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묵시11:7-13)

2018. 10. 2. 오전 6: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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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묵시11:7-13)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그 짐승이 올라 와서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할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11 사흘 반이 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셔서 그들은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리고 그 두 예언자는 자기들을 향해서 '이리로 올라 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예언자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13 바로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그 지진 때문에 사람이 칠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두 증인, 교회가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보고 크게 기뻐합니다. 장사도 지내주지 않습니다. 죽어 있는 자 에게까지 모욕을 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서로 예물을 주고받으며 교회의 죽음을 축하합니다. 그 기간이 사흘 반이라고 하지요? 사흘 반하면 생각나는 것이 우리가 지난번에 배운 삼 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 1260, 42개월이죠.

그런데 왜 삼 년 반도 아니고 42개월도 아니고 1260일도 아니고 사흘 반이라는 표현을 했을까요? 요한묵시록을 잘 보시면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기간으로서의 교회시대'를 표현할 때는 삼년반이라든지 사흘 반처럼 짧은 기간처럼 느끼게 하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겉으로 보기에 고난으로 보이는 그 시간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하느님을 나타내는 영광스러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영광스러운 왕 노릇으로서의 교회시대 기간을 나타낼 때는 42개월 1260일 이라는 긴 시간처럼 느껴지게 하는 숫자를 씁니다. 둘 다 같은 기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표현 한 것이죠. 그렇지만 성경은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곧 끝난다는'위로를 주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흘 반 동안, 교회 시대 내내, 우리의 인생 내내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고 세상이 보기에는 무참히 밟히는 모습으로 살 게 될 것입니다. 8절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에서 함께 못 박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나고 하느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우리는 우리 두 발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게 1112절 말씀이죠? 그렇게 우리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에 세상이 우리를 구경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구경하다''떼로룬타스''인식하다''바르게 알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에서야 ', 저 사람들이 맞았네' 하고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불쌍히 여깁니까? 이렇게 좋은 크리스마스 휴일에도 교회에 나가야 하고, 그들이 생각할 때 있지도 않은 천국과 하느님을 믿느라고 이렇게 수고하는 우리가 얼마나 우리가 불쌍해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우리가 맞았다는 것을 떼오레오’ ‘정확하게 인식하게 될 날이 꼭 올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큰 성 길,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 반 동안 죽어 있다가 하느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살아나서 두 발로 일어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 성도의 삶이 누구의 삶과 흡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똑같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해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아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시는 거 힘드시죠? 여러분은 지금 그분의 고난 그분의 수난, 그 분의 죽음 그리고 그 분의 부활을 함께 겪는 겁니다. 요한 묵시록이 계시하고 있는 성도의 삶을 정말 그대로 살아내고 계 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그렇게 성도가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집니다. 여기서 십분의 일이라는 것은 십일조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구약에 나오는 십일조 가 뭡니까? 십의 일은 하느님 것이고 나머지 십의 구는 내 것이라는 뜻입니까? 아니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전부 하느님이 주신 것이므로 내 것은 다 하느님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애굽에서 장자가 죽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라는 것은 남자를 대표하는 것이고 남자는 한 가족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가 죽고 장자가 살았다는 것은 악의 세력 전체가 죽고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구원을 얻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졌다는 것은 모든 것은 다 그렇게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대접 재앙이 남아있기 때문에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를 동원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7,000이 죽는다는 말은 열왕기서에 나오는 엘리야의 7,000’이 역인용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느님 저 혼자 남았습니다.’라고 부르짖었을 때 하느님께서 남은 자 7,000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딱 7,000명이 남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수인 7과 많은 수를 나타내는 1,000이 곱해진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모든 자를 나타내는 숫자가 7,000입니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멸하시는데 7,000이 죽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멸망하시기로 작정 한 모든 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멸망 한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대접 재앙이 남아있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7,000이라는 숫자를 동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두 증인, 성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자, 엄청난 재앙에서도 돌이키지 않았던 남은 자들이 하느님께 돌아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13절입니다. 여기서 남은자’ ‘호이 로우토이9장에서도 똑같이 쓰였던 단어입니다.

(묵시9:20-21) 20 이런 재앙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자기들이 지은 죄를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마귀들을 경배하고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경배한 것입니다. 21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행한 살인과 마술과 음행과 도둑질에 대해서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9장에서의 호이 로이토이는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1장의 호이 로이토이는 두 증인의 복음 증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인간은 재앙으로, 혹은 기적 같은 것으로 절대 회개하고 하느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원어 성경을 잘 보면 이렇게 성경의 단어 선택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 두 증인의 삶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고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과 탐심과 세상 적인 기대는 큰 성 길에서 죽고 하느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삶, 그것이 바로 성도 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목적이 뭡니까? ‘복음 전파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 ‘그리고 그 나라가 완성되기 위한 복음을 받아 든 자들의 거룩이것이 하느님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 인이 사역을 마치고 승천을 하니까 회개하지 않던 자들이 회개를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갑자기 확 기분이 나빠지시는 분들 계시죠? 아니, 내 영광이 아니고 하느님 의 영광이야? 그럼 난 뭐야?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왜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왜 자기들이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정립하지 않고 막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생을 예수를 믿어도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이죠.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지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겁이 없어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이사43:7-12,21) 7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 백성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백성을 불러 모아라. 9 민족들이 벌써 다 모였고 부족들이 부름받고 모여 왔다. 그들 가운데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려 준 자가 있었느냐? 이런 일들을 앞질러 일러 준 자가 있었느냐? 증인이라도 있거든 내세워 증거를 제시하게 하여라. 무리가 듣고 수긍할 만한 증인이 있거든 말하게 하여라. 10 너희가 바로 나의 증인이다. 야훼의 말이다. 너를 뽑아 내 종으로 세운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요, 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다. 손으로 빚은 신이 나보다 앞서 있을 수 없고 후에도 있을 수 없다. 11 , 내가 곧 야훼이다. 나 아닌 다른 구세주는 없다. 12 내가 미리 말하였고 그 말한 대로 구원하였다. 이렇게 될 것을 일러 준 신이 나 말고 너희 가운데 있느냐? 너희가 곧 나의 증인이다. 야훼의 말이다. , 내가 곧 하느님이다. 21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보세요. 하느님께서 왜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습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독사’ ‘하느님의 영광이 뭐예요? 하느님의 속성과 성품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독사’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했지요?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하느님의 속성과 성품이 뭡니까? ‘사랑, 온유, 화평, 절제, 겸손과 오래 참음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는 자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하느님의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며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이 땅 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15:8)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마태5:16) 16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가 사랑과 온유와 겸손과 인내 같은 하느님의 성품, 착한 행실을 세상에 보여줌으로 해서 세상이 ,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저렇게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을 닮게 되는 것이구나.’ 라고 할 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내가 드러나면 망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하고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질그릇이고 그 질그릇 안에 들어 있는 보석 같은 하느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드러나는 데에 하느님이 도와 주셔야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정 반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세상 종교들처럼 그렇게 자신의 힘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의 힘과 능력을 키우기 위해 어떤 힘 있는 대상에게 도움을 청하는 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할 때 하느님의 강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교입니다.

(고후12:9-10)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내가 약할 그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가난하고 힘없고 능력 없는 것을 말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약하다는 것은 내가 힘 이 있고, 언제든지 그 힘을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쓸 수 있음에도 나를 위해 그 힘을 쓰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그 힘을 동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물리적인 힘이 있고 없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내가 부자이고 가난한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많이 배웠고 못 배웠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내가 나를 죽이고, 나의 힘을 죽이고 나에게서 하느님의 성품이 흘러나오게 하는 모든 행위가 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착한 행실입니다. 내가 내 능력과 소유를 힘으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만으로 살려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힘이 없고 약하게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약한 것입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저런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웃을 수 있지? 어떻게 저 사람은 저런 인간을 용서할까? 어떻게 저 사람은 저 원수를 사랑하는가? 저렇게 살아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나? 참 약해 빠졌구나.’

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어떻게 저런 모욕을 당하고도 인내하는가? 어떻게 저렇게 무시를 당하고도 저렇게 함박웃음을 짓는가?’‘돈도 없고 빽도 없는데다가 벨도 없구나. 참 약해 빠졌다이게 약한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런 평가를 들어내야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전부 손에 손을 잡고 추구하는 것이 뭡니까? ‘아닙니까? ‘이게 어딜 까불어. 나 그리스도인이야이리로들 가고 있습니다. 내가 힘을 써야 하느님 나라가 완성 이 될 거라는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열심히 힘을 내서 일을 하면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됩니까?

성경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탄의 검은 계절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도 그 것은 증명이 되고 있고요. 우리가 주의기도문을 외우면서 늘 기도하는 나라가 오시며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통치가 저에게 임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지요? 그 것은 우리가 열심히 힘을 내서 노력할 테니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해 주세요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탄의 검은 계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사는 교회를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처럼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분들을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여러분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분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삶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니 하느님께서 내 삶을 좀 이 끌어 주세요. 저는 하느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살겠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돌봐주시지 않으면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우리는 하느님을 돌 봐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내가 이번에 이러 저러한 것을 하려고 하니까, 저에게 힘을 좀 보태세요. 그래야 하느님 나라가 빨리 완성이 되지요이건 망발입니다.

(마태18:3-4) 3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우리 주님께서 정말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삶을 계획하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정말 하느님 앞에서 그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예레 1:5-7) 5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6 '!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7 야훼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열왕상3:7-8) 5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6 '!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7 야훼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이게 바로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 신자들의 자세입니다. 왜 신명기 7장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너희가 수효가 적은 연고로 내가 택했다고 하십니까? 하느님이 하느님의 목적을 위해 들어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죽인 약한 자들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힘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힘이 들고 어려워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니까 기쁘게 한다.’ 이 삶이 두 증인의 삶이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를 잊어 가는 것, 나의 자아를 죽여 가는 것, 시퍼렇게 살아서 기고만장하며 펄펄 뛰던 나를 하느님 앞에 항복시키는 것그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것이 성화이며 그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삶을 살다 가는 것입니다.

호세아를 보세요. 예언자였던 그가 창녀하고 결혼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네가 삶을 통해 보여 주라고 하시니까 자기의 소원과 기대를 접고 창녀를 죽도록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애를 낳고도 몇 번씩이나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는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까? 죽음이죠.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보세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의 상태를 네 삶으로 보여주고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게 하라고 하시니까 삼년 동안이나 발가벗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예레미야는 성전문 앞에 서서 예배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 너희는 모두 가짜다, 너희는 이곳이 야훼의 殿이다, 야훼의 전이다, 야훼의 전이다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나를 죽이고 하느님을 나타내는 삶,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신앙은 내가 소유한 지식이나 물질, 건강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소유가 많건 적건 간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비워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비우기가 쉬울까요? 적게 가진 사람이 비우기가 쉬울까요?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 가치관, 역사관, 인생관은 세상이 정의해놓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우리를 내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죽이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성품이 흘러나오는 훈련을 통해 하느님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민주의에 의해, 힘에 의해 전파된 복음은 전부 실패작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그렇게 확실하게 증명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그 비움의 삶을 완벽하게 보여 주실 모델을 한분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어린아이처럼 자기의 능력을 비우시고 하느님의 능력으로만 살다 가신 분이 누구세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했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본 자들은 아버지를 보았다이 삶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나를 본 자들은 내가 섬기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어렵죠?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가 할 시간이 없어요. 너무 바빠요.

여러분, 이런 생각 해보셨어요? ‘왜 예수님은 그냥 죽으시면 되지, 꼭 그렇게 무시당하고 배반당하고 수난을 받으셨어야 했나?’ 왜 그렇죠?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 우리가 꼭 고난을 통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도 되니까요. 왜 우리는 꼭 약 한 자의 모습으로 가야하는가?

(히브2:10) 10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셨다고 하지요?

(히브 5:7-9)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셨답니다. 이 구절들은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전에는 뭔가 부족한 분이셨는데 고난을 당하심으로 온전해지신 것으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런 분인가요? 아니죠? 만물이 그로부터 말미암고 만물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영원 전부터 완전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예수님께 시킨 사역이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뭡니까? 자신을 돌로 치려는 자들을 향해 사랑과 용서와 인내라는 하느님의 성품으로 대해 주신 것입니다. 그게 고난입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 원수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필립 2:5-11)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성품으로 세상에게 당했더니, 다른 말로 고난을 당하셨더니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더라.’ 이게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일이 온전케 되었다는 구절의 진의입니다. 어떠세요. 오늘 본문 요한묵시록 1113절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나타내는 것,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이 삶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아니, 구원받은 사람들에게서는, 두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서는 이 삶이 당연히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을 통해, 다른 이들이 살아나게 되는 삶, 그래서 나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통해 다른 이들을 구원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천국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인 교회라는 무리 안에서 한 지체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수고로 말미암아 다른 지체들이 이익을 보는 그런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장이 열심히 일을 함으로 해서 피가 돕니다. 간이 열심히 해독을 해야 몸이 삽니다. 다리가 열심히 움직여 줘야 갈 길을 갑니다. 나를 희생해서 다른 이에게 유익을 주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이 원리가 하느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하느님 나라의 원리를 열심히 연습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고가 있는 것입니다.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재앙이 세상에게는 심판이요 저주이지만 우리에게는 훈련의 도구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일곱 재앙들은 전부 우리의 거룩한 성품의 훈련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게 완성이 되어야 하느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거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묵시록 1장부터 11장까지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연결이 되십니까?

(이사53:2-5,10) 2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4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10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보세요. 예수님의 찔림과 예수님의 상함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그 수난의 삶을 주셨다고 나오지요? 왜요? 야훼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야훼의 뜻이 뭡니까? 하느님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 그것을 신약에서는 어떻게 표현합니까?

(데살전4:3) 3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과 온유과 용서와 겸손과 인내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요, 하느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요, 내가 살길입니다. 하느님은 그 방법으로만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키시겠다고 하셨고 우리는 그 자리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내가 매일 매일 죽노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오늘이 성탄절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날입니다. 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마구간에 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왜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는지 아시겠어요?

예후에게 깔아주었던 옷을 깔아주며, 유다 마카비에게 흔들어 주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리에게 세상의 힘을 줄 수 있는 힘 있는 왕이 되어 달라고 호산나, 호산나 외치던 그 사람들 앞에 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힘으로 완성되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했습니까? 그가 전쟁을 통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힘을 소유한 자가, 세상의 힘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은 평화의 왕샬롬솔로몬이 짓는 것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샬롬평강, 평화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의 거룩을 위해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주고 인내하고 하는 우리의 죽음에서 흐르는 피를 타고 전파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힘을 빼지 않으면 하느님은 절대 우리를 통해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의 통로로 쓰이는 것이지 거기에 우리의 힘을 보태는 사람들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평화를 빼앗아 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왜 인간의 삶에 크고 작은 전쟁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까? 인간들이 힘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강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내가 약해져야 합니다. 아니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마구간에 나시고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마구간과 나귀 새끼는 곧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꼴찌가 되면 평화가 옵니다. 내가 이기려고 하니까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면서 새빨간 거짓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안 죽었습니다. 죽으셔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질투하지 마시고 져 주세요. 시체들이 무슨 질투가 있고 경쟁이 있어요. 꼴찌의 평안을 느껴보세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꼴찌들의 평안,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실력이 없어서도 아닌 자발 적인 꼴찌의 평안, 그래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는 꼴찌들의 평안을 누리세요. 이 세상에 꼴찌의 모습으로 오셔서 꼴찌의 삶을 살다가 꼴찌들의 죽음 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닮아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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