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대충 믿기 - 6. 네 어머니시다.
2012. 10. 3. 오전 9:04:08
글자
예수님 대충 믿기 - 6. 네 어머니시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 판결을 받은 무슨 무슨 단체의 수괴가 있었다. 당시 서슬 퍼런 법과 군부의 꼭두각시 노릇만 하던 판검사 탓에 사형 언도를 받으면 바로 며칠 안 가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곤 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날, 이 사형수는 자기를 애도하는 친척들과 단체 동지들이 흐느끼는 가운데 교수대로 오른다. 가까스로 어지럼증을 이기고 눈을 떠 보니 바로 앞에 백발의 어머니가 울고 계신다. 평생을 속앓이를 하면서도 자식이 분명 옳을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더 바로 그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사형수는 어머니 주위를 둘러본다. 평소 자기를 가장 가까이서 따르면 고락을 같이하던 후배 녀석이 하나 보인다. 다행히 이 친구는 이 사형수가 잡힐 때 모종의 조치를 취해 두어 체포를 면했고 이번 사건에서 빠질 수 있게 됐다.
이 사형수는 말한다.
여보게, 내 어머니를 부탁하네. 내 대신 잘 좀 모셔 주게. 꼭 좀 부탁하이... 후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앞으로 저는 잊으시고 이 후배를 아들로 삼아 주세요. 이제 이 후배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제 세상 어디고 의지할 데라곤 단 한군데도 없는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며 그 후배를 쳐다본다. 그리곤 아들이 교수대에 매달리는 걸 보고 이 후배를 따라 나선다. 다행히 이 후배는 다른 동지들의 후원으로 다시는 교도소를 들락거리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조용히 여생을 보낸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끄적거린 삼류 소설이다.
나는 요한복음에서 바로 이 소설을 떠올린다.
성경은 무지하게 어렵다. 하도 이곳 저곳에서 연관성과 특이성이 나타나 어느 한 구절을 읽고는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하기 무척 힘이 든다.
복음서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서로 관련이 있는 부분이 많고 또한 그 지향하는 바도 꽤나 일치하고 있어 각 복음서의 공통부분을 찾아가며 읽으면 이해가 좀 되는 구석이 많다. 우리는 이걸 '병행구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 부르고...
요한복음은 좀 다르다. 나머지 세 복음서와 공통된 구절이 거의 없이 '어쩌면(?)' 독자적인 구성으로 돼 있다. 그래선지 읽다 보면 공관복음서에는 없거나, 또는 공관복음서와 배치되는 구절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예수님의 수난 기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의탁하는 내용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나머지 세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과 여인들 - 여기엔 성모님도 끼어있었겠다 -은 '멀리서' 처형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단다.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십자가 곁에' <사랑하시는 제자와 여인들과 어머니>가 서 계셨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등지시기 직전에 당신이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신다. 그리곤 어머니께 말씀드린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바로 이 기사로 인해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다.
여기서 어머니는 우리를 돌보시는 '엄청난 능력'의 여성이 아니라 우리가 돌봐야 할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여인의 모습이다.
이 정황은 마치 내가 끄적거린 삼류 소설이랑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나? 나는 왜 너무도 똑같다는 느낌이 들지?
그럼 다른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요한 -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복음서에 없다 - 에게만 맡기고 각기 다른 일을 했을까, 아님 함께 공동체 내에서 지냈을까?
특이한 것은 예수님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만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의탁한 기사가 나오는 요한복음에서조차 더이상 어머니는 나오지 않는다. 실망한 제자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잡이로 소일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이것도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거기에서 일곱 제자들 중에 요한 - 이름은 없고 제제대오의 아들들이란 언급만 있다 -도 있었다. 물고기를 큰놈들만 153마리나 잡고 직접 구워서 나눠먹기까지 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찾지 않으셨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친절하게도 '나는 곧 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올라간다'고까지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정작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지 않으셨다면 그건 뭘 뜻할까?
그냥 요한복음서 - 그리고 공관복음서를 포함해서 -를 지은 저자들의 무신경이나 무관심을 탓해야 할까?
성경을 그냥 대충 읽어 보면 이렇단 얘기다.
이천 년 전 성경을 지은 저자들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우수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또 그들이 아주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복음서를 지었다고 해도 그걸 제대로 읽고 그 내밀하고 심오한 의미를 깨달을 신자 독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도 나는 잘 모른다.
이천 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민도가 높았다던 로마에서조차 문맹율이 거의 90%였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절이면 우리 한반도에서는 이제 막 고구려, 백제, 신라가 겨우 이름을 지을까 말까 한 시절이라는 것 정도...
성모님에 대한 논의는 너무 복잡하다.
성경에서 꺼낼 게 너무 없으니 참 많은 전승도 동원됐다.
그리고 우리는 성모님을 너무도 높이 올려놓고 있다.
열세 살에 약혼했다는 얘기부터, 양부 요셉은 결혼 당시부터 꼬꼬 할아버지였다는 얘기부터, 성모님이 아기를 나은 직후 생물학적 동정성이 다시 회복됐다는 얘기에, 그걸 확인한 산파의 손이 불타 버렸다는 얘기까지...
그리곤 지금에 와서는 베드로가 열지도 않은 천국문을 열어주셨다는 얘기에, 군대를 편성해서 사탄의 머리통을 짓밟는다는 얘기까지...
그냥 대충 믿자.
일단 적힌 대로만이라도 열심히 믿자.
예수님을 대충 믿으면 큰 고민이 없어진다.
피고름이 질질 흐르는 상처에서 장미향이 우러난다는 '아름다운(?)' 전승에 목을 매고 감사기도를 드리느니, 차라리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동양의 일곱 글자를 되새기고 나머지는 예수님께 맡기는 게 훨씬 가톨릭 답지 않은가?
그게 훨씬 더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깝지 않은가?
오갈 데 없고 힘 없는 어머니, 내가 사랑하는 주님의 어머니를 내가 모시는 것이지, 마치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물려준 재산이 산더미 같은 '능력자' 어머니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건 좀 속보이지 않나?
그래서 대충 믿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