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5편 수계생활 제3장 십계명(十誡命)
제3장 십계명(十誡命)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직접 계시하신 실정법으로서 구약의 모든 법의 요약이며 현대의 사회질서의 대헌장이다.
십계명은 인간이 양심의 소리에 따라 지켜야 할 윤리규범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 즉 가족, 사회, 경제, 사법 등의 시민생활을 규제하고 있다(출애 20,1-17 참고).
제1계 하느님을 흠숭하라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섬겨라”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땅히 하느님을 흠숭하고 섬겨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를 이렇게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30). 따라서 첫째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포함한다.
‘하느님’은 한결같으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항상 동일하신 분, 성실하고 온전히 의로우신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전능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한 호의와 애정을 생각하면, 누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성서는 계명의 시작과 끝에 하느님께서 ‘나는 주님이다’라는 표현을 쓰신다(교리서 2086 참고).
하느님께 대한 흠숭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창조주요 구세주로, 주님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교리서 2096 참고).
하느님께서는 이 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사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신명 5,9-10).
그러므로 어떠한 것이라도 하느님보다 위에 모실 수 없고 더 귀하게 여길 수 없으며 더 마음을 빼앗겨도 안 된다.
제1계에 관련된 금지사항
1)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공경하는 것
- 부처상이나 우상, 그리고 해, 달, 바위, 나무 등에 존경을 표시하는 것
- 잡신[삼신, 토지신, 바다신 등]이나 조상의 영혼을 흠숭하는 것
- 무당을 데려다 굿하는 것
2) 하느님 아닌 것에 의지하여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
- 점술, 철학관, 도사 등에게 무엇을 물어보는 것
- 수상(手相), 관상(觀相), 사주(四柱), 궁합(宮合) 등을 보는 것
- 풍수설(風水說), 정감록(鄭鑑錄), 토정비결(土亭秘訣) 등을 믿는 것
3)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것
- 사람 모독 : 성직자나 수도자를 모독하는 것(교회법 1370조)
- 장소 모독 : 성당이나 교회묘지를 모독하는 것
- 물건 모독 : 성서나 성물(聖物)을 모독하는 것
4)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는 것
- 절망하는 것 : 절망은 하느님의 선하심, 약속에 성실하신 그분의 의로우심,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거스른다(교리서 2091 참고).
- 자만하는 것 : 자만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든가 회개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과신한다(교리서 2092 참고).
- 무관심하는 것 : 무관심은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 사랑의 힘을 부인하는 것이다(교리서 2094 참고).
- 배은(背恩)하는 것 : 배은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교리서 2094 참고).
- 냉담하는 것 : 냉담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주저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며, 사랑의 활력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교리서 2094 참고).
- 영적 게으름을 부리는 것 : 게으름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혐오하기까지 한다(교리서 2094 참고).
- 하느님을 증오하는 것 :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부인하고 하느님을 죄를 엄히 다스리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여겨 저주하는 것이다(교리서 2094 참고).
-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나 무신론(無神論) 등에 동조하는 것
- 유다교적 의식을 도입하는 것
- 거짓 기적, 발현, 예언을 주장하고 선전하는 것
- 교구 직권자의 허락없이 타종교나 타교파의 집회에 참가하는 것
- 부모가 자녀를 비가톨릭 종교에서 세례받게 하거나 교육시키도록 내어주는 것(교회법 1366조 참고)
〈 우리의 생활 〉
우리가 직접 잡신을 섬긴다든가 우상숭배나 점술 등으로 하느님을 모독하지는 않는다 해도 자신의 지혜, 건강, 아름다움, 욕정, 행복, 재산, 권력, 가족 등을 하느님보다 더 섬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고, 하느님을 빙자하여 자신을 변호하지 말라는 계명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인간은 사랑이 넘치는 흠숭의 정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상기해야 한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고 찬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교리서 2143 참고).
이름은 한 인격체의 본성과 특성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가 현존하기를 바라고 그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으면 자신이 하느님 대전에 있음을 의식해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마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도록’ 기도하기를 명하셨고,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한 약속은 하느님의 명예와 성실과 진실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 약속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그 약속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며 어느 면에서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교리서 2147 참고).
제2계에 관련된 금지사항
1) 하느님의 이름은 물론이고 천사들과 성인 성녀들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는 것
2) 특별한 이유없이 하느님을 사실의 증거자로 내세워 맹서(盟誓)하는 것
3)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함부로 하느님께 하는 것
4) 하느님이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비방하는 것
5) 자기에게나 타인에게 하느님의 벌을 비는 것
〈 우리의 생활 〉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느님이나 성인들의 이름을 부른다. 헛되이 부르지는 않겠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예: 화살기도를 하기 위해] 좀더 정성되이 부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성되이 부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좋은 기도이다.
주일에 하느님께 공적 흠숭례를 드리기를 명하고, 육신 일은 금지하는 계명이다.
예수께서는 “주간의 첫날”(마태 28,1;마르 16,2;루가 24,1;요한 20,1 참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첫째날’로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날은 첫 창조를 상기시킨다. 안식일 다음날 ‘여덟째 날’ 이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날이 모든 날 중의 첫째날, 모든 축일 중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 ‘주일’이 되었다(교리서 2174 참고).
주일은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통해서, 유다인들의 안식일의 영적인 참의미를 완성하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예고한다(교리서 2175 참고). 주일을 경축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회상하고, 하느님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공적이고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도록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 주신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교리서 2181 참고).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날을 경축하고,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고, 주일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세상사(世上事)보다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5편 4장 2절 참고]. 따라서 신자들은 중대한 이유[예를 들어, 병이 들었거나 유아를 보살펴야 하는 경우]로 면제되거나 본당 신부의 관면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규정된 날에 성찬례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교리서 2181 참고).
은총의 날, 휴식의 날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쉬셨듯이”(창세 2,2) 인간의 삶도 노동과 휴식으로 이어져 있다. 주님의 날이 제정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가정, 문화, 사회, 종교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교리서 2184 참고).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다른 의무 축일에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 주님의 날에 누려야 할 기쁨, 자선사업의 실천, 정신과 육체의 적당한 휴식 등을 방해하는 일이나 활동을 삼가야 한다. 가정에서 필요하거나 사회에 큰 유익을 주는 일은 주일의 휴식 규정의 적용을 면제하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 신자들은 정당한 면제 사유들을 핑계 삼아 신앙과 가정생활과 건강을 해치는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교리서 2185 참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난과 곤궁 때문에 쉴 수 없는 형제들을 기억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주일에는 자선사업과 병자, 불구자, 노인들에게 봉사하는 데 바쳐 왔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가족과 친지들에게 평일에는 내기 힘들었던 시간을 내주고 그들을 보살핌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주일은 그리스도교인다운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반성과 연구와 묵상을 위한 때이다(교리서 2186 참고).
제3계에 관련된 금지사항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데 방해되는 일을 하지 않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함을 파공(罷工)이라 한다.
모든 주일과 의무적 축일에 지켜야 할 파공은 육체적 노동[농사, 철공, 목공, 바느질, 빨래 등], 상행위(商行爲), 법정의 판결 등이다.
한국 주교회의는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파공을 특별히 면제하였다. 단, 예수 부활, 예수 성탄, 성령 강림, 성모 승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파공 관면(寬免)을 주지 않았다. 주일 및 대축일의 파공 관면이 미사참례 의무를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의 생활 〉
요즈음 외교인들도 주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파공 관면으로 주일에 일할 수는 있지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풍토조성에 앞장서야 한다. 주일에 가족이 함께 성당에 가고 이웃에 대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다.
제4계는 직접적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윗사람 모두를 섬겨 사회질서를 바로잡게 하는 계명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로마 13,8-10).
자녀의 의무
하느님께서는 당신 다음으로 부모를 공경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넷째 계명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신다. 부모는 생명의 전달자이고, 양육의 책임자이며, 신앙생활의 전수자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은혜에 감사하며, 사랑과 존경심으로 부모에게 효성을 드리고 순종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 관계는 모든 인간 관계의 기초가 된다. 이 관계에 성실할 때 다른 모든 관계를 원만히 이어가며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제4계명을 주시면서 축복을 약속하신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출애 20,12).
부모 공경[孝道]은 자기를 세상에 낳아 사랑하고, 수고하여 신체를 성장하게 하고 지혜와 은총이 자랄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아비를 공경하고 너를 낳으실 때 겪은 어미의 고통을 잊지 말아라.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부모님의 덕택임을 잊지 말아라. 그들의 은덕을 네가 어떻게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느냐?”(집회 7,27-28).
자녀가 부모에게 드리는 공경은 참다운 온순과 순종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지키고 어미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 …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이끌어 주고, 자리에 누우면 보살펴 주며, 눈을 뜨면 말동무가 되어 준다”(잠언 6,20-22). “슬기로운 아들은 훈계를 달게 받지만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잠언 13,1).
자녀가 부모의 집에서 사는 동안에는 자신과 가족의 선익을 위해서 부모의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 “자녀 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분입니다”(골로 3,20).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맡긴 교육자들의 합당한 명령에도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이 그러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고 양심에 따라 확신이 선다면 그 명령에 따르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은 성장해 가면서 계속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부모가 바라는 바를 먼저 알아서 만족시켜 드리고, 기꺼이 부모의 의견을 청하며, 부모의 정당한 훈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분가하여 독립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끝나지만, 그러나 영구히 부모를 존경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존경은 사실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인 하느님 경외에 뿌리를 두고 있다(교리서 2215-2217 참고).
부모에게 효도할 의무는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된다. 부모가 비록 세상을 떠났어도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준 생명이 존속되고, 부모의 가르침이 유효하게 남아 있고, 부모가 자녀의 도움을 요구하고 있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미사 봉헌 및 대신 속죄[자선, 기타 선행]하고 ‘위령 기도’를 정성껏 바쳐야 한다.
부모의 의무
부모는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보아야 하고,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모는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지키도록 교육해야 한다(교리서 2222 참고).
부모는 자녀교육의 첫번째 책임자이다. 부모는 먼저 애정과 용서와 존경과 성실과 순수한 봉사로 가정을 영위해야 한다. 가정은 덕을 가르치기에 매우 알맞은 곳이다. 덕성교육을 위해서는 자기 희생과 건전한 판단력과 자제력을 훈련시켜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것보다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더 귀중하게 여기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는 것 또한 부모의 중대한 책임이다.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자신들의 결점을 인정할 줄 안다면, 자녀들을 더 잘 이끌어 주고 꾸중할 수 있을 것이다(교리서 2223 참고).
부모가 하는 신앙교육은 자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도록 가르칠 사명을 띠고 있다(교리서 2226 참고).
공권력의 의무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봉사하기 위해 그 공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아무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을 명령하거나 입법화할 수 없다(교리서 2235 참고).
공권력 행사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살면서도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하여 올바른 가치 서열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윗사람들은 각자의 필요와 공헌도를 고려하며, 또한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분배 정의를 현명하게 실행해야 한다.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 공동체의 이익에 손해를 줄 수 있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교리서 2236 참고).
정치권력은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정치권력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 특별히 불행한 사람들과 가정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여야 한다(교리서 2237 참고).
시민의 의무
공권력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윗사람들을 하느님 은총의 관리자로, 그리고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입니다”(1베드 2,13.16).
인격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선익에 해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볼 때, 올바르게 질책할 권리와 의무가 시민들에게 있다(교리서 2238 참고).
시민의 의무는 진리와 정의의 정신으로, 연대의식과 자유의 정신으로 공권력과 함께 사회의 선익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다(교리서 2239 참고).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이나 기본 인권이나 복음의 가르침 등에 어긋날 때, 시민들은 양심에 따라 그 명령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교리서 2242 참고).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기”(사도 5,29) 때문이다.
신자의 의무
하느님의 권위로 사목하는 성직자에게도 사랑과 존경으로 따를 의무가 있다.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서 수고하고,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사람들을 존경하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을 생각해서 그들을 사랑하고 극진히 공경하십시오”(1데살 5,12-13).
〈 우리의 생활 〉
핵가족화 되고 있는 현대에 사는 우리는 자칫 부모의 은혜를 잊고 무관심하게 지내기 쉽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흠숭을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가능하다 해도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와 늘 함께 산다는 의식을 갖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와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간접적으로는 인권을 보호하라는 계명이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 생성 시초부터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연결되며, 또한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한 창조주와 영원히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무죄한 인간을 직접 죽일 수 없다(교리서 2258 참고).
생명 자체뿐만 아니라 지체(肢體)와 사람되게 하는 모든 조건까지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와 인간 이하의 생활조건, 불법 감금, 유형, 노예화, 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 또는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서 취급되지 못하고 단순한 수익의 도구로 취급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는 인간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더럽히는 행위로서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사목 27).
정당방위(正當防衛)
자기의 생존권을 존중하는 것은 정당하다.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공격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살인죄가 아니다(교리서 2264 참고).
타인의 생명, 그리고 가족이나 시민 공동체의 공동선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에게 정당방위는 권리일 뿐 아니라 중대한 의무가 될 수도 있다(교리서 2265 참고).
낙 태(落胎)
인간의 생명은 잉태(受精)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한다. 무죄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원칙이 태아에게도 적용된다(교리서 2270 참고).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예레 1,5). “사실 생명의 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생명유지라는 숭고한 임무를 인간에게 맡기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품위에 알맞는 방법으로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 수태되는 순간부터 성심껏 보호해야 할 것이다. 낙태와 유아 살해는 가증할 죄악이다”(사목 51).
“낙태를 주선하여 그 효과를 얻은 자는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교회법 1398조).
과학의 발달로 실험실에서 인간의 배아를 조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생명의 복음」을 통하여 인간 배아의 존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배아나 태아를 실험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지닌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가 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출생한 아기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과 똑같이,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63).
아울러 인간의 난자나 정자를 동물의 정자나 난자와 결합시키는 행위도 죄악이다.
안락사(安樂死)
동기나 수단이 어떻든, 안락사는 용인될 수 없다. 고통을 없애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죽게 하는 행위나 그 행위를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하느님께 대한 존중에 크게 위배된다(교리서 2277 참고).
그러나 지나친 치료는 거부할 수 있고, 기대한 효과를 내지 못할 경우 비용이 많이 드는 특수한 기구를 사용 중단할 수 있다. 이것은 환자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교리서 2278 참고).
자 살(自殺)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자가 아니다. 따라서 자기 생명이라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자살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영속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경향에 상반되는 것이다. 또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도 어기는 것이다(교리서 2281 참고).
자살한 사람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다. 교회는 자기 생명을 끊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교리서 2283 참고).
악한 표양
“악한 표양은 악을 저지르도록 타인을 이끄는 태도나 행위이다. 악한 표양을 보이는 사람은 이웃을 악으로 이끄는 유혹자가 되는 것이다”(교리서 2284). 본성상 또는 직무상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악한 표양을 보인다면 더 큰 죄악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마태 18,6)라고 말씀하셨다.
“악한 표양은 법이나 제도, 유행이나 여론 등으로 유발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풍속을 퇴폐하게 하거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어렵게 하는 법이나 사회구조로 이끄는 사람은 악한 표양을 보이는 것이다. 부정행위를 조장하는 기업주들이나 학생들을 잘못 가르치는 교사들, 그리고 여론을 조작하여 도덕적으로 문란하게 하는 사람들도 악한 표양을 보이는 죄를 짓는 것이다”(교리서 2286 참고).
건강관리
생명과 신체의 건강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값진 재산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우상숭배하듯 지나치게 위해서도 안 되고, 술, 담배, 약물을 과용해서 건강을 해칠 위험을 자초해서도 안 된다.
“술취한 상태에서나 속도에 대한 무절제한 취미로 도로나 바다, 하늘에서 타인과 자신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은 중죄를 짓는 것이다”(교리서 2290).
마약사용은 인간의 건강과 생명에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히므로 치료를 위한 처방에 따르는 경우가 아니면 중죄이다(교리서 2291 참고).
장기이식은 장기 제공자나 그 보호자의 분명한 동의없이는 용납될 수 없다. 장기이식은 제공자가 겪는 신체적, 정신적 위험이 수혜자가 얻는 선익과 조화를 이룰 때, 도덕률에 부합되며 칭찬받을 일이 될 수 있다(교리서 2296 참고).
납치하고 인질로 삼는 행위, 무차별하게 위협하고 상처를 입히는 행위,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사용하는 고문, 치료가 아닌 수족절단, 신체상해, 불임수술 등은 도덕률에 어긋난다(교리서 2297 참고).
〈 우리의 생활 〉
?악한 표양을 보인다든가, 이웃을 미워하며 그들을 질시하고, 모함한다든지 저주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그를 죽이는 것과 같다.
?자살자를 미워할 수 없다. 우리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심어주지 못한 탓이다.
?분노나 증오는 사랑의 계명에 어긋난다. 우리를 즐겨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 우리도 쉽게 용서하는 덕을 쌓고 적어도 미움을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혼외 정사를 금하고 정결을 보호하는 계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인류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사랑과 일치의 소명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이 사명에 따른 능력과 책임도 부여하셨다.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성의 구별은 행복한 혼인생활과 풍요로운 가정생활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 남녀의 차이는 서로를 요구하고 서로 보완하게 한다. 이 결합으로 자녀가 태어난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정결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결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새 옷으로 입었다”(갈라 3,27).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신분에 알맞게 정결한 생활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 자신의 애정생활을 정결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교리서 2348 참고).
정결은 각 개인의 다양한 생활방식에 따라 구별해야 한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더 쉽게 전념하기 위한 훌륭한 방법으로서 동정이나 봉헌된 독신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고, 모든 이를 위해 도덕률이 결정하는 방식에 따라 혼인하거나 독신으로 지내는 이들도 있다. 혼인한 사람들은 부부로서 정결을 지키도록 요청받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금욕으로써 정결을 실천한다(교리서 2349 참고).
정결을 거스르는 죄
음욕(淫慾)은 성적 쾌락을 무질서하게 원하고 문란하게 탐닉하는 행위다. 부부 일치와 자녀 출산이라는 궁극 목적에서 벗어나 성적 쾌락 자체만을 추구할 때, 도덕적 문란이 된다(교리서 2351 참고).
자위행위(自慰行爲)는 성적 쾌락을 위해 생식기를 일부러 자극하는 것을 말한다. “유구한 전통에 따라, 교회의 교도권과 신자들의 도덕적 의식은 자위를 본질적으로 난잡한 행위라고 서슴없이 확언해 왔다.”(교리서 2352).
사음(邪淫)은 혼인하지 않은 남녀간의 육체 결합이다. 이는 인간의 품위에, 그리고 본래 부부의 선익과 자녀 출산과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성의 품위에도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하는 매우 악한 표양이 되는 것이다(교리서 2353 참고).
간음(姦淫)은 정의도 어기는 행위이다. 간음하는 자는 자신이 한 사랑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간음은 혼인의 유대를 손상시키며, 배우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혼인의 기초가 되는 계약을 어김으로써 혼인제도를 해친다. 간음은 특히 부모의 안정된 일치가 필요한 자녀들의 선익을 위태롭게 한다(교리서 2381 참고).
강간(强姦)은 강제로 침입하여 폭력으로 어떤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정의와 사랑을 해친다. 강간은 존중되어야 할 인격과 자유를 누릴 권리에 심한 상처를 입힌다. 강간은 피해자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을 피해를 입힌다(교리서 2356 참고).
춘화(春畵)는 부부들이 사생활 중에서 가지는 성관계를 실제적이거나 모방하여 일부러 제삼자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은밀하게 자기를 선물로 내어주는 부부행위를 왜곡하므로, 춘화는 정결을 모독하는 것이다. 또한 춘화는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배우, 상인, 대중]의 품위를 크게 해친다(교리서 2354 참고).
매춘(賣春)은 몸 파는 사람을 성적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켜 그 사람의 품위를 해친다. 돈을 지불하는 사람도 자신에게 중죄를 짓는 것이다. 그는 세례로 약속한 정결을 깨뜨리고, 성령의 궁전인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이다(교리서 2355 참고).
동성애(同性愛)는 동성의 사람들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남자끼리나 여자끼리 갖는 관계를 말한다. 동성애는 성행위가 생명전달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연법에 어긋난다. 동성애는 애정과 성의 진정한 상호 보완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교리서 2357 참고).
이혼(離婚)은 자연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다. 이혼은 부부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로 합의한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다. 새로운 혼인 유대를 맺는 것은 비록 민법이 그 유대를 인정하더라도 자연법의 위반이다. 그때 재혼한 배우자는 계속해서 공공연한 간음 상태에 있게 된다(교리서 2384 참고).
이혼은 사회와 가정에 중대한 손해를 끼친다. 버림받은 배우자에게도, 부모의 결별로 충격을 받고 흔히 부모 사이에서 이리저리 끌려가는 자녀들에게도, 그리고 온 사회에 참으로 큰 손해를 끼친다(교리서 2385 참고).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성립되고 완결된 혼인은 사망 이외에는 어떠한 인간 권력이나 어떠한 이유로도 해소될 수 없다”(교회법 1141조).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제3편 제6장 4절 참고)로 혼인이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을 수 있으므로 교회는 이를 심의하여 ‘혼인무효’를 선언한다.
부부생활은 삶의 기초가 되고 사회생활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부부생활은 제삼자에 의해서 침해될 수 없기 때문에 성을 주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혼인 밖의 모든 성행위를 금하고, 부부 사이에도 성을 바르게 사용하기를 명한다. “여러분은 음행을 피하고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처럼 욕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1데살 4, 3-5). [부부의 성생활 3편 6장 7절 참고].
〈 우리의 생활 〉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사회윤리의 퇴폐를 막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므로 특별히 성윤리에 있어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약혼은 결혼을 약속한 것이지 혼인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핑계로 쉽게 순결을 버리는 일이 있다. 이것은 잘 자라는 사랑의 새싹을 밟아버리는 행위이며 결혼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순결은 결혼의 가장 고귀한 준비요 최고 선물이며, 사랑을 한없이 자라게 한다. 순결을 바탕으로 한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처럼 신성한 것이 될 것이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재산을 보호하는 계명이다.
일곱째 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취하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것을 금한다. 이 계명은 현세의 재물과 인간 노동의 결실에 대한 관리에서 정의와 사랑을 명한다. 그리고 이 계명은 공동선을 위해서 재산의 보편성과 개인의 소유권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재물을 하느님과 형제적 사랑을 위해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교리서 2401 참고).
경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려면, 현세 재물에 대한 애착을 조절하기 위해서 절제의 덕을 닦아야 하고, 이웃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기 위해서 정의의 덕을 실천해야 한다. 황금률에 따라 그리고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는(2고린 8,9) 주님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 연대의식을 길러야 한다(교리서2407참고).
일곱째 계명은 도둑질, 곧 주인의 의사를 거슬러 빼앗는 것을 금한다. 긴급하고 필수적인 것[의식주]을 조달하기 위해서 타인의 재물을 차지하여 사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되는 급박하고 절실한 경우에는 도둑질이 아니다(교리서 2408 참고).
타인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보유하는 모든 행동은, 비록 그것이 민법의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곱째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빌려온 재물이나 습득물을 일부러 간직하고 있거나, 장사할 때의 속임수, 부당한 품삯을 지불하는 행위, 타인의 무지나 긴박한 틈을 타서 물건 값을 올리는 행위 등이다. 또한 물가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투기, 매점매석(買占賣惜), 공유재산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 직장의 일을 성실히 하지 않는 것, 탈세, 공공 소유물에 일부러 손해를 입히는 행위 등은 도덕률에 어긋나며 보상을 해야 한다(교리서 2409 참고).
도박(賭博)이나 내기 자체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과 상대의 생활에 지장을 주는 도박과 내기는 용납될 수 없다. 부정하게 내기를 걸거나 노름에서 속임수를 쓰는 행위는 중대한 죄가 된다(교리서 2413 참고).
일곱째 계명은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 등은 인류의 공동선을 위한 것들이다. 미래 세대들을 포함하여 이웃에게 쾌적한 생활 환경을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생물이나 무생물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교리서 2415 참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동물을 관리하도록 맡기셨다. 그러므로 식량을 구하고 의복을 마련하기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동물을 인간을 돕도록 길들일 수 있다. 인간 생명의 치료와 보호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동물을 의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실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행위이다(교리서 2417 참고).
동물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며 마구 죽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인간의 빈곤을 구제하는 데에 써야 할 돈을 동물을 위해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옳지 못하다. 동물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인간에게 쏟아야 할 애정을 동물에게 쏟아서는 안 된다(교리서 2418 참고).
〈 우리의 생활 〉
사람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기반 위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힘으로 생활유지에 필요한 재물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재산의 1차적인 소유권은 하느님께 있고, 2차적으로는 정당하게 번 사람이 소유권을 갖는다.
따라서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파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물건도 함부로 쓰지 못한다. 물건뿐만 아니라 남의 자유나 시간 및 노동력을 빼앗는 것도 도둑질이며, 뇌물을 받고 공익에 손해를 끼치는 것도 도둑질이다.
돈은 쓰기 위해서 버는 것이지 모으기 위해서 버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재물의 원래 임자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대로 재물을 나누어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대할 때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는 것이다”(마태 25,45)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진실을 왜곡하여 이웃의 명예, 자유, 권리,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계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실만을 말씀하시는’(잠언 8,7) 하느님을 믿고, ‘진리의 성령’(요한 14,17)을 받았으며, 스스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므로 진리만을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마태 5,37)고 하시며 진리에 따라 살기를 명하셨다.
인간의 행실과 말이 올바르다는 뜻의 진리는 진실, 성실 또는 솔직함이라고도 말한다. 진리나 진실은 인간이 행위에서 진실하고 말에서도 진실하며, 이중성과 위장과 위선을 피하게 하는 덕이다(교리서 2468 참고).
“상호 신뢰가 없다면, 곧 서로에게 진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더불어 살 수 없을 것이다”(성 토마스 아퀴노). 진실한 사람은 타인에게 마땅히 알려 주어야 할 것은 알려 준다. 진실은 말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비밀 사이에서 올바른 중용을 지킨다. 정의에 따라,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정직하게 진실을 밝혀 주어야 한다(교리서 2469).
진리를 거스르는 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에페 4,24).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기만과 시기와 온갖 비방을 버리십시오”(1베드 2,1).
거짓 증언과 거짓 맹세, 진실에 어긋나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법정에서 이러한 행위는 무죄한 이를 단죄하거나 죄인에게 무죄를 선고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행위는 정의구현과 재판관들이 내리는 선고의 공정성을 크게 위태롭게 한다(교리서 2476 참고).
이웃의 명예에 관련하여, 이웃의 도덕적인 결점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솔한 판단의 죄이다. 남의 결점과 과실을 모르는 사람에게 타당한 이유없이 알리는 것은 비방의 죄이다. 허위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해치는 것은 중상의 죄가 된다(교리서 2477 참고).
아부나 지나친 찬사나 아첨으로 타인의 악행과 나쁜 행동을 부추기는 말이나 태도는 금지되어야 한다. 중대한 악습이나 죄를 칭찬하는 것은 중죄이다(교리서 2480 참고).
그러나 통상적인 진의은폐(眞意隱蔽), 예컨대, 초대되어 가서 주인에게 ‘맛있게 먹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곧 낫게 되니 걱정하지 말라’, 돈을 빌려 달라는 노름꾼에게 ‘돈 없다’ 등은 진의가 상대의 이익을 위하여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거짓말은 속이려는 마음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거짓말은 인간과 진실의 관계 또는 인간과 이웃의 관계를 해친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침묵함으로써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으므로, 황금률에 따라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 주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분별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직업상의 비밀[정치가, 군인, 의사, 법률가 등이 알게 된]은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하에 알게 되었으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을 붙이지 않은 비밀도 손해를 끼치는 경우라면 합당한 이유없이 누설할 수 없다(교리서 2491 참고).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의식에 근거하여 대중매체를 통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보도되는 내용은 언제나 진실해야 하며, 보도방법도 합당하고 윤리적이어야 한다(교리서 2494 참고).
“진리를 거슬러 죄를 지은 사람은 보상을 해야 한다”(교리서 2509).
〈 우리의 생활 〉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거의 매일 다른 사람의 태도나 행동에 대한 증인, 고발자, 판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골로 3,9-10).
혼외의 정사를 꾸미는 계획과 결심을 금하는 계명이다.
국법은 사람의 외적 행위만 규제하지만 하느님의 법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규제한다.
아홉째 계명에 대해서 세 가지 방법으로 범죄할 수 있다. 과거의 사실을 회상하여 즐김으로써, 현재에 일어나는 욕정을 유발함으로써, 미래의 악행을 계획하고 결심함으로써 마음의 죄를 범한다.
〈 우리의 생활 〉
욕정은 유발하면 할수록 강해지고 억제하면 약해지게 마련이다. 음란한 그림, 영상, 책 등을 멀리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타인의 소유물을 침해할 계획과 결심을 금하는 계명이다.
타인의 재물을 사기, 횡령, 도둑질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끼쳐가며 돈을 모으거나, 타인의 재산을 파괴, 방화하기를 의식적으로 원하든가 계획 혹은 결심하는 것을 금한다. 또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불행[예, 자기가 상속받기 위해 누가 죽기를 바람]을 의식적으로 원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생활 〉
불로소득, 도박, 일확천금, 투기 등으로 재물을 모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근면과 성실로써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주 생각해야 하겠다.
보상의 의무
제5, 제6, 제7, 제8계명 중 어느 것을 범하여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손해를 끼쳤으면 갚아야 할 의무가 생긴다.
직접 갚지 못하면 간접적으로나, 제삼자를 통해서 갚을 수 있다. 이 보상의 의무는 고해성사를 받기 전에 이행하고, 할 기회가 없었다면 고백할 때 이를 밝혀야 한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1요한 5,3-5).




십계명 두 판을 깨트리는 모세 / Moses Smashing the Tables of the Law-렘브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