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주를 두려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
(묵시15:1-4)
1 나는 또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각각 한가지 재난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재난은 최후의 재난으로서 하느님의 분노의 마지막 표현입니다. 2 나는 또 불이 섞인 수정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정바다 위에는 그 짐승과 그의 우상과 숫자를 가지고 이름을 나타냈던 그자를 이긴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거문고를 타며 3 하느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이렇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시여, 주님의 길은 바르고 참되십니다. 4 주님,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누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니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공정하게 내려졌습니다.'
우리는 천상의 하느님의 교회가 부르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에 관해 3절에 나와 있는 ‘전능하신 이, 만국의 왕이시여’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4절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출애굽기 15장을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는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의로우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애굽을 심판하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신 하느님을 높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로 노래를 마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묵시록 15장 3절과 4절이 정확하게 그 노래를 요약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모세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를 바로 그 노래의 앞장인 14장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출애14:27-30) 27 모세는 팔을 바다 위로 뻗쳤다. 날이 새자 제 자리로 돌아 왔다. 에집트인들은 물결을 무릅쓰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야훼께서 에집트인들을 바다 속에 처넣으셨다. 28 물결이 도로 밀려오며 병거와 기병을 모두 삼켜 버렸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바다에 들어 섰던 파라오의 군대는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2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너 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30 그 날, 야훼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에집트 군대로부터 건지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집트인들이 해변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자신들의 대적인 애굽 사람들이 그 홍해에 다 빠져 죽게된 그 심판의 자리에서, 자신들은 안전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이 양쪽으로 벽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홍해 바닷가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애굽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 이 모세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 홍해 바닷가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 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성령 하느님의 도우심을 통해 그 홍해 바닷가의 사건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우리의 대적들은 이미 결박을 당했고 그들은 가시적으로도 멸망해 버릴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도 유리 바닷가의 찬양을 “지금“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지금 여러분 앞에 엄청난 홍해가 가로 막혀 있는 분들이 계시죠?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가 똑같이 홍해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때때로 홍해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홍해가 저주와 심판의 바다가 되지만 여러분에게는 그 홍해가 구원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묵시록의 일관된 논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앞에서 울부짖었던 것처럼 우리의 앞길에 놓여 있는 그 홍해를 장애물로만 여깁니다. ‘난 이제 죽었구나, 왜 내 자식은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릴까, 왜 내 생활은 점점 더 빈곤해 질까, 왜 나의 병은 이렇게 더 위중해질까’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인생의 장애물처럼 보이지요? 홍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홍해에 여러분을 빠뜨려 죽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앞장을 서시고 그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그 홍해를 다 건너고 났을 때 이스라엘에게 그 홍해가 여전히 장애물이었나요? 아닙니다. 그 들이 홍해를 다 건너고 난 뒤에 는 그 장애물이었던 홍해가 바로 이스라엘의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저 홍해에다가 우리를 다 빠뜨려 죽이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홍해는 ‘우리의 대적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옛 사람, 옛 성품, 이런 것들을 죽이고 우리를 구원 하시는 하느님의 배려였구나.’ 하고 오히려 그 상황들을 허락하셨던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홍해를 통과하면서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경이로우심과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하느님의 두려우심을 배우게 되고 그 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홍해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배려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배우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은혜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홍해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홍해로 가게 되었습니까? 구름 기둥, 불기둥이신 하느님께서 끌고 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지 않고 그냥 종으로 계속 살았다면 굳이 홍해라는 장애물을 맞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홍해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잘 이겨내세요. 아니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가 맞다 면 이겨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끌고 가실 거니까요. 그리고 반드시 찬양을 받아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그 찬양의 내용 중에 ‘두려우신 하느님’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구원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그 분은 두려우신 하느님’이라는 찬양을 합니다.
(묵시15:4) 4 주님,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누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니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공정하게 내려졌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그 하느님을 정말 두려워하십니까? 아니죠? 왜 우리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의 힘과 권위를 인정하는데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대방이 정말 권위와 힘이 없거나 아니면 그 상대방에 대해서 전혀 지식이 없을 때 두려움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이 정말 권위가 없으신 분이십니까? 권세가 없으신 분이세요? 그런데 왜 여러분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그 분을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겁 없이 막 사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하느님보다 상위 권위에 올라앉아서 그 분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막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상위 권위가 없으면 사람은 스스로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해 주고 이끌어 줄 상위 권위자가 없었다면 여러분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 것 같으세요? 이가 하나라도 제대로 남아있을까요? 학교는 제대로 졸업하셨을까요?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여러분을 돌봐 주신 어떤 상위 권위자가 여러분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이 닦아라, 늦잠 자지 말고 학교는 꼭 가야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남의 것 훔치지 말라’ 그 분들이 이렇게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대부분은 감옥에 가 있거나 벌써 전염병 같은 것에 걸려서 다 죽었을 겁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이 닦는 것, 세수하는 것, 샤워하는 것 이런 걸 그렇게 싫어할 수가 없어요, 부모가 어르고 달래고 패면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조언하고 하지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절대 안 닦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상위 권위자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늘 최고 권위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게 속성 화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고후5:9-11) 9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서 주님 곁에 가 있든지 오직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만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10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우리를 사실대로 알아 주었으면 합니다.
정말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두려워서라도 막 못 산다는 것입니다. 두려워서라도 하느님을 기쁘게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두려움은 단순히 우리가 그 분을 ‘무서워한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의 상대방이 너무 크고 존귀하고 엄위 하셔서 그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프호베오’ ‘두려워 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죄를 짓습니까? “내가 나의 경쟁상대로 놓고 있는 어떤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아지고, 행복해 지고, 그로 말미암아 잘난 척도 좀 하고 싶고, 부러움을 사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은 의도“ 대부분이 그런 의도지요? 한 마디로 사람들에게 잘난 척 하고 싶어서 죄를 짓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죄인들은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자리에서 나를 자랑하고 싶어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고 위선을 떠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잘나 보이고 싶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말과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느라 하느님의 시선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살전2:4) 4 우리는 하느님께 인정을 받아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띤 사람으로 말하는 것이며,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1:10)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 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의 강론대 위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들이 이렇게 힘이 없어졌는지 아십니까? 어느 때인가 부터 설교자가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헌금해서 자기 월급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월급을 주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지옥엘 가건 말건 그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복 받는다, 부자 된다, 당신들 지금 잘하고 있다, 평안하다’ 해 주면서 사람들을 붙들어 두려는 시도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앉아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니까 설교의 내용도 점점 제한을 받게 됩니다. 이혼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이혼에 관한 설교를 못 합니다.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을 동원해서 탈세나 하고,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많은 돈을 벌어 교회에 큰돈을 헌금하는 원로가 있는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에 관해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자들이 점점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그런 설교를 하면 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표적 설교’라고 들고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설교자님이 날 들으라고 일부러 표적 설교를 했다 ’이렇게 분한 마음을 품고 혹시 교회를 나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설교자의 모든 설교는 ‘표적 설교’여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를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 설교를 들으시고 ‘오늘 우리 설교자가 날 들으라고 일부러 이런 설교를 했구나.’하고 분한 마음이 드셨다면 여러분은 설교를 잘 들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제 설교를 듣고 매주 찔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매주 ‘저 설교자는 왜 매주 나만 갖고 그래’ 라는 마음이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시고 하느님께로 여러분의 발길을 돌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당당히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영원히 지옥에서 태워 버리실 수 있는 천지의 주재 만국의 왕 우리 하느님을 두려워하십시오.
(마태10:28) 28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삶의 내용이 바뀝니다.
(고후7:1) 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약속을 받았으니 우리의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히브12:28-29) 28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차지했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도록 경건한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립시다. 29 사실 하느님은 태워 버리는 불이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나오지 않고 있다면,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혹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두려우신 하느님, 다음에 바로 붙어 있는 찬양의 내용이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라는 내용입니다.
(묵시15:4) 4 주님,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누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니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공정하게 내려졌습니다.'
여기서 ‘독사조’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유리 바닷가의 하느님의 백성들이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 하며 찬양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하고 찬양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고, 그렇게 살며, 또 그 사실을 찬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지 알고 있어야 우리가 지금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WBC야구 대회에서 4번 타자가 홈런을 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면 하느님이 영광을 받으시나요? 월드컵 축구에서 골게터가 결승골을 넣고 잔디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하면 그게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해서 그게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까?
하느님은 그 자체가 영광이요, 존귀함이요, 거룩이요,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들 그 분의 영광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면 그게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시면 그게 하느님께 영광 이 되겠습니까? 그럼 뭐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지점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 하느님의 영광의 내용을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하느님께서 영광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17:22)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영광의 내용은 무엇인가?
(에페1:11-12)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된 것, 즉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전에 읽은 요한복음 17장 22절을 잘 보면 우리 예수님도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다’라고 하시죠? 그럼 우리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예수님도 죄에서 구원을 받으신 건가요?
(딤전3:16) 16 우리가 믿는 종교의 진리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분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성령이 그분의 본성을 입증하셨으며, 천사들이 그분을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본래 의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성령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거죠?
(고후5:21) 21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죄가 되시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느님이 의롭게 만드시지 않으시면 영원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리로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사망에서 살리시고 그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이 예정하신 모든 하느님의 백성 들을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셨고 그 안에 들어있는 우리가 함께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영광을 받은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최초로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신 분이니까요. 그 분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순종’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신 유일하신 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분께 순종한 삶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바로 그 순종의 삶, 십자가의 삶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요한17:4) 4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필립2:5-12)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하느님이 영화롭게 만든 자들은 반드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오로는 필립보서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셨으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경주해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어느날 한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의 순간까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가 경주해 내야 하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5:1-2)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에는 세 시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는 것은 신분적이며 운명적인 차원에서의 시제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노력과 미래의 변화로 반드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전체 세 시제를 모두 합하여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이 현재에 손발을 움직여 경건을 훈련하고 미래의 소망을 향해 부단히 변해 가는 그 모든 모습 속에서 하느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목표지점은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목표지점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오늘을 분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교입니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 복음서 모두에 등장하는 유일한 사건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왜 그렇게 성경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아세요?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내용’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우리가 예수님께 많이 드리면 예수님은 몇 배로 갚아주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오 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좇아오는 수많은 무리를 향해 ‘너희가 그 기적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배가 부른 연고를 나를 좇는구나.’하고 한탄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지고 ‘당신들이 하느님 앞에 헌금하고 헌신한 만큼 하느님은 그 몇 배로 갚아 주십니다.’하고 설교를 하는 것은 정말 무식한 해석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거 아니라고 그렇게 명백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우길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 스스로 ‘그 건 너희 들 배부르게 해 주겠다는 게 아니었다.’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예수님은 그 오병이어가 가리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요한 6:47-58) 47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50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2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53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의 피를 마시고 살아나게 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관해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을 꺼내 놓자 예수님께서 축사를 하시고 그 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 들이 주님이 나누어주신 것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20,000명이 족히 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기적이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일 차로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를 열두 제자가 가지고 나갈 만큼 불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그 것을 받아 가지고 나가서 20,000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제자들이 동참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뿌려 하느님의 백성을 살려 내시는 그 구속사의 한복판으로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동업자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7절에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갖고 있는 본질 적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7절을 다시 보실까요?
(요한 6:57)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복음 6장은 1절부터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한 후에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설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술을 연이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예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권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미에 그렇게 나를 먹고 살아나게 되는 자들은 ‘내가 아버지 하느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그들도 나로 인하여 살게 된다고’말씀하십니다. 이게 키포인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하느님으로 인하여 산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라 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 인하여 사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은 ‘그 분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과 삶의 내용”들을 늘 하느님이 시키시는대로,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사셨다는 말입니다. (by the father, because of the father)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구원을 얻은 자들도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시키는 대로 그 분을 위해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오병이어의 키포인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혼자 빵과 물고기를 다 나누어 주시지 않고 제자들이 그 기적에 참여하여 빵 과 물고기를 나누어주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너희도 하게 될 것이라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구원을 받으신 분들이 맞으시다면 여러분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같은 모습의 삶을 사시게 됩니다. 수난과 고난 속에서, 다른 이들을 위 해 나의 가진 것을 다 잃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그 하느님의 성품을 나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 는 것입니다. 그 삶을 통해 여러분은 실제로 사랑과 평화와 온유와 절제와 인내와 겸손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14:12-14) 12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답니다. 어떤 일이겠습니까?
기적? 신유?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살아 돌아 온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 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냄으로 인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잘 안 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요구는 뭐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 17:18-19)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는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의 행복, 쾌락, 자랑 이런 것 위해 여러분의 시간을 허비하라고 이렇게 세상 속에 남겨 두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품을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셔야 합니다. 그게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며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뭔가 조금 부족합니까? 그래서 남은 고난을 우리가 함께 나누어서 가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 입니다.
그런데 왜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와 한 유기체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의 삶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난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뭔가 부족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든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교입니다.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 왕룽은 아주 가난하지만 순진하고 열심이 있는 농부였습니다. 올란이라는 못 생긴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그 아내가 워낙 성실하고 착해서 왕룽은 부모님을 모시고 만족한 삶을 삽니다. 그러던 중에 계속 흉년이 들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혁명을 맞게 되고, 혁명이 일어나면 으레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집을 털지요? 그 와중에 왕룽의 아내 올란도 부자 집에서 보물을 훔쳐 옵니다. 거지처럼 동냥을 해서 먹고살던 왕룽의 집은 갑자기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을 사들이고 대 지주가 됩니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움켜쥐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부자가 되자 순진한 농부 왕룽이 제일 먼저 한 것이 기생집 출입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죽을 고생을 다한 자기 아내를 두고 어떤 젊은 기생을 첩으로 데리고 삽니다. 결국 그 돈 때문에 왕룽은 귀한 아내를 잃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도 전부 고리 대금업자나 한량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경건의 훈련 없이 그런 세상 힘을 먼저 소유하게 되면 우리는 다 미친 짓 하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
(전도9:3) 3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을 당하는데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잘못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차고 넘쳐 얼빠진 생각을 하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제가 새벽 기도 나오기 전에 항상 우리 아이들 방에 가서 아이들을 꼭 안고 기도를 합니다. 그 중에서 빠지지 않고 하는 기도가 “하느님 우리 아이들 절대 부자 되지 않게 해 주세요”입니다. 오히려 가난 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피부로 느끼며 작은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평범한 사람들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이지 나의 자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아주 황당해했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황당함을 느낍니다. 예수를 수십 년간 믿었다는 사람들이 뭐 변한게 없어요. 뭐 많이 아는 것처럼 떠벌리기는 하는데 그들의 삶을 보 면 여전히 'Yap'입니다. 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분들입니다. 그 엄청난 신분을 잊지 마시고 바로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 그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선택하시고 행동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