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 (1)
사목국 성서사목부
<이번 호부터 ‘도란도란 성경이야기’에서는 성서못자리 나눔터 교재를 참고문헌으로 하여 복음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쉽게 풀이하고 설명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책은 마태오 복음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의 복음서’로 불릴 만큼 교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교회의 전통을 많이 전해줍니다. 그런데 이 마태오 복음서는 누가 썼을까요? 교회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첫 번째 복음서의 저자를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마태오라고 전해왔습니다. 특히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파피아스(60~130년 무렵 생존)와 프랑스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오(130~200년 무렵 생존)는 마태오 사도가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마태오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태오 사도가 히브리인들의 고유한 언어(아람어)로 복음서를 썼지만 후대의 어느 누군가 그것을 지금 전해지는 바와 같이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는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썼을까요?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 복음서는 팔레스티나1)의 복음서로 간주될 만큼 팔레스티나적인 색채를 강하
게 띠고 있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고대 팔레스티나의 문화적종교적 세계의 고유한 표현과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그 세계의 관습과 풍속이 아주 명료하게, 또 아무런 해설 없이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마태오 복음서는 이후 10여 년이 지난 80~85년 무렵에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집필 장소는 이스라엘에 가까이 붙어 있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마태오 복음서를 쓴 배경이 된 공동체(이하 ‘마태오 공동체’) 안에서 전통적인 유다이즘2)과 갓 탄생한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심각하게 대립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마태오 공동체
에는 내부적·외부적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마태오 공동체는 유다이즘에서 탄생한 공동체입니다.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이즘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마태오가 자기 복음서에서 구약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 빈도입니다(130여개 구절의 구약 성경을 참조, 43개 구절 인용). 구약성경은 유다인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성경으로, 마태오는 구약 성경을 참조하게 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한편 마태오 공동체의 유다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유다교에서의 생활방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상반되는 두 풍조가 나타났습니다. 일부는 지나치게 세심할 정도로 율법주의 태도를 나타내면서 과거 유다교에서의 모습대로 고대 모세 율법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제는 유다교가 아니고 그리스도교이므로 자기들은 법률적인 의무를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복음서 저자는 옛 율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5,18).”
마태오 공동체에게는 외부적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들 주변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유다인 공동체들이 있었습니다.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이후, 바리사이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얌니아라는 곳에 모여 유다이즘을 다시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다시 생겨나게 된 이 유다이즘은 내부적으로 더 긴밀하게 단결했으며 외부 세력, 특히 당시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와도 맞섰습니다. 따라서 마태오 공동체 역시 유다이즘과의 분쟁과 마찰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오 공동체는 이방인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비슷하게 루카 복음서에서도 이방인들에게 개방된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마태오 공동체에서 관심을 보인 이방인들은 루카 공동체의 이방인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루카 공동체의 보편성의 대상은 이방인 세계에서 온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의 공동체는 아직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확신이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경배하러 왔던 첫 사람들은 동방 박사들이었고, ‘만나는 사람 아무나(22,9)’와 ‘모든 민족들(24,14;26,13)’이 마태오 공동체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9~48쪽.
1) 유다인이 살았던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르단과 이스라엘 두 나라에 걸쳐 있는 지방으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의 지역입니다.
2) 유다인들의 종교인 ‘유다교’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유다인’은 유다교를 믿는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하나였던 ‘유다지파’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5월호]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 (2)
사목국 성서사목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 임금으로 탄생한 예수님(마태 1,1-2,12)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관한 말씀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각 복음서에서는 그 복음서를 쓴 저자의 의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예수님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소개되는지를 살펴보면 그 복음서를 쓴 저자가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임금이신 예수님, 두 번째는 예언자이신 예수님,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이 세 가지 모습을 통해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먼저 임금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입니다. 복음서를 쓴 목적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더 굳게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왕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왜 임금인지, 어떻게 임금이라는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기 위해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 예고, 동방 박사들의 방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시대부터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가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족보(마태1,1-17)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요셉을 통해 예수님에 이릅니다. 이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 왕의 자손이며 그러기에 왕권의 상속자로서 합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구약시대부터 예언되었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알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마태1,21.25) 역시 이분이 하느님께서 약속해주신 오시기로 된 분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천사가 알려준 대로 요셉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널리 사용되고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는 ‘여호수아’의 그리스어 형태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하느님은 구원이다.’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라는 이름과 함께 ‘임마누엘’이라는 호칭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마태1,23).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 호칭은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노”고
성조들과 맺었던 약속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복음서의 맨 끝부분에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라고 기술함으로써 복음서 전체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마태2,1-12) 이야기는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예고에 뒤이어 소개되고 있는데, 동방박사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하여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임금이시라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다른 나라의 박사들까지 예수님을 임금으로 경배함으로써 예수님이야말로 세상 만물을 주관하는 왕권을 지니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다윗 왕처럼 나라를 막강한 힘을 가진 왕국으로 만들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로마에게서 해방을 얻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에서 해방을 얻게 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가 그들에게 왔으나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그분을 배척한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배척한 그분이 만물의 임금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탄생의 순간부터 다윗 왕의 자손이며 구약시대의 예언이 이루어지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정작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온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배척을 받았지만 이방인들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그분을 만물의 임금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우리 역시도 예수님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인 구원을 얻게 해줄 분으로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구원을 얻게 해주실 임금이십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9~48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6월호]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3)
사목국 성서사목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선포하는 예수님(마태 5,1-12)
마태오 복음서는 시작부터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소개했습니다. 임금으로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이야기가 마태오 복음 4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마태4,17).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부터 하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7장의 내용은 산 위에서 행해진 설교이기 때문에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 부릅니다. 유다인들에게 산은 전통적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장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태오는 산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나이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권위 있게 산에서 군중들에게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첫 부분에 나타나는 행복 선언은 8가지 참된 행복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진복팔단(眞福八端)’이라고 부릅니다(마태5,3-10). 여기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행복을 알려줍니다. 참고로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를 ‘하늘 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했던 유다인들의 풍습을 따른 표현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 즉 복음(福音)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지금은 시련과 박해와 갈등 속에 살아가지만 머지않아 하느님 나라에서 모두 보상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받는 고통은 힘들지만 희망이 있는 고통은 그토록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는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람이나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떤 것에도 애착을 갖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슬퍼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너무나 깊이 열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상심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비로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곤궁한 이들에게 자비롭게 행해야하며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 용서해줄 수 있을 때 최고의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태도도 올곧고 하느님을 향해야하지만 마음 역시 겉과 다르지 않게 하느님을 향해야합니다.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이기심 없이 좋은 상호 관계를 가짐으로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선한 것이 악한 것을 다스리도록, 그리고 욕망이 마음을 정복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때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의로움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실제로 추구하다가 그 결과로 당하는 박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오는 박해를 ‘이상한 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부터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되었던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약속된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구원을 얻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산상설교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불의를 못 본 체해서도 안 되며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무관심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75~99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7/8월호]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4)
사목국 성서사목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옴을 드러내는 임금, 예수님(마태25,31-46)
마태오 복음서에는 다섯 개의 담화문이 있습니다. 복음적 담화문(산상설교, 5-7장), 사도적 담화문(10장), 비유로 된 담화문(13장 1-53절), 교회론적 담화문(18장), 종말론적 담화문(24-25장)입니다. 그중 마지막 종말론적 담화문은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과 종말의 표징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24,3)에 구약성경에서 미리 예언된 말씀들을 떠올리게 하십니다(24,4-31). 그리고 종말의 때를 묻는 질문(24,3)에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24,36). 이 말씀들은 종말이 언제 일어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금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1년 뒤에 최후의 심판이 있다니 늦어도 6개월 전에는 준비해야지!’가 아니라 언제 최후의 심판이 있을지 모르니 지금부터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이야기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탈렌트의 비유(25,14-30)는 종말의 현실성과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마태오에게 깨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7,21-23 참조). 그보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응답하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어진 탈렌트를 힘껏 발휘할 때 하늘 나라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쓴 당시 마태오 공동체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조만간 재림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으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재림이 늦추어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자 점점 긴장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악한 행동을 일삼기도 했고(24,48-49 참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진 채 나태하게 살아갔습니다(25,3 참조). 또 주변에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서도 깨우치려 하지 않고 나만 충실하게 살면 된다는 식으로 개인적인 영성에 치중하기도 했습니다(25,24-25 참조). 마태오는 이러한 교회의 현상에 직면하여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점보다는 심판이 엄중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교회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25장 31절부터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25,31-46)는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세상과 그리스도 공동체를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권이 지향하는 이상(理想)입니다. 위대한 임금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얽매인 이들의 수호자이시며, 하느님 통치의 특징은 보잘것없고 작은 이들을 특별히 보살피는 것입니다.
이 선언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의 계명 두 가지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22,37-40 참조). 이제부터 가장 작은 행위조차도 하느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라는 유일한 기준으로 최후 심판 때 판결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든지 그 사람과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과도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 사람은,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의 짐을 나누어 지려하고(11,28-30 참조)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며(5,3-12 참조) 그로써 하느님을 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이웃 앞에 서 있을 때마다 천상의 임금인 심판관 앞에 서 있는 것이며, 심판과 각자의 최후 운명은 현실적으로 지금 이 순간부터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종말이 언제, 어떤 식으로 오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맞이할 주님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입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101-123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