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9) Union Christ (묵시1:9-10)
(세례 ‘밥티조’는 어떤 외부의 영향으로 영구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세례’ ‘밥티조’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 안에다 우리를 넣어버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보십니다. 성경은 복음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 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환난(시련)은 결국 희망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에 환난이 올 때 ‘아, 난 정말 그리스도인이구나.’하고 자랑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내면 세상은 그 꼴을 도무지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면 그들은 반성을 하거나 존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얕보고 더 밟아 버리는 세상의 힘의 원리로 우리 성도들을 대하기에 그 것은 우리들에게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아버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 됨의 유일한 근거는 바른 교리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하느님을 고백하는가? 그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묵시1:9-10)
9 여러분의 형제이며 함께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환난을 같이 겪고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같이 견디어 온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를 증언한 탓으로 파트모스라는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10 나는 주님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내 뒤에서 울려 오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8절까지 요한묵시록의 서론이 끝나고 요한은 본격적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2장부터 써내려 갑니다. 그전에 1장9절부터 20절까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합니다. 9절에서 요한은 먼저 교회에게 자기의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를 합니다. 이 것은 단순히 요한의 소개일 뿐 아니라 바로 ‘성도란 누구인가?’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본문9절에 있는 ‘예수와 함께’라고 번역이 된 ‘엔 크리스토’는 원래 ‘예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의 환난과 예수의 나라와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하면 생각나는 敎理가 바울 신학의 백미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christ’입니다. 이 ‘union christ’(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잘 이해하면 오늘 본문은 저절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해되지 않으면 이 요한묵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 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한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로마6:3-5) 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 부활을 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세례’를 이야기합니다. 세례에 대해서 잠깐 복습을 할까요?
여러분은 지금부터 물을 뿌리거나 물에 잠기는 세례는 다 잊으세요. 그러한 물세례 의식은 할례가 하느님의 백성의 표시이듯이, 성령 세례를 받은, 거듭난 자들의 상징적인 의식이며 선포일 뿐입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례 안 받고 죽으면 지옥 가느냐? 천만에요, 세례 안 받아도 하느님의 백성은 천국 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세례’ 라고 번역이 되는 헬라어의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밥토’ ‘물에 푹 담그다’라는 말과 성경에 나오는‘밥티조’ 라는 두 단어입니다. ‘밥티’“는 단순히 물에 담그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수단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화 즉, 어떤 방법을 가해서 사물의 본질이나 성격이 변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헬라 사람들이 피클 만드는 방법을 써 놓은 책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피클을 만들 때 오이를 끓는 물에 담그고 (밥토) 식초용액에 영원히 담가야 한다(밥티조, 영구적인 변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세례(밥티조)는 물에 담근다는 의미보다는 담가서 변화된다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은 것입니다. 세례 ‘밥티조’는 어떤 외부의 영향으로 영구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세례’ ‘밥티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례와 union christ를 좀 더 쉽게 설명을 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10:1-4)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구름의 인도를 받았고 모두가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2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3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었고 4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보세요, 홍해를 건넌 것을 성경은 이스라엘의 세례로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례가 단순히 물에 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면서 신발도 젖지 않았습니다. 정작 홀랑 젖은 사람들은 애굽 군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고린도전서10장에서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왕의 노예로 있다가 홍해에 빠져 그 애굽 왕의 종들은 다 죽고 홍해를 건넌 후에는 이제 하느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하느님의 종 모세에게 속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살아 올라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사랑하는 종 모세를 건져 내시면서 이스라엘을 그 모세 안에다가 넣으셔서 그들을 모두 모세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의 실존은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 애굽의 종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모세를 통해서 보시고 의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한 하느님의 백성들을 그들이 여전히 불가능하고 불순종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으로 던져 넣으셔서 의로운 예수로 여겨서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 안에다 우리를 넣어버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는 분명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부활 한적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킨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예수님 안에 넣으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산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성경은 복음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 실감하고 지각한 사람들은 그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신학에서는 그러한 것을 내포적 대신 ‘inclusive representative' 라고 합니다. 로마서로 가서 조금 더 자세하게 이해를 해 보지요.
(로마6:8-1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헬라어로 ‘로기 조마이’ 단어에서 reckon 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그 말은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여겨 주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갈라3:27) 27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접붙임이라는 것은 나무 가지를 잘라서 다른 나무의 표피를 가르고 거기에 붙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붙임을 한 나무 가지는 이내 그 나무와 한 몸이 됩니다. 그 가지는 이제 그 나무와 모든 생명의 현상을 같이 하게 됩니다. 같이 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같이 꽃을 피우고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가 죽으면 같이 죽게 되고 그 나무가 땅에 묻히면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로마11:17) 17 올리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몇 개가 잘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를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접붙인 가지들은 올리브나무 원 뿌리에서 양분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이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께 접붙임이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함께 죽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함께 부활 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때 우리는 함께 그 곳에 앉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2:20)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하느님의 백성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부분에 연합된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떤 삶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환난의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배신과 따돌림과 조롱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묵시록을 기록할 당시 그도 예수님과 똑같은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포악하기로 악명이 높은 도미티안 황제 때 사도 요한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파트모스 섬에 유배를 가서 그 年老한 나이에 광산에서 부역을 했다고 합니다. 환난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로서 ‘예수 안에서’ 그 환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환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뜰립시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억압’‘압제’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tribulation’입니다. 라틴어로는 ‘triblum’ 탈곡기라는 말입니다. 고대의 탈곡기는 아래에다 홈이 나 있는 철판을 깔아놓고 위에서 빗살무늬의 철판으로 비비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환난은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人이 맞다면 여러분도 바로 그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시게 됩니다.
(요한16:33) 33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도14:22) 22 그들은 각 도시에서 신도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디모후3:11-12) 11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고 참아 낸 끔찍한 박해와 고난을 그대도 함께 겪었습니다. 주께서는 이 모든 박해에서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12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고린후1:5-9) 5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 6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또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견디어 냄으로써 위로를 맛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당하고 있으니 그의 위로도 같이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을 믿는 우리의 마음이 든든합니다. 8 형제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리려고 합니다. 그 환난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을이만큼 심해서 마침내 우리는 살 희망조차 잃게 되었습니다. 9 그러나 이렇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묵시2:8-10) 8 또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죽었었지만 살아 계신 분이 말씀하신다. 9 '나는 네가 겪은 환난과 궁핍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부요하다. 네가 유다인으로 자칭하는 자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이다. 10 네가 장차 당할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기 위하여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워 주겠다.
(묵시7:13-14)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환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5:3-4)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 라는 구절을 보세요. 거기서 ‘기뻐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우카오마이’입니다. 이 말 은 ‘자랑하다, 뽐내다’의 뜻입니다. 신자는 환난을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환난을 자랑할 수 있게 될까요? 이유가 4절에 나 옵니다.
‘~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알기 때문에 환난이 자랑이 됩니까? 그 환난이 인내를 이루고 인내가 시련을 이루고 시련이 희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환난은 결국 희망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에 환난이 올 때 ‘아, 난 정말 그리스도인이구나.’하고 자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3절에서 환난이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내, 휘포모네’라는 말은 단순히 ‘꾹 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 다. ‘휘포모네’는 정절을 지키며 변치 않고 어디에 굳게 서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자에게 있어서 환난은 오히려 하느님 앞에 굳게 서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령에 의해 거듭난 신자는 환난을 당하면서 힘들어하는 자신을 보면서 ‘난 정말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정말 의지할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환난은 새로 거듭난 자기 안에 공존하는 죽을 몸, 옛 성품을 자꾸 쳐서 약화시켜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환난을 겪으면서 육신을 약화시키고 하느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하느님만을 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휘포모네’ 환난이 인내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욥기42:5) 5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환난을 통과하고 욥이 한 말입니다. 환난은 우리 신자들을 오히려 하느님 앞에 더욱 굳게 서게 만듭니다.
그리고 인내는 단련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단련(鍛鍊)이라는 말 ‘도키메’는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질이 검증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철도를 만들 때 철로에 쓰일 쇠를 만들 게 됩니다. 그 쇠는 철로로 깔리기 전에 수십 톤짜리 하중을 견딜 수 있는지 미리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검증을 받아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철로에 쓰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환난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인내는 그를 검증된 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련’ ‘도키메’는 우리의 희망을 더욱 구체적으로 붙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신자는 환난을 ‘자랑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진리를 이렇게 동일하게 설명합니다.
(야고1:12) 12 시련(페이라스모스)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시련을 이겨 낸 사람은 생명의 월계관(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 월계관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련(환난)은 우리의 희망을 굳게 붙들게 만드는 하느님의 배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환난이 올 때 ‘신자들아 기뻐하라’하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도 동일한 명령이 나옵니다.
(야고1:2) 2 내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베전4:12-13) 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페이라스모스)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기뻐서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신자의 삶에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말려주지 않으십니다.
(필립4:6-7) 6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고난을 없애 주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들 원하는 것 다 들어주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는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환난은 그러한 유익이 있기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환난이 필연적이냐 하면 우리는 세상과 원수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9절 후반부를 보면 사도 요한이 왜 파트모스 섬에 유배를 당하는 등의 환난에 처하게 되는지가 확실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묵시1:9) 9 여러분의 형제이며 함께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환난을 같이 겪고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같이 견디어 온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를 증언한 탓으로 파트모스라는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왜 파트모스 섬에 귀양을 가게 되고 왜 요한이 환난을 당하고 있지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입니다.
우리도 전에 그랬습니다만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죄인들은 나면서부터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들을 당연히 못 마땅히 여깁니다. 모두가 한 통속이 되어서 죄를 짓고 있는데 어떤 무리가 그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환난과 핍박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이 그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지요.
(묵시20:4) 4 나는 또 많은 높은 좌석과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을 잘리운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사람들은 목 베임을 받는 것과 같은 고통에 던져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난에 동참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도 동참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우리는 그 나라에 동참해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6절을 공부할 때 ‘우리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에서 쓰인 ‘포이에오’ 가 과거 시제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페소서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로 지어져 가고 있고 앞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골로1:13)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야고2:5) 5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이미 하느님 나라에 동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제 Made in Heaven(천국, 하늘)이 된 것입니다.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난 자들이 되어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하느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하느님 나라에 동참한 자들에게 환난과 참음이 요구됩니다. 이 구절만 보아도 후 천년설과 전 천년설 주의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환난도 없고 시련도 없는 천년 왕국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땅에서 그 나라에 동참한 자들에게는 환난과 참음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교회시대가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그 천년 왕국은 환난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천년왕국을 ‘대 환란기’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니까 혹자들이 말하는 7년 대 환난 기는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시편110:1-2) 1 야훼께서 내 주께 선언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 2 야훼가 시온에서 너에게 권능의 왕장을 내려 주리니, 네 원수들 가운데서 왕권을 행사하여라.3 네가 나던 날, 모태에서부터, 네 젊음의 새벽녘에 너는 이미 거룩한 산에서 왕권을 받았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 그 주님은 ‘원수 중에서 다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원수들 사이에서 천국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삶임과 동시에 악의 무리 속에서 견뎌내야 하는 환난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내면 세상은 그 꼴을 도무지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면 그들은 반성을 하거나 존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얕보고 더 밟아 버리는 세상의 힘의 원리로 우리 성도들을 대하기에 그 것은 우리들에게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원리로 통치되어지고, 그 십자가의 원리를 삶의 원리 로 하여 사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 하느님 나라는 가시적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나라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도 아니고 영토도 아니고 ‘통치권’ 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을 살면서 하느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순종하기를 노력하는 자들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통치가 있 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원수들, 대적들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래서 그 통치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수하며 하느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는 그 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그 하느님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인내하며 各人의 눈이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바로 그 날을 기다립니다. 이게 바로 사도 요한이 9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 분의 환난에 동참하고 그 나라에 동참하며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만 연합이 된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와도 연합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한 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피가 흐르고 한영을 소유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너희의 형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는 피를 나눈 자를 말합니다. 한 아버지를 둔 한 핏줄입니다. 한 맏형을 둔 피붙이입니다.
(로마8:29)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히브2:11-12) 1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한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라는 곳에서 섬기는 하느님은 참 여러 종류입니다. 그래서 교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아버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 됨의 유일한 근거는 바른 교리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하느님을 고백하는가? 그 것이 정 말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한 형제입니다. 한 핏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가 오버랩 되어있는 교회시대를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가정과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함께 어우러져 살아나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또 하나의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족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가족입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진짜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고전12:25-26) 25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자가 거듭날 때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①첫째로 성령께서 죽은 영을 깨워 놓아야 합니다. ②두 번째로 그 영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이 들어가 생명이 잉태됩니다. ③세 번째로 그 잉태된 새 사람은 자라야 하는데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는 교회에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모일 때 여러분은 자라나게 됩니다.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세요. 그래서 성경도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자매들이 서로를 아껴주고 격려하고 조언해주며 서로의 시금석이 되어주고 하면서 자라 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가시적으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반드시 속히 올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참아야 합니다. 흔들리면 안 됩니다.
(마태10:22) 22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로마8:24-25)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묵시3:10-11) 10 참고 견디라는 내 명령을 너는 잘 지켰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앞으로 온 세계에 환난이 닥쳐 올 때에 나는 너를 보호해 주겠다. 11 내가 곧 갈 터이니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 아무에게도 네 월계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여라.
잘 참으세요. 잘 견디세요. 예수께서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요, 반드시 이깁니다.
여러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 계신 여러분, 정말 그 나라 백성답게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느라 그 환난을 당하면서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구나.’하면서 그 환난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힘들지만 희망을 바라보며 잘 참고 계십니까? 정 힘이 드시면 옆을 보세요. 여러분의 형제들이 자매들이 그렇게 잘 참으면서 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며 힘을 얻으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환난 속에서 다른 형제들에게 사도요한처럼 이렇게 외치세요. ‘나 김로마노는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환난과 그분의 나라와 그 분의 참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느라 이렇게 힘겹게 세상과 싸우고 있지만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과 늘 은밀하게 通敎하며 환난 속에서 오히려 그분의 힘찬 응원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사랑하는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형제인 요한이 오늘 우리에게 하는 말씀의 요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