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5)
사목국 성서사목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 죽음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님(마태 27,27-31.35-44.50-54)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전하는 데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마태21-28; 마르11-16; 루카19,28-24,53; 요한12,12-20,19). 그 이유는 모든 복음서의 저자들이 복음 역사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시점부터 점차 수난 이야기가 시작될 분위기를 만들어 갑니다. 예루살렘은 대순례가 행해지던 곳으로(시편122 참조), 후기 예언자들은 그곳을 종말론적 심판의 장소라고 말했습니다(요엘4,9-21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 백성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고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어야 하는 곳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서시며 이제 하느님의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마태21,4).”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온갖 수난 역시 구약의 예언들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53,2-12 참조).’
그리고 마태오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구경꾼들의 입을 통해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마태27,43).’라며 시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께 맡겼으니 그분께서 그자를 구하시겠지. 그분 마음에 드니 그분께서 구해 내시겠지(시편22,9).”
이처럼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미 예고되었던 사건임을 유다인들이 떠올리도록 합니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마태26,56).”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대로, 온갖 수난과 죽음을 기꺼이 침묵 중에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 앞에서 보이신 침묵은 체념하고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놓인 자의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희망 속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려는 희생과 겸손의 침묵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에 따른 신기한 현상들을 지켜보던 로마의 백인대장과 병사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객관적으로 결론짓는 고백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판결이 난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유다인들의 임금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약 50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며 그리스도교와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유다인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반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터무니없이 날조된 사건이라고 비방하여 그리스도교를 무너뜨리려고 책동하였습니다(마태28,11-15 참조). 이에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이런 상황으로 약해진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의 신앙을 깊게 하고 유다인들의 억지에 대응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상세하고 길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당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굳은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욕심이나 인간적인 조건 없이 십자가 위에 계신 겸손과 희생의 임금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현재에 구현하는 복음적 삶입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125-150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10월호]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 (6)
사목국 성서사목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자, 예수(마태 5,38-48)
지난달까지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중에서 임금으로서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예언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침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구약의 내용을 몸소 이루시고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을 계시하시는 예언자로 나타납니다. 예언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산상 설교(복음적 담화문, 마태5-7)에서부터 소개되기 시작합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최초의 유다인 예언자인 모세와 연결하여 묘사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율법서인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도 똑같이 다섯 개의 담화문으로 나눕니다(복음적 담화문, 사도적 담화문, 비유로 된 담화문, 교회론적 담화문, 종말론적 담화문). 마태오는 예수님을 새로운 하느님 백성에게 새 법을 선사하는 새로운 모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세로서의 예수님은 산상 설교(복음적 담화문)에서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완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율법은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일상생활 중에서 새로운 행동 양식을 취하도록 요구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시대, 종말을 준비하는 시대에 들어섰으므로 그에 걸맞게 살아가야 하며 하느님 나라가 갑자기 오는 때에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존에 모세가 전해준 유다인들의 율법은 변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율법이 지시하는 바들을 연구했고 그 모든 규정들을 빈틈없이 일상생활에 적용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율법은 사람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이 되어버렸습니다. 율법의 준수와 형식만 강조되었을 뿐 본래 율법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율법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진정한 율법을 완성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투로, 옛날의 사고방식에 맞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드러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8-42).”
구약 성경의 규정이었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탈출21,24; 레위24,20; 신명19,21 참조)’는 하나의 법령이었습니다. 이 법은 손해나 상해를 입었을 경우에 이의 처벌은 실제로 해를 입은 정도를 넘어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즉, 정의로운 상태에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법에 편승해서 반드시 복수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이 제시하는 바를 근본적으로 파고들어 전혀 새로운 비폭력적인 법을 끌어내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것은 구약의 엄격한 규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또 다른 길, 사랑에 입각한 사고방식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선(善)으로 되갚는 방법, 그리고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공동체가 그들이 실제로 겪어야 했던 세상의 불의와 폭력을 사랑으로 없애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고 완성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다음의 성경 구절로 결론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여기서 마태오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완전해야 한다고 한 것은 그들이 갈라짐 없이 일편단심으로 오로지 하느님께로만 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온전히, 갈라짐 없이, 차별을 두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느님처럼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마태오는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라는 구절로 표현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 가르침을 증거하고 완성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고 더 나아가 사랑으로 대응할 때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완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153-175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11월호]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 (7)
사목국 성서사목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 하느님 나라의 심판과 희망을 선포하는 예언자로서의 예수님(마태 10,34-42)
마태오 복음 10장은 마태오 복음의 5가지 담화문 중 하나인 선교적 담화문(사도적 담화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5-9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와 기적 행위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선포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선교적 담화문에서는 앞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권위가 제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서 선교 사명도 주어집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선교적 담화문에서 궁극적으로 교회가 선교 사업을 어떤 정신으로 시도하고 수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음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즉 제자들의 선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 활동과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도록 파견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10,1).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10,5-7).
그런데 마르코 복음이나 루카 복음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에서는 선교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 선교를 위해 떠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선교를 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마태11,1).
한편 마태오 복음 10장 34절 이하에서는 미카 예언자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하느님 심판의 결정적인 때가 온 것으로 표현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10,34-36).”
일찍이 미카 예언자는 아주 애통해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을 묘사했습니다. 예언자는 이러한 타락에 대해 하느님의 심판이 이미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 슬프다! 나는 여름 과일을 수확한 뒤에 남은 것을 모으는 사람처럼, 포도를 딴 뒤에 지스러기를 모으는 사람처럼 되었건만 먹을 포도송이도 없고 내가 그토록 바랐던 햇무화과도 없구나.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 모두 남의 피를 흘리려고 숨어 기다리고 저마다 제 형제를 그물로 잡는다. 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 데에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 이처럼 그들은 모든 것을 그르친다. 그들 가운데 가장 좋다는 자도 가시덤불 같고 올곧다는 자도 가시나무 울타리 같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재앙의 날이 다가왔다. 이제 그들에게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 주시리라(미카7,1-7).’
하느님 나라는 마치 칼처럼 갈라놓는 형태로 옵니다. 그것은 죄와 악에 대한 결단의 칼이며 배척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을 갈라놓는 심판의 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평화가 요구하는 것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결정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혈연관계에 기초를 둔 가족 관계가 사 랑과 나눔의 가족 관계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9-50).”
마태오 복음 10장 38절에서 마태오는 자기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십자가’를 언급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
마태오 공동체에게 십자가를 져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 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순종 이상 의 의미로서 세상의 불의에 참되게 저항하는 정신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후의 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그렇게 사셨고 또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이제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견되어 그분의 예언자적 삶을 그대로 살아갈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미 부활의 희망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사명을 잘 수행해나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상 을 약속하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1-42).”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177-198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12월호]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 (8)
사목국 성서사목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 위선자들에게 불행을 선언하고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예언자, 예수님(마태23)
복음서 곳곳에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며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단죄하고 꾸짖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율법에 대한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유다교에서 하느님의 뜻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곳은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당신 백성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시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처럼 유다교의 경건한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여겼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외면하는 행위이며 스스로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경건한 이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규칙에만 집착하다 보니 사람들을 질식시키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율법의 참된 정신이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죄인이 다시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의인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에 따라 회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르려는 노력과 회개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한 인간의 죄나 잘못이 그를 멀리할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지도자들이 멀리하던 죄인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처신이 죄인들과 소외받던 이들에게는 아주 새로운 희망의 기틀이 되어 주었지만, 유다교의 지도자들에게는 종래의 신앙과 기존 질서를 해체시켜 버리는 일로 보였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 자신들의 공로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느님의 은총을 거저 받는 선물로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자신들이 기대해 온 바와는 너무나도 다른 하느님의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23장에서는 이처럼 완고한 유다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과 불행 선언이 나타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1-7).”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마음의 태도를 고발하십니다. 이 대목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신앙생활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리와 신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거짓된 행위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허영으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은 빨리 위선을 벗어 버리고 누구보다 자신을 낮추는 봉사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8-12).”
뒤이어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인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거짓 의로움, 즉 위선에 대하여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마태23,23).”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겉보기에, 또는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하느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자선, 기도, 단식 등과 같은 열정적인 신앙행위도 자신들의 공적을 드러내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행했기 때문에 비뚤어진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종교 지도자였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율법을 인간의 인습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을 하느님께 순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예속시켜 하느님의 권위를 빼앗는 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올바른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회개를 촉구하던 예언자의 모습처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 복음 말씀을 들은 우리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내 욕심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합리화시키며 살아가는 신앙인입니까? 바쁜 일상생활 중에 신앙생활은 이정도만 하면 된다고 내 맘대로 판단하고 하느님의 뜻을 왜곡시키지는 않았습니까? 매사에 내 욕심을 자제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199-222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