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④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묵시2:18-29)
18 티아디라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불꽃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지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 말씀하신다. 19 '나는 네가 한 일들을 잘 알고 있고 네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네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20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며 내 종들을 잘못 가르쳐서 미혹하게 했고 음란한 짓을 하게 했으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다. 21 나는 그 여자에게 뉘우칠 시간을 주었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음행을 뉘우치려고 하지 않는다. 22 이제 나는 그 여자를 고통의 침상에 던지겠다. 그리고 그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도 뉘우치지 않고 그와 같은 음란한 행위를 계속한다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버리겠다. 23 그리고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각각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 24 그러나 티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여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비밀을 배우지 않은 나머지 사람 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으니 25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단단히 간직하고 있어라. 26 승리하는 자, 곧 나의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자에게는, 여러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 27 그는 쇠지팡이로 질그릇을 부수듯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28 이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로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승리하는 자에게는 내가 샛별을 주겠다. 귀 있는 29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버가모나 이집트 등이 전쟁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지나게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의 침략을 많이 당했던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안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돌파구는 상업을 통한 부의 축적 뿐이었습니다. 로마가 그 작은 두아디라까지 도로를 낸 것은 두아디라가 이렇게 상업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오로가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만났던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사람이었습니다. 자주색, 빨간색은 지금도 염색이 힘든 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벌써 그런 염색 업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드는 기술과 봉제업, 그리고 옷에 부착하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과 그런 것을 다루는 도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의 제련 기술도 발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한 곳에는 당연히 상업 조합이 생겼고 그 조합마다 각자 섬기는 수호신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수호신을 섬기는 무당들, 제사장들이 많았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조합들이 벌이는 축제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 이교적 신앙의 모습이 많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먼저 18절을 보겠습니다.
18 티아디라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불꽃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지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 말씀하신다.
각 교회에 주시는 편지의 서두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묘사는 항상 그 내용과 관련이 있었지요? 두 눈이 불꽃같고 발이 주석 같다고 하는 것은 심판과, 심판 속에서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고 권세를 상징한다고 했습니 다. 그러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내용은 한 교회 안에 검은 색과 흰색 두 종류의 신앙인 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가는 자들은 구원에 이를 것이고 교회 안에서 사탄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시고 내용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지금 뭔가 혼날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게 어떤 내용인지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요, 19절을 먼저 보시면
19 '나는 네가 한 일들을 잘 알고 있고 네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네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거기서 네 ‘한 일’이라는 단어와 나중‘행위’라는 단어가 ‘엘곤’이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work’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나는 네 행위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런 뜻입니다. 어느 교회하고 대조가 됩니까? 에베소 교회와 대조가 되지요? 에베소 교회는 처음 행위를 버렸다고 혼이 났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오히려 나중행위가 더 많았다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 무슨 의미라고 했지요?
에베소서 1-3장까지는 복음을 설명하는 교리 부분이고 4장부터가 그 복음을 근거로 한 행위를 진술하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그 3장까지의 내용이 없는 껍데기뿐인,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지 않은 겉만 번드르르한 열심들만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에 근거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교회에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20절부터 함께 보겠습니다.
(묵시2:20-23) 20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며 내 종들을 잘못 가르쳐서 미혹하게 했고 음란한 짓을 하게 했으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다. 21 나는 그 여자에게 뉘우칠 시간을 주었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음행을 뉘우치려고 하지 않는다. 22 이제 나는 그 여자를 고통의 침상에 던지겠다. 그리고 그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도 뉘우치지 않고 그와 같은 음란한 행위를 계속한다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버리겠다. 23 그리고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각각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좇아 행음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셨다면 지금 묵시록2장 20절에서 23절은 열왕기서의 이세벨과 엘리야의 대결의 결과를 보는듯한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이세벨이 나오고 우상을 섬기게 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 회개를 하지 않았다고 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에 던지겠다고 하고 그 자녀들을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엉터리 왕, 아합의 아내입니다.
원래 두로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그의 아버지 엣바알의 이름의 뜻이 ‘baal with us’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god with us’를 흉내 낸 말이지요. 이세벨은 그 바알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바알의 예언자로 열심히 이교 사상을 가르치고 바알 신앙을 전파했습니다. 하느님은 엘리야를 시켜서 이세벨의 수하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을 다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협박했습니다. 결국 이세벨은 예후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개의 먹이가 되었고 그의 아들들 70명도 도륙을 당했습니다. 내용이 거의 같지요? 만일 두아디라 교회에서 그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바로 그렇게 처참하게 심판해 버릴 것이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훤히 꿰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은 금방 그 의미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왕비였을 뿐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이교 예언자였습니다.
(왕하9:22) 22 요람이 예후를 만나자마자 물었다. '예후 장군, 잘 되어 가오?' 그가 대답하였다. '네 어미 이세벨이 우상을 섬기며 음란을 피우고 밤낮으로 마술이나 일삼고 있는데 잘 되어 가느냐가 다 무슨 소리냐?'
이세벨이 마수를 행하던 자였다고 하지요? 여기서 이세벨이 행했다고 하는 ‘마술’이라는 단어 ‘케쉐프’‘witchcraft, 입니다.
(출애7:11) 11 파라오도 에집트의 현자들과 요술가들을 불러 들였다. 그 에집트의 마술사들도 마술을 써서 같은 재주를 부렸다.
애굽 요술가라고 번역한 단어가 바로 ‘케쉐프’입니다. 애굽의 신을 섬기던 애굽의 예언자들이 었습니다. 이세벨은 그렇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마술을 행하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세벨을 ‘자칭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이세벨의 가르침에 넘어간 자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이세벨이 이스라엘에 끌고 들어 온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교신앙이지요. 갈멜 산에서의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의 종교 행위를 보면 그게 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왕상18:26-29) 26 그들은 준비한 황소를 받아 잡아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오, 바알이여, 대답하소서.' 그러나 대답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 예언자들은 자기네가 만든 제단을 돌면서 절뚝거리는 춤을 추었다. 27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말하였다. '바알은 신이니까, 더 크게 불러 보아라.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지도 모르지. 외출중인지 아니면 여행중인지 혹은 잠이 드셨는지도 모르니 어서 깨워 보아라.' 28 그들은 더 크게 소리쳤다. 자기네 의식을 따라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피까지 흘렸다. 29 한낮이 지나 제사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신접한 모습으로 날뛰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커녕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없었다.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이 그들의 신을 부르며 (1)단 주위에서 뛰놉니다.(2)그리고 큰소리로 그들의 신을 부르고 (3)자해를 합니다.(4)그리고 진언을 하지요. 두아디라 교회에 그런 이교적 행위들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날 교회들에 그것 이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 보자구요.
(1)먼저 그들이 단 주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하는 대목을 보면, 그들은 제사를 축제처럼 드렸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축제처럼 드리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가끔 ‘예배는 잔치’라는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예배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잔치는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을 위한 잔치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을 높이는 잔치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가 내가 즐겁고 내가 기쁘고 내가 위로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나를 즐겁게 해줄 멋진 밴드도 있어야 하고 드라마도 있어야 하고 멋진 멀티미디어도 첨가되어야 하고 지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교회는 회중들의 그러한 요구를 맞춰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여러분을 위로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예배 시간을 통해 여러분의 죄가 드러나서 얼굴이 붉어지셔야 합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예배 시간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눈물도 흘리셔야 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작은 우리가 드러나고, 아울러 하느님의 그 크심이 드러나서 그 하느님 앞 에 압도되어서 ‘헉’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경외감을 느끼셔야 합니다. 환갑잔치 돌잔치하고는 다른 잔치입니다. 돌잔치에 가보면 정작 주인공인 아기는 방에서 울고 있고 놀러온 사람들이 주인공인 그런 잔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회중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배를 환갑잔치, 돌잔치처럼 이벤트화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날 교회들의 모습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드럼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왜 드럼을 치느냐를 고민해야 합니다. 밴드를 이용해서 듣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라면 당장 다 갖다 버려야 합니다.
세련된 성가를 부르는 것이 앉아있는 사람들의 귀를 update하기 위한 것이라면 당장 집어치워야 합니다. 어떤 악기를 가지고 어떤 멜로디와 리듬의 찬양을 하는 것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아노가 교회에 들어오는데 100년이 걸린 것 아십니까? 피아노는 선술집에서 접대부들이 노래하고 춤 출 때 사용하는 악기라고 교회 지도자들이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고요. 그런데 지금 피아노 안쓰는 교회 있습니까? 어떤 악기를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 찬양하고 왜 예배하는가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 ‘랩’으로 찬송가를 불러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헤비메탈 그룹이 와서 찬양 반주를 하면 어때요? 그러나 시대의 조류를 따라,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배를 자꾸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책망 받았던 바로 그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인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큰 소리로 그들의 신을 불렀다고 하지요? 큰 소리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목소리를 크게 해서 신을 부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면 집중도 되고 좋은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큰 소리로 부른다는 것은 그 신이 살아있다는 확신이 없어 조바심을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만들어 낸 신이라는 말입니다. 조바심이 나서, 그리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여러분이 기도 할 때 소리를 지른다면 그것은 바로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져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그 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신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소문으로, 풍문으로 들은 종교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중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십니까?
(3)세 번째로 자기의 요구가 들어지지 않으니까 몸을 상하게 합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어머니들은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도 새벽에 일어나서 자기 소원을 들고 장독대에서 치성을 드리던 분들이었습니다. 그걸 교회에 와서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렇게 새벽에 잠도 안자고 기도하는데 설마 하느님이 외면하시겠어?‘이런 식의 자해 기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밥까지 굶으면서 기도하는데 하느님이 안 들어주시겠어?’ 그건 자해입니다. 40일 100일 1000일 작정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불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도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1000일 기도가 아니라 평생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자해를 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그런 것이 바로 이세벨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4)네 번째로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진언을 합니다. 진언이라는 것은 히브리 말로‘나바’라고 하는데 그 말은 ‘frantic prophesying’ ‘미친 듯한 예언‘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도 예언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는 자들의 예언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풀어서 해석하여 전해 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나바’는 그야말로 미친 듯한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께 개인적으로 특별 계시를 받아서 예언을 한다고 하는 수많은 예언자들은 모두 이 ‘미친 듯한 예언’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속지 마세요. 보세요. 이 이세벨의 가르침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 왜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교적 신앙에 빠지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신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갈멜 산 위에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의 제단과 엘리야의 제단이 똑같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제단은 뭔가 다릅니다.
(왕상18:30-35) 30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자기 앞으로 다가오라고 말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다가 오자 그는 허물어진 야훼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엘리야는 일찌기 야훼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신 야곱의 열 두 아들들에게서 나온 지파의 수대로 돌을 열두 개 모았다. 32 엘리야는 그 돌 열 두 개로 야훼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는 곡식 두 가마 정도 들어 갈 만큼 큰 도랑을 팠다. 33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송아지를 잡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나서 물을 네 동이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34 그는 그렇게 한 번 더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세 번을 붓자 35 물이 제단 주위로 넘쳐흘렀고 옆 도랑에 가득 괴었다.
야곱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돌 위에 제물이 쪼개져 올려지고 거기에 물이 부어져 물이 넘쳐흐릅니다. 그 제단이 모조리 불살라지자 비가 오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의 제단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스라엘의 아들 (12지파, 교회)를 품에 안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백성들, 남은 자들을 품에 안으시고 쪼개져서 죽으셔야 비로소 영적 해갈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우리 주님은 언제나 영적 이스라엘, 교회를 품고 계십니다.
(출애28:8-9) 8 에봇을 잡아 맬 관대는 한 솜씨로 에봇과 같은 감인 금실과 자주빛 털실과 붉은 빛 털실, 진홍빛 털실, 가늘게 꼰 모시실로 짠 천으로 만들어 에봇에다 한데 붙여라. 9 너는 홍옥수 두 개를 구해서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라.
대 제사장의 옷 에봇 위에 매는 띠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집니다. 에봇 위에 입는 흉패를 한 번 볼까요?
(출애28:21) 21 이스라엘의 아들이 열둘이니 이 보석들도 그 이름 수 대로 하고, 보석 하나하나에 열두 지파의 이름을 인장반지를 새기듯이 새겨 넣어라.
묵시록 21장에 참 성전인 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묵시21:10-12) 10 그리고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 두 대문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에는 천사가 하나씩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그 품안에 야곱,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12지파, 교회를 품고 계십니다. 그 교회를 품고 그 교회가 당해야 할 심판을 모조리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부어 주시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고전10:4) 4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제47:1) 1 나는 다시 그분에게 이끌리어 성전 정문으로 가 보았다. 그 성전 정면은 동쪽을 향해 나 있었는데,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에서 뻗은 선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성전의 묘사입니다. 물이 흐르고 흘러서 넘칩니다. 하늘의 참 성전의 모형인 에덴은 어떻습니까?
(창세2:10) 10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졌다.
요한묵시록의 완성된 성전의 모양을 볼까요?
(묵시22:1-2) 1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2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과의 대결은 바로 그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참 해갈을 얻게 되는 하느님의 백성들과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어 내어 자기들의 요구만 열심히 빌어 대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 즉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심판 받을 자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모든 종교행위는 다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의 행위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아십니까? 그 예수님을 근거로 여기 나와 앉아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엉터리 신을 예수라 부르며 교회 안에 섞여있는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입니까? 만일 여러분의 종교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그 행위를 카운트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23절의 말씀처럼 마지막 날에 그 분이 여러분의 행위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시기 전에 먼저 나는 왜 이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가를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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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두아디라 교회를 좀 먹고 있던 이세벨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고 책망 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네 나중 행위가 더 많다’라고 칭찬을 받았던 두아디라 교회에 그렇게 전혀 다른 이교 적 신앙 행 위를 하고 있던 자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를 것이 없지요?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꼭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한 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근거로 한 행위이고, 다른 쪽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없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종교 행위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진짜 목적은 자기의 세상적인 유익을 위해, 자기의 배를 위해 엉터리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신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죠.
(필립3:18-19) 18 내가 벌써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 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로마16:17-18) 17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배운 교훈과는 달리 남들을 분열시키고 죄짓게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18 그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뱃속을 채우고 있으며 그럴 듯한 말과 아첨하는 언사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당 안에서 자기 배를 위해 하느님을 우상화 시켜놓고 섬기는 자들을 우리는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 배만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까? 심지어 성당에서도 자기의 필요를 따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신을 하느님이라 이름을 붙여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합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인간을 절대 홀로 살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께 절대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을 쫓아내 버렸고 인간은 그 때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문명과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의 행복을 좇고 스스로를 지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타락한 카인의 후예들이 인류 문명의 조상으로 묘사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4:16-22) 16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17 카인이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애녹을 낳았다. 카인은 제가 세운 고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애녹이라고 불렀다. 18 애녹에게서 이랏이 태어났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므후야엘은 므두사엘을, 므두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 라멕은 두 아내를 데리고 살았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실라였다. 20 아다가 낳은 야발은 장막에서 살며 양을 치는 목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 유발은 거문고를 뜯고 퉁소를 부는 악사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실라가 낳은 두발카인은 구리와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가 되었다. 두발카인에게는 나아미라는 누이가 있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이 이렇게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스스로를 지키려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때때로 자기들 힘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현상이나 사건들을 볼 때 즉, 지진이나 폭풍이나 홍수나 일식이나 월식이나 죽음 같은, 자기 힘으로 control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볼 때, 그들이 하느님과 완전히 단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힘을 가진 어떤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때 마다 인간들은 하느님이 아닌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들을 보호 해 줄 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만을 위할 줄밖에 모르는 인본주의 아래서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들은 아주 인간적입니다. 그러한 한 예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 신화를 읽거나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제우스, 아폴로, 헤라, 포세이돈, 헤라클레스 같은 신들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 신들은 우리 인간들처럼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시기하고 사랑에 빠지고 실연을 당하고 그럽니다. 그들이 인간과 다른 것은 아주 강한 힘이 있다는 것과 올림푸스 산에서 ‘nectar’라는 영원히 죽지 않는 술을 마셨다는 것 정도만 다릅니다. 그래서 그 신들은 인간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너희들은 신을 존경하고 복종하되 본받지는 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신들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 엄청난 힘’만을 소유한 ‘질투도하고 시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하는 괴물들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무당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달래기 위해 눈물겨운 치성을 드립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의 문패를 단 이단들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행과 전도를 합니까?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교회 성당 안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엄청난 힘만을 소유한 정신 연령 20세의 하느님을 만들어 놓고 얼마나 그 신을 조롱합니까? 그 신은 조르고 조르면 언젠가 고집을 꺾고 자기의 말을 들어 줄 거라 생각합니다. 평소에 그 신을 잘 달래놓지 않으면 그 신은 언제든지 자기의 삶에 내려와서 깽판을 부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일 성수도 잘하고 헌금도 열심히 해 주고 때 맞춰 회합도 열심히 가주는 그런 엉터리 신앙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 하느님 머리 위에 올라서서 자기의 계획과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당신은 당신이 가진 힘으로 나를 열심히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는 완 성 된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신앙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구약에 보면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스라엘도 계속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신을 만들어 냅니다.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을 한번 보겠습니다.
(출32:1-4) 1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에짚트에서 데려 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딸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 하고 대답하자 3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짚트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이지요?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쉽게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어 내는 존재인지를 너무나 확연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告했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율례를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그랬더니 백성이 이구동성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출애24:3-7) 3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야훼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자세히 일러 주자, 온 백성은 입을 모아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모세는 야훼의 말씀을 다 기록한 다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밑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표시하는 돌기둥 열두 개를 세워 놓았다. 5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중 몇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야훼께 번제를 올리게 하고 수송아지들을 잡아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다. 6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받아 항아리에 담아 놓고, 그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7 그리고 나서 계약서를 집어 들고 백성에게 읽어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 하고 다짐하였다.
보세요, 이렇게 맹세하고 딱40일 만에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낸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풍요의 신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의 형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기들의 풍요를 위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간에 시나이산 위에서는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이러한 계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출20:3-5)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하느님께서 계명을 주시는 그 시간에도 자기를 위한 신을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다른 어떤 죄보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러한 우상을 만들어 내는 자들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하느님은 물질과 공간 속에 갇혀 계신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시간 속에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물질이라는 두 영역 속에서 살아갑니다. 제한된 이성의 인간은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시간에 대해서 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시간은 단지, 그것이 흘러가면 물질이 늙어지고, 훼손되고, 죽음으로 향한다는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시간은 인간에게 두려운 영역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공간과 물질 속에 숨는 것입니다. 마치 이 공간과 물질이 전부인양 시간을 외면하는 것이지요. 물질과 공간은 시간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사는 연습과 훈련을 하기 위해 공간과 물질 속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공간과 물질 속에서 행복을 찾고 심지어 공간과 물질로 하느님의 형상까지도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시간 속에 존재 하시기에 물질로 하느님의 형상을 공간 속에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질과 공간 속에서 감지되지 않는 하느님을 굳이 물질과 공간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죄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창세1:18-23) 18 이리하여 밝음과 어둠을 갈라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9 이렇게 나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20 하느님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 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1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23 이렇게 닷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자기들의 배를 위한 해결사로 하느님을 만들어 버리는 것에 대해 진노하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도 성당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하느님을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분명 하느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필립4:19) 19 한량없이 풍요하신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 가운데서, 그분의 풍성하심을 따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도우시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하느님이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은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목적은 그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출애 19:5-6) 5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6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줄 말이다.'
하느님은 온 만방에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해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가를 이스라엘의 삶을 통해 알려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께 돌아오게 만드시려는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그들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은혜의 방편을 목적으로 삼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그러한 것을 채워 주는 잡신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게 야훼든, 금송아지든 자기들의 필요만 채워주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은 일이 성당에서 벌어집니다. 하느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시키시는 것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그 길에 하느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자기들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어찌 바른 순례자이겠습니까? 우리는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데로 가는 순례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확한 목적지가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대학생들이 가끔 조국 통일을 기원하면서 국토의 최남단인 마라도에서 판문점까지 국토 순례를 합니다. 목적지는 판문점입니다. 그리고 그 순례의 목적은 통일 기원입니다. 목적과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그 20박21일의 대 장정기간 동안 숙박과 식사, 속옷, 신발 같은 것들이 본부로부터 공급이 됩니다. 그것은 그 대장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입니다.
사실 많이 불편합니다. 그렇지만 목적이 있고 가야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조금 맛없는 식사라도 불평 않고 먹습니다. 잠자리가 불편해도 참습니다. 그런데 그 대장정을 하는 사람 중에 ‘나는 그렇게는 못가, 잠은 꼭 five star 호텔에서 자야하고, 식사는 항상 갈비와 스테이크를 먹어야 하고, 신발은 항상 나이키를 신어야 한다고’ 늘 본부에 요구하고, 남들에게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조금만 더러워져도 세탁을 요구하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세요. 그 사람은 목적지까지 가는데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가는 길에서 뻐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국토 대장정의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국토 순례의 의미는 목적을 가지고 정해진 목적지까지 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의 인생은 ‘하느님나라’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짧은 여정일 뿐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은 영원 속에서 끝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삶을 바라보며 열심히 하느님의 뜻을 좇아 이 대 장정의 길을 성실하게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길에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다 공급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늘 본부에서 공급되는 지급품이 조금 불편하고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나는 나이키를 원했는데 본부에서는 그 것의 십분의일 가격인 ‘나이카’를 주었다고 해도 우리는 허허 웃으며 가야 하는 것입니다. 걷는데 불편하지 않으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까짓 신발짝이 아니니까요.
(마태6:24-34)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땅의 순례 길에서 필요한 것들만을 졸라대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들을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진짜 순례자인지 아니면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가짜 순례자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1)첫 번째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필요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가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하박국 3장의 (하바3:17-18) 17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18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17절의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비록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도 하느님만으로 기뻐 할 수 있는 자가 진짜 순례자입니다.
(2)두 번째로 여러분이 확인하셔야 할 것은 ‘내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느님을 안 그 첫날부터 매 일 매일 그 하느님을 알고 싶어야 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하느님을 추구하는 소원과 갈망이 있는가를 확인하셔 야 합니다.
(호세6:1,3,6) 1 '어서 야훼께로 돌아가자!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 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 주신다. 3 그러니 그리운 야훼님 찾아 나서자. 그의 정의가 환히 빛나 오리라. 어김없이 동터 오는 새벽처럼 그는 오시고 단비가 내리듯 봄비가 촉촉이 뿌리듯 그렇게 오시리라.' 6 내가 반기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재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 다오.
(베후3:17-18)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은 이것을 미리 알고 무법한 자들의 속임수에 빠져 들어 가 자기의 확신을 잃는 일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8 여러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또 그분을 앎으로써 계속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왜 우리는 하느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언제든지 우리의 욕심을 투사해서 스스로 신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느님을 알아 가는 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정확히 알아야 엉뚱한 신 만들어 놓고 치성 드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전래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가 장에 가시면서 요즘 늑대가 마을에 출몰해서 아이들을 잡아먹는다고 하니 엄마 이외에는 절대 문을 열어 줘서는 안 된다고 신신 당부를 하고 가십니다. 어머니가 장에 가시자 어김없이 늑대가 찾아왔습니다. 늑대는 밖에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이들이 묻습니다. ‘누구세요?’ 늑대가 대답합니다. ‘나다, 엄마다’ 아이들은 그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늑대는 엄마의 목소리를 연습해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문밑으로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역시 늑대의 발과 엄마의 손의 차이를 아는 아이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늑대가 흰 밀가루를 묻혀서 엄마의 손처럼 꾸몄습니다. 늑대는 참으로 집요합니다. 아이들을 잡아먹겠다는 일념으로 끝까지 덤빕니다. 그 때 아이들이 엄마와 늑대의 구별을 잘 못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금방 문을 열어 주었겠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에 대해 정말 잘 알고 계십니까? 마귀가 아버지 흉내를 내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정확히 구별해서 문을 안 열어줄 그런 분별력이 있으십니까?
오늘날도 이세벨이 발람이 니골라당이 끊임없이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거짓 가르침에 절대 문을 여시면 안 됩니다. 더욱더 긴장하시고 더욱더 진지해 지세요. 혹 이 다음에 저 천국에서 지옥을 내려다보며 ‘신부님, 형제님, 자매님 왜 거기 계세요?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왜 거기서 그렇게 타고 계세요?’ 이런 슬픈 해후가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가르침인 그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세벨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여 버리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나중에 고통의 침대, 환난의 침대, 심판의 침대에 던져지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의 신앙을 재확인하세요. 하느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정말 바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혹시 나는 이기적인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성당 안에서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를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여러분의 신앙을 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