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2012. 3. 14. 오후 8:26:59

글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마태22:1~14            


▲왕의 잔치와 관련해 본문에 3부류의 사람이 나온다.

①혹자는 밭에 일하러 갔고, 혹자는 장사하러 갔다.

자기 일에 바빠서 잔치 초대를 거절한 사람이다. 마22:6


②잔치에 참석하라는 소식을 전하는 종들을 아예 잡아 죽이는 자들도 있었다. 22:6

이렇게 예수님과 기독교에 대해 본성적으로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③잔치에 참석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결국 쫓겨났다. 22:12~13

어쩌면 제일 억울한 사람이다. 천국의 문턱까지 왔으나, 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당시 문화는, 왕실이나 고위 관료, 부자들이 잔치를 배설할 때

미리 종들을 보내어 하객들의 참석 의사를 타진하고, 당일 날 입을 예복을 미리 선물했다고 한다. 그 외 예복이 미리 전달이 안 되는 경우에는, 잔치 장소 입구에서, 종들이 예복을 미리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어느 마을 부자가 환갑잔치를 할 때는 동네 아낙들에게 한복을 한 벌씩 선물하는 경우도 있었다.
본문에서 ‘예복을 입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1. 예복은 <칭의>를 뜻한다.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불러들였다. 그래서 결혼 잔치 마당은 잔치 손님들로 가득 찼다. 마22:10


▲왕의 혼인잔치에는 선인, 악인 구분 없이 모두 다 초대되었다.

실제로 교회 또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을 볼 때 그렇다. 교회는,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만 골라서 모인 곳이 결코 아니다. 교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


본문의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예복’이 주어졌듯이,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칭의’가 주어진다.


▲청함 받은 사람이, 주인이 거저 주는 예복을 안 입은 이유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 누추한 사람일수록, 주인이 주는 옷을 좋아한다. 반대로 자기 옷이 좋고 화려한 사람일수록, 주인이 주는 옷을 싫어한다. 주인이 주는 예복/단체복보다, 자기가 입은 옷이 더 멋있다는 것이다.


교복자율화를 찬성하는 학생은.. 주로 옷이 많아서, 옷 자랑 하고 싶은 학생들이다. 반대로 교복을 선호하는 학생은.. 고급 옷이 없어서, 모두 똑같이 교복입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유난히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고, 좀 마음껏 과시하고 싶은데 잔치자리에 예복을 입으라고 하니.. 사양한 것이다. 자기 옷이 더 고급스럽고 좋다는 것이다.


▲공로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교훈

본문의 메시지는, ‘자기 공로를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새 옷’, 즉 칭의를 힘입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지

자기의 고급 옷(자기 공로)으로는, 천국 잔치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저 인간들 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 하다가는 ... 쫓겨날 가능성 크다. ‘나보다 더 깨끗하고 잘난 사람 있으면 나와 봐!’ 하다가는... 예복을 못 입는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써 버려서 탕자인가?

만약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으로 반대로 외국에서 떼돈을 벌었다면, 그러면 탕자가 아니고 효자인가?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돈을 다 써버려서 탕자가 아니라, 탐심이 있어서, 아버지보다 돈을 더 좋아해서, 돈을 갖고 ‘아버지를 떠난’ 그 자체가 탕자이다.

그러므로 탕자가 자기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든지, 까먹든지, 아버지께로 되돌아오는 길이,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돈을 잘 벌더라도, 아버지를 떠나 있으면, 그가 바로 탕자이다. 큰 형은, 집을 나가지는 않았지만, ‘집 안에 있는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동생을 비난하며, 자기 의를 내세우는 큰 형은, 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는,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기들을 가렸다.  창3:7

그렇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 3:21

여러분, 사람이 만든 무화과 잎으로는, 자기 허물을 다 가릴 수 없다. 그것은 곧 말라버리거나, 시들어버린다. 이 ‘가죽옷’은 신약적 표현으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나에게 주어지는 ‘의의 새 옷, 곧 칭의’를 뜻한다.
우리는 모두 죄로 더러워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의로운 행동도 더러운 옷과 같고

죽은 잎사귀 같습니다. 사64:6


제가 늘 강단에서 설교하니까, 늘 천사의 말만 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본 바탕이 ‘더러운 옷’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저는 복음주의 설교자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이 주신 의의 새 옷을 입었지만 날이다.


주님이 입혀주신 (피 흘리고서 만든) ’가죽 옷’을 의지해서 설교하는 것이지,

제가 여러분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선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아니다.

혹시나 어느 설교자가, 교인들보다 더 훌륭한 남편으로 살고, 교인들보다 자녀 양육을 더 잘하고, 더 거룩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 의란 ‘더러운 옷’, 무화과나무의 죽은 잎사귀’과 같다. 사64:6


▲예복을 갈아입는 사람은, 자기 공로가 ‘더러운 옷, 마른 잎사귀’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예복’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자기 옷이 더럽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기 옷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더러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복’이 절실하게 필요치 않다. 그래서 천국의 잔치 자리에서 그만 쫓겨난다.


◑2. 예복은 <실천적 행위>를 뜻한다.
이 해석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예복은 ‘변화된 삶’을 뜻한다고 보는데,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였으니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더라 하더라  계19:7


◑둘 다 있어야 된다
위 두 가지 해석 중에, 어느 것이 맞을까? 둘 다 맞다.


‘예복’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칭의’를 뜻한다.

그러면서도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즉 ‘옳은 행실’을 반드시 나타내게 된다.


아래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칭의)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행실) 엡4:22~25

 

 

예복을 입지 않은자는 오늘날 어떤 사람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심판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14


고대 시대에는 왕이 잔치를 위해서 사람들을 초청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할 때에 반드시 입고 와야 하는 예복을 함께 보내는 것이 통례였다. 이 비유에서도, 임금은 손님들에게 예복을 선물로 주었다. 손님들은 왕이 보내어준 예복을 입고 옴으로써, 왕이 자신을 초청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은 임금이 보내준 예복을 입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서 참석하였다. 그는 잔치의 참석을 위해, 임금이 요구하는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왕이 엄청난 값을 치루고 준비해둔 예복을 입는 일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친구야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라는 임금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임금은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는 최종 선언을 내렸다.


임금이 잔치에 참석한 손님을 심사하는 일은 심판을 표상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음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는 자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자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다. 영생이라는 최후의 보상을 나누어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결정된 심사 결과대로 상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2.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를 따라서 상과 벌을 받게 된다.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성품과 생애와 행위를 심판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예복의 의미
이제,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인 "예복"에 대한 공부를 해보자.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예복"을 입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왜냐하면 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둠 속으로 쫓겨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순결한 품성을 표상한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하늘 왕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표상된 교회와 혼인 예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요한계시록 19:7,8 (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이제 "예복"이 상징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마태복음 22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혼인예식에 참석한 손님들로 비유되었지만,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순결한 교회를 상징하는 신부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입고 있는 "예복"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신부가 입고 있는 "흰 세마포"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예복=흰세마포). 그렇다면 예복 곧 흰세마포는 무엇인가?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요한계시록 19:8. 성경은 흰 세마포를 성도들의 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세번째 초청을 받고 하늘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의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할 것을 뜻한다. (예복=흰세마포=성도들의 의)


성도들의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순결한 흰세마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옷이다. 그 옷을 입은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애정과 충성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애를 살았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살았다면, 그들이 입었던 의의 세마포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둘러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자, 그들과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고, 저희를 둘러쌌던 빛의 옷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서 몸을 가리움으로 하늘의 옷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입고 있지 않는 의의 옷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한 행위나 자선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가리우려고 한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공로나 행위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성도들의 의"를 대신할 수 없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천사들과 함께 참석할 사람은 무화과나무의 잎이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이사야 64:6).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여 주시는 예복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 왕인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이 예복은 진실로 회개하고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입혀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역사의 마지막 교회로 표상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권고하셨던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제14호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쓰신 상태에서 모든 율법에 일치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모든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나누어 받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성도들이 될 수 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에 굴복되며,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율법에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로서, 경건의 비밀을 설명하였던 것이다(빌립보서 2:5).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자들만이 성품과 생애가 변화된 삶을 삶으로서, 율법의 높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의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와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죄이다. 그런데 죄는 무엇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가장 명백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4. 죄가 법을 범하는 것이므로, 의는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하였던 것이다(롬 6:16). 물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순종이란, 바리새인이 하는 것과 같은 외식적 순종이 아니라, 순결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성품은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순종하는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고, 악한 성품은 율법을 범하고 진리를 거절하는 악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줄 것이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계22:12). 우리가 오직 예수의 이름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그분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 속에 품음으로써, 변화된 성품을 가지고 거룩한 생애를 살지 않는 한, 구원과 영생은 보장될 수 없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요일 3:2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사단은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거짓 복음을 뿌려 놓았다;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율법이 폐하여졌다" : 사단의 이러한 거짓말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에 의해서 그 모순이 드러난다(마 5:17).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은 사람이 율법을 범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율법을 폐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구태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본을 따르도록 명하셨다(요 15:10).


2. "인간은 결코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 대개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목사들과 교인들에 의해서 지지받고 있다. 사실상,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여기에 나오는 권세는 우리 속에 있는 권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통하여 마음이 새롭게 창조함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죄를 정복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예복을 입은 사람들의 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4.

우리는 이 비유의 마지막 절에서 가장 두렵고 슬픈 말씀을 대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금의 초청을 받아서 혼인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잔치에 끝까지 남아 있도록 허락되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손님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채 잔치에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가라지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단지 인간적인 도덕가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를 세상에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의 생애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의 생애와 별다른 차이점을 나타내지 못한다.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가 높이는 율법을 보고서 교회로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율법을 무시함으로써 세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생애를 따라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영생의 면류관은 바라보지만, 좁은 길 위에 놓여져 있는 십자가는 싫어한다.


비유 가운데 임금이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라는 물음에 그 사람이 "유구무언"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큰 심판날에도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런 핑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진리와 율법을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지만, 그 날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게는 놀라운 빛이 주어져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구약 성경만이 주어졌지만, 우리들에게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놀라운 빛이 주어져 있다. 영생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은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세상 끝이 마쳐지려는 이 때, 예복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지고 있다. 누가 그 부르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응할 것인가? 조심하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유의하라.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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