긴박성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나누었을 때 1장 1절부터 8절까지를 묵시록 전체의 서론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1-3절까지는 요한이 왜 요한묵시록을 기록하고 있고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써 놓은 것이고 진짜 편지의 서론은 4절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은 전체가 7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이지요? 그래서 4절부터 요한은 편지의 서론으로 들어갑니다. 4-5절 상반부까지가 편지의 인사말이고 5절 하반부부터 6절까지가 하느님을 찬송하는 내용이고 7,8절에서 요한묵시록 전체의 주제가 나옵니다. ‘다시 오시는 하느님’ 그것이 바로 요한묵시록 전체의 주제입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반드시 속히 오실 전능하신 하느님’ 이것이 요한묵시록의 전체 주제입니다.
오늘은 인사말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먼저 4절과5절을 보면 요한이 편지의 인사말을 당시 사도들이 썼던 편지의 인사말과 동일한 형식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도들은 일반적인 편지 형식의 인사말처럼 ‘누가 누구에게 편지를 씁니다.’라고 쓰면서 거기에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구절을 추가했습니다.
예를 들어 에페소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어떻게 인사말을 쓰는지 보면 아마 사도 요한의 편지 인사말이 쉽게 공감이 가실 것입니다.
(에페1:1-2) 1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로가 그리스도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에페소)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바울로는 에페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입니다. 바울로가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바란다’고 축원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요한은(엄밀하게 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이 쓴 것이지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어떤 축원을 하지요? 본문 4절부터 읽어보지요.
(묵시1:4-5)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5 그리고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인사말 형식과 똑 같지요?
이렇게 이 편지는 요한이 썼고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는 것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 다른 교회가 많았는데도 왜 굳이 일곱 교회(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라고 숫자를 맞추었다고 했지요?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숫자에다가 어떤 특정한 개념을 부여했었는데 일곱이라는 숫자는 전체, 충만, 완전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소 아시아에 다른 유명한 교회들이 많았는데도 굳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그 일곱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초월한 ‘전체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라 했습니다.
각 교회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그 마지막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말을 마칩니다. 발신자가 성령, 수신자는 교회들입니다. 어떤 특정한 지역적 교회를 지칭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요한묵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쓴 편지라고 기록이 되어있지만 전체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인 것입니다.
이 ‘7’ 이라는 숫자의 개념은 원래 창세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 안식하신 것에서 ‘안식의 수’ ‘완전수’라는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일곱 번째 날에 안식을 하셨다는 것은 ‘쉬다, 편안히 계시다’라는 의미보다는 창조가 완성되고 완성된 창조 안에 하느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장면입니다. 모든 피조물 위에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완성의 의미에서 일곱 교회는 전체로서의 완성 된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인(印)이나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도 그런 의미에서 즉, 심판의 완성과 필연 의 의미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를 쓴 것입니다. 그건 시간적인 순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레위26:18) 18 이렇게까지 하여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너희 죄를 거듭거듭 일곱 배로 벌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치겠다. 그런데도 청종치 않으면 너희가 지은 죄의 일곱 배로 벌을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딱 일곱 배만 벌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벌의 중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491번째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일곱이라는 개념은 상징 적인 개념입니다. 왜 제가 일곱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해 드리는가 하면 요한묵시록은 특히 이 일곱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곱이라는 뜻이 무슨 뜻인지 잘 아셨죠?
그럼 이제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해서는 공부를 했고 그 축원의 내용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그 축원의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로의 서신의 인사말처럼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를 빌어주고 있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평화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 하느님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삼위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헬라어로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앞에 헬라어 ‘아포’ ‘from’이라는 전치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앞에 ‘아포’ 라는 전치사가 있고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전치사 ‘아포’ 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전하는데 그 은혜와 평화는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성령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성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한 분 한 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아포’ 라는 전치사 다음에는 소유격이 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포’라는 말 뒤에 전부 주격이 와 있습니다. 왜 요한은 이렇게 어법에도 맞지 않는 글을 썼을까요? 문법상으로는 당연히 소유격으로 써야 하지만 요한이 주격을 쓰는 파격을 범한 것은 구약에 기록된 영원불변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고유 명사에 대하여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외심과 그 절대성과 주권성을 강조하려는 의미에서 그렇게 기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성부하느님을 표현하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를 성경은 어떻게 설명을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묵시1:4)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출애3:14) 14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모세가 ‘하느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 누가 보내서 왔냐? 그러면 어떻게 대답 합니까’ 하니까 하느님께서 ‘I am who I am’이라고 당신을 표현하십니다. 이 말은 현재형으로도 쓰이고 미래형으로도 쓰이는 말입니다. 히브리 원어로도 하느님을 뜻하는 ‘야훼’ 라는 단어는 ‘존재’ 를 가리키는 be동사에 해당하는 ‘하야’ 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 생령이 바로 히브리말로 ‘하이 네페쉬 하 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많은 문서에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연상할 때 떠오르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하느님에 대한 묘사를 들을 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느님을 금방 연상할 수 있었고, ‘그 하느님이 이제도, 즉 지금도 역사하시므로 우리는 안전해’하고 마음에 평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은혜와 평화를 기원하면서 일부러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묘사를 동원한 것입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이사41:4) 4 이런 일을 한 것이 누구냐? 한 처음부터 시대마다 사람을 불러 일으킨 것이 누구냐? 나, 야훼가 이 일을 시작하였다. 마지막 세대에까지 이 일을 끌어 나갈 것도 바로 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역사를 결정하였느냐? 처음에도 나, 주가 거기 있었고 나중에도 나, 주가 거기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어제도 있었고 나중에도 있는 분으로 묘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묘사가 어떤 구절에 붙어있는지 보면 왜 요한 이 이 구절들을 인용해서 은혜와 평화를 설명하려 했는지 금방 알 것입니다.
(이사41:1-4) 1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아, 조용히 내 말을 들어라. 너희 부족들아, 나의 논고를 끝까지 들어라. 내 말이 끝나거든 썩 나와서 할 말을 하여라. 어디 법정에서 대결해 보자. 2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는 자를 동방에서 일으킨 것이 누구냐? 그에게 민족들을 넘겨 주고 제왕들을 굴복시킨 것이 누구냐? 그 칼에 모두가 가루처럼 부서지고, 그 활에 모두가 검불처럼 흩어진다. 3 평화의 행군 앞에 적군은 쫓기니, 그의 발은 흙에 닿을 짬도 없다. 4 이런 일을 한 것이 누구냐? 한 처음부터 시대마다 사람을 불러 일으킨 것이 누구냐? 나, 야훼가 이 일을 시작하였다. 마지막 세대에까지 이 일을 끌어 나갈 것도 바로 나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셨는지를 설명하시고 ‘그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하면 바로 구약의 이런 구절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그렇게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하느님께서 지금 어려움에, 핍박에 처해 있는 우리도 분명 건져내실 것이다’하고 승리를 확신하고 그 분의 그러한 은혜 로 말미암은 평화를 찾도록 요한은 의도한 것입니다. 한군데 더 보겠습니다.
(이사44:6) 6 이스라엘의 임금, 그의 구세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시작이요, 내가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
하느님께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난 어제도 있었고 이제도 있고 나중에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구절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보세요.
(이사44:1-5) 1 '이제 들어라, 나의 종 야곱아 내가 뽑아 세운 이스라엘아.' 2 너를 만드신 야훼, 너를 모태에 생기게 하시고 너를 도우시는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나의 종 야곱아 내가 뽑아 세운 여수룬아. 3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 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 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 4 그들은 물 가운데 난 풀처럼 자라리라. 시냇가에 선 버들처럼 크리라. 5 자기가 야훼의 것임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곱의 후손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손에 '야훼의 것' 이라고 문신을 새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후손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궁극적인 참 복을 내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말미에 하느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난 처음이요 나중이다’ ‘어제도 있었고 지금도 너희와 관계하며 나중에도 오직 나만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다른 신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불변하시는 역사의 하느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당신의 신실하신 언약을 한 번도 실패치 않으시고 이루신 분이시고 이루고 계신 분이시고 앞으로 이루실 분이시라는 것을 요한은 교회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화를 잃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 가나안, 바빌론 그 어떤 대적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 어떤 대적도 하느님 백성들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하물며 로마 일까보냐?’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그 마귀의 세력은 지금은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곧 지리멸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을 보면서 실망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그 역사의 하느님을 보시라는 것입니다. 어제도 계셔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던 하느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가시고 계시며 장차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확신하여 그 은혜로 말미암는 평화를 누리라고 사 도 요한은 편지의 시작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를 보면 ‘호온 호엔 엘코메노스’입니다.
(1)‘이제도 계시고’를 의미하는 ‘호온’은 헬라어 be동사인‘에이미’의 현재분사입니다.
그 뜻은 현재도 물론 계시지만 계속하여 계시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하느님의 존재성은 영원성을 지니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2)‘전에도 계시고’를 의미하는 ‘호엔’은 ‘에이미’ 동사의 미완료 시제입니다. 미완료 시제라는 것은 그 계신 상태가 언제 끝나 는지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과거의 알 수 없는 시점부터 계신 그분이 지금 현재 도 계속하여 존재하시는데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미완료 시제라는 것은 과거에 시작에 서 끝, 결과를 기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단어도 역시 하느님의 영원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장차 오실 이’로 번역이 된‘엘코메노스’는 ‘오다’라는 단어인‘엘코마이’의 중간 태 현재분사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뜻은 ‘지금도 오시고 계신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하느님을 단순히 미래에 영원히 존재하실 분으로 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영원히 미래에도 존재하실 분이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영원한 하느님은 영원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의 복을 가지고 현재로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요한묵시록을 읽는 그 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현재’ 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현재 역동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영원한 하느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순으로 배열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 이렇게 현재, 과거, 미래의 순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울러 성경은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고난과 고통과 환난을 이길 뿐 아니라 그렇게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그 온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자 하느님은 반드시 실패치 않으시는 분이시므로 나중에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과 기쁨과 평화를 우리는 지금 차용해서 미리 맛볼 수 있다고, 그것을 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묵시22:5) 5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금 이 땅에서도 우리는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묵시20:6)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 그들에게는 둘째 죽음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제가 되고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을 할 것입니다.
천년동안은 교회 시대, 지금 교회인 여러분이 사는 이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이 왕 노릇하고 계세요? 왕은 무슨 왕이에요? 맨 날 직장 상사한테 터지고, 거래처 사람들에게 욕이나 먹고, 부자들에게 아첨이나 하고 그런 삶을 살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더러 왕 노릇하는 자들이라고 그래요.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그러나 그 왕 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 왕은 이 세상에 싸우러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떠한 행동을 하시던 간에 그 모든 순간에 그 분은 메시야의 신분을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순간을 메시야로 사셨습니다.
그 분은 그 일을 위하여 그의 모든 권세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는 실패한 메시아로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왕이셨습니다. 우리가 왕 노릇 못하고 있는 것이 왕도와 패도를 혼동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패도라는 것은 도전하여 빼앗는 것, 승리를 쟁취하고 목적을 탈취해 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을 패도라고 합니다. 그것은 도전자 일 때의 삶입니다. 왕도는 이미 왕으로서,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관용과 자비를 가지고 이웃들에게 베풀고 포용하고 감싸는 것 이 왕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왕 노릇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고 천국에서도 그런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천사가 말 안 들으면 주리를 틀고 심부름 안 하면 옥에 가두는 그런 왕 노릇이 아닙니다.
(요한17:9-18) 9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10 나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내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11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 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3 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 16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17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기도하시기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다 가신 그 모습 그대로 이 땅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모습 그대로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 그 모습으로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군사적으로 보잘 것 없으셨지만 그가 왕이셨던 것 같이 여러분이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보여 진다해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사신 그 삶을 살아내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왕 노릇하고 계신 것입니다.
묵시록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운명 지어진 그 영광과 기쁨과 승리와 평화를 ‘삶의 내용으로, 과정으로 누리고 있는가‘ ’믿음으로 지켜내고 있는가‘를 확인해서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성경의 그 확실하고 명확한 언약을 마음에 새겨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어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묵시록이 기록된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일곱 영, 성령 하느님으로부터, 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는 어떠한 은혜와 평화를 사도 요한이 설명하려 하는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사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