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화와 사회교리

2012. 3. 4. 오후 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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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와 사회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교회본연의 사명이다. 복음 선포는 교회가 임의적으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이가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명에 의해 교회가 맡은 의무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요소가 있다.
즉 어떤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복음화 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 선포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 또는 단편적으로 규정할 때 복음 선포는 빈약해 지거나 그르치게 될 위험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선포의 핵심은 복음 그 자체와 복음 전달이 될 사람들에 대한 성실한 자세임을 밝히고 있다. 즉 사람이 되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선물인 구원을 모든 이에게 베푸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는 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열정과 사랑은 복음을 듣는 이들의 상황을 바라보도록 이끈다. 왜냐하면 복음선포가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 생활과의 관계, 즉 복음과 개인적 사회적 생활 사이에 있는 상호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복음 선포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화되어야 할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복음 선포에 있어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 사회의 기본 세포인 가정, 노동과 경제, 정치와 국제 관계, 평화, 환경, 정의, 개발 등에 대하
여 명백한 견해를 표시하는 이유인 것이다.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추상적 차원이나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는 것이다.
즉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은“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인 인간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에서 결정되고 이루어지고 겪는 일들에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발표한‘간추린 사회교리’가 가르치듯이, 교회는 사회교리로 복음을 선포하고 사회 관계의 복잡한 구조 안에 복음을 현존시켜야 한다. 즉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하여 구원의 길에 있는 인간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첫째가는 유일한 목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사회교리는 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도구이고, 필수적인 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교리의 원리(1)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끄는 원리들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어떠한 원리 혹은 원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판단도 바뀌고 삶의 방식이 변하며 운명
까지 결정될 수 있다. 사회교리 역시 자신의 고유한 원리를 지니고 있다. 사회교리의 원리들은 교회의 근원적인 샘인 성경과 성전으로부터 비롯한다.
인간의 존엄성의 원리, 공동선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참여의 원리 등이 교회가 세상 속의 사람들을 보
면서 활동하는데 있어서 방향타가 되어주는 사회교리의 원리들이다.
사회교리의 원리들 가운데 인간 존엄성의 원리는 다른 모든 원리들의 근원이 된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신앙인이든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사람이 존엄한 이유를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비교할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어떠한 이유에서도 양도할 수 없는 존엄함을 부여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의 모든 분야와 표현의 중심이 인간이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고, 교회는 사회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인간들 안에만 있고, 인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무엇보다도 침해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을 천명하는 원칙에서 발전한 것이다.
인간 존엄의 기원인 하느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드러내신다. 즉 삼위일체의 친교는 하느님께서 삼
위의 관계 속에서 온전한 내어줌과 받음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심을 가르친다. 사람은 하느님 사랑의 친교에 부름을 받은 것이고, 그 모습을 사람들
사이에서 살 때 참된 행복을 누리며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공동선의 원리는 삼위일체의 친교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살도록 이끈다. 공동선이란“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를 뜻한다. 모든 이와 각 개인에게 속하는 공동선은 함께 해야만 달성할 수 있고 증대할 수 있으며, 미래에도 그 효력을 보존할 수 있으므로‘공동의’것이다. 한 개인의 도덕적 행위는 선을 행함으로서 성취되는 것처럼, 한 사회의 행위도 공동선을 이루는 것일 때 완전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다른 사람과‘더불어’, 다른 사람을 ‘위하여’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더불어’존재하며, 서로를‘위하여’비우고 내어주는 것처럼, 그 모습을 가지고 창조된 사람 역시 같은 모습을 살아갈 때 참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회교리의 원리(2)
공동선의 원리가 지닌 무수한 함축적 의미 가운데에서도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
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즉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한다. 따라서 지상 재화의 사용에 있어서 우리는 주어진 재화를 보편적 목적에 부합하게 돌리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 개인의 고유한 권리로써 사유재산을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유재산권을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
다. 이러한 전통은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재산권을 규제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은 본질적으로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칙을 존중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결국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교회는 가르쳐 왔다.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리는 사람이 재화의 기원과 목적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이끌고, 모든 사람이 충만한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이바지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요한 바오로 2세는 재화의 공동 사용권은“모든 윤리적 사회적 질서의 제1원칙”이고, “그리스도교 사회 교리의 특수한 원칙”이라고 가르친다.
보조성의 원리는 사회교리 회칙이 나온 이래 지속적이고 특징적인 지침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어 왔다. 보조성의 원리는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회에 맡길 수 없는 것처럼 한층 더 작은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
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해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즉 모든 상위 질서의 사회는 하위 질서의 사회들에 대하여 도움의 자세를 갖추어야지 흡수하거나 과도한 개입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보조성의 원리가 잘 이루어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참여이다. 참여는 모든 사람이 책임을 가지고 공동선을 위하여 의식적으로 이행하여야 할 의무이다. 이러한 참여는 사회 생활의 특정 영역에만 제한되거나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노동을 포함한 경제 분야, 정보와 문화 분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고차원적 사회 정치 생활 분야에서의 성장, 특히 온 인류의 성장을 위한 내적 원동력으로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참여의 원리는 다시 연대성을 요구한다.
연대성은 인간의 타고난 사회적 본성,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과 권리, 그리고 일치를 향한 개인과 민족의 공동 노선을 특별히 강조한다. 연대성은 진정한 도덕 덕목 가운데 하나로 이 원리를 바탕으로 개개인과 민족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죄의 구조를 극복해야 한다. 즉 죄의 구조는 법률, 시장의
법칙, 사법 체계의 수립과 적절한 개정을 통하여 연대성의 구조로 정화되고 전환되어야 한다.

평화와 사회교리
앞선 여섯 번의 연재를 통해 사회교리의 기원과 원천 그리고 원리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가르침을 구체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우리가 평화의 섬이라고 부르는 제주도의 강정 마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보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휴가나 여행으로 가고 있는곳이 제주도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풍경을 제주도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코스의 올레길, 푸른 빛의 바다와 섬, 한라산, 해녀, 바람과 돌 등은 제주도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더욱이 제주도는 유네스코에 생물권 보전지역, 세계 자연유산, 세
계 지질공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보전 가치가 풍부한 섬이다.
그런데 이토록 아름답고 평화의 섬이라고 부르는 제주도가 4년 넘게 해군기지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제주도 남쪽 서귀포시에 속한 강정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물이 부족한 제주도의 다른 곳과는 달리 강정(江汀)마을은 지명에도 나타나듯 물이 풍부한 마을이다. 서귀포 시민들에게는 식수원으로, 은어들에게는 산란지로, 천연기념물인 원앙들에게는 서식지로 자리를 지켜왔다. 또한 마을 앞에 있는 범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인 연산홍 군락지와 분홍맨드라미 등 멸종위기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범섬 일대를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다. 또한 이 곳에는 사람들이‘가장 풍경 좋은 코스’라고 격찬한 올레 7코스가 있는데, 그 코스 한복판에 해군기지가 들어설예정이다.
세계가 인정한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에, 그래서 정부가 내년 이곳에 세계 자연보전 총회를 유치하려는 곳에 평화의 반대인 군비를 상징하는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정마을 주민들과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정부의 계획에 반대를 하고 있다.
이들이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또 있다. 강정을 해군기지 후보지로 결정하는 과정과 절차가 너무 비민주적이고 탈법적인 방법으로, 주민들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일방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또한 해군기지를 반대했던 마을 주민들에 대한 고소와 고발, 회유와 협박들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경우 최근 갈수록 심화되는 아시아에서의 미, 중, 일의 안보 경쟁 현실을 감안하면, 제주도는 더 이상 평화의 섬이 아니라, 동북아의 새로운 군사적 긴장의 전초기지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근 미국 내에서도 제주의 해군기지가 미국을 위한 기지라는 다양한 보도들이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의 문제를 교회의 시각에서 바라보자. 우선 해군기지 후보지선정에 있어서 비민주적인 절차를 살펴보자.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유치를 위해 최초로 논의가 된것은 2007년 4월 26일에 열린 임시총회였다. 당시 임시총회에서 마을회장은 주민 86명을 모아놓고 만장일치로 기지 유치안을 가결시켰다.
그런데 당시 주민 대부분은 총회에서 해군기지 문제가 논의되는지조차 몰랐다. 강정마을의 투표권이 있는 주민은 1200여명인데, 86명의 의사가 모든 주민의 의사로 둔갑한 것이다. 그 이후로 해군기지 유치안은 마을 주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교회는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높이 평가하여왔다. 하지만 참된 민주주의는 단순히 일련의 규범들을 형식적으로 준수한 결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 존중, 정치 생활의 목적이며 통치기준인 공동선에 대한 투신과 같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감을 주는 가치들을 확신 있게 수용할 때 가능함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제주도 해군기지유치 과정에서 있어서 간과하고 무시했던 과정들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미 지난 주에 제주도의 생물학적이고 자연유산 측면으로서의 가치를 언급하였다. 따라서 제주도의 해군기지 건설은 4대강 사업에서도 무시되었던 것처럼, 환경을 지키고 보존하여야 하는 의무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책임을 맡기신 것은 자연과 온갖 생물을 함부로 다루거나 무분별하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임금이 자기 백성을 돌보고, 목자가 자기 양들을 돌보듯이 자연을 돌보아야 함을 교회는 늘 가르쳐왔다.
마지막으로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에는 평화의 문제가 그 가운데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과학 무기의 발달은 늘 전쟁을 억제하기보다는 공포와 잔혹성을 증가시키며, 무차별한 파괴를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무기의 비축을 가상의 적에게 전쟁을 단념하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의 생각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음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또한 교황 바오로 6세는 군비 경쟁에 열을 올리는 현실에 개탄하면서,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과 민족들의 발전을 위해 평화의 기금으로 돌릴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군비의 증대가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더욱이 우리 스스로 평화의 섬이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은 심각한 해악임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많은 주교님들과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주도의 강정 마을을 방문하여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고 있음을 함께 기억하자.

노동, 창조의 자리 그리고 사회교리
며칠전 인터넷 방송에서 한 기자의 가슴 저린호소가 흘러나왔다. 먼저 그 부분을 함께 나누어보자. “지난 2년간 평택에서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1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배우자, 부모 등 가족의 자살까지 합치면 사망자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평택은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가장
자살률이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2년전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2,500명이 해고된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살아남은 해고 노동자들, 그 중에 일상적으로 자살 충돌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70%가 넘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성화된 분노와 무력감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것은 아이들이 보이는 불안과 공포, 두려움입니다. 파업 후 버스를 타지 못하는 6살짜리 아이, 해만 지면“아빠 어디야, 경찰 조심해”하고 말하는 아이, 30분마다 아버지한테 전화를 해서 우는 아이도 있답니다.
또 4살 동생을 내내 업고 다니는 초등학생 아이가 있구요, 아빠를 지켜야 한다며 허리춤에 장난감 총과 칼을 차고 다니는 5살짜리 아이도 있습니다. 더 이상 죽게 놔둬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을 더 이상 불안과 공포 속에 방치해 놓아서도 안됩니다.”
이는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쌍용자동차 회사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심리, 정신 치유를 위한 동참‘( 와락’프로젝트 :트 윗 계 정 @warakproject, 이 메 일
warakproject@gmail.com
)에 대한 호소이다.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기자의 호소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비단 쌍용자동차에서 행해진 것만은 아니다. 희망버스로 잘알려진 한진 중공업의 김진숙씨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십여 년 사이 수만 명에 달하던 노동자들이 800여명만 남고, 대부분은 비정규직이 되었다.
이 사이에 많은 노동자들은 동료의 자살과 회사의 고소, 고발 등으로 쓰라린 아픔의 시간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행해진 회사의 조치는 경영의 위기라고 하기에는 커다란 의문을 남긴다. 올해초 270여명을 다시 희망퇴직으로 정리한 후 나머지 170여명을 정리해고 통보한 다음 날, 사주와 주주들은 174억의 고배당을 챙겼기 때문이다. 결국 김진숙씨는 노동자들의 아픔과 권리를 알리기 위해, 올해 1월의 차디찬 밤에 홀로 크레인에 올라가 아직도 그곳에서 세상과 대화를 하고 있다.
또 하나의 현상은 미국 금융자본의 중심인 월가에서 시작된 시위이다. 월가 시위의 첫 쟁점은‘1대 99’였다. 즉 금융자본주의의 탐욕에 맞서, 함께사는 세상을 위한 외침이었다. 한 달 전에 시작된 시위는 전 세계 85개국으로 퍼져나가 각국의 상황에 맞는 의제를 포함시키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20 대 80’의 세상이라고 하였지만, 10년사이에 19가 80의 세상으로 들어온 것이다.
지난 주에 언급했던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의 해고 노동자 사건 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주변에는 이와 비슷하게 아픔을 간직한 이들을 어렵지 않게만날 수 있다. 1400여일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 우리 교구 안에 있는 유성 기업 노동자들, 대법원 판결에 따른 정규직화 요구를 하다 도리어 구속되고 해고되고 징계당하면서 울산 현대차 공장 앞에서 끌어가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 홍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농성하던 비정규직 청소용역 노동자들 등 참으로 많은 이들이 아픔을 머금고 일을 하고 있다.
이는 어느 특정인들의 이야기가 아닌 나와 나의 가족의 이야기 되었고, 바로 내 옆에 있는 이웃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지난 세기 말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로 인하여, 전에 많이 들어보지 않았던 비정규직 노동이 사회 전반에 걸쳐 퍼졌고, 이제 비정규직 노동은 거부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사회에서 88만원 세대는 그것을 방증하는 표현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비정규직 노동은 이토록 사회 전반에 걸쳐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을까?
시장 경제는 늘 자본과 노동의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경기가 좋을 때는 자본과 노동이 어느 정도 공생관계를 유지하지만, 경기가 좋지 않을 둘의 관계는 충돌하곤 한다. 더욱이 지속적인 경제위기는 이 관계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경제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선택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들이 전세계적으로 급속도로 퍼진 것은 불과 30여년 안팎이다.
이 과정 속에서 노동에 대한 유연화 정책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키게 된다. 경제 상황에 따라 노동을 유연하게 함으로 위기에 대응한다는 정책이다. 이 때 노동은 자본을 위한 도구가 되버리는 결함을 낳게 된다. 즉 이윤을 위해 노동을 손쉽게 조정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종류의 비정규직 노동이 양산되고, 비정규직에 속한 노동자들은 늘 불안함 속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하여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교회의 사회교리 발전의 역사는 어쩌면 초기부터 이 둘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하여, “자본은 노동 없이 있을 수 없고, 노동은 자본 없이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늘 이 둘의 상호 보완성을 언급하면서, 교회는‘노동은 자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에 대하여 ‘교회의 가르침이 남긴 유산의 일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자본과 노동의 협력으로 얻어진 것을 어느 한편에만 귀속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며, 또한 어느 한편이 다른 편의 노력을 무시하고 모든 이익을 독점한다는 것은 정의에 크게 어긋난다”고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에게“노동은 기본권이고 선이며, 인간에게 합당한 유용한 선”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노동은 인간이 인간 존엄을 표현하고 증진하는 적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노동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은 노동이 언제나 인간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본질상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서, 재산권을 갖기 위해서, 인류 가족의 공동선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 선이며, 노동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완전 고용’은 정의와 공동선을 지향하는 모든 경제 체제에서 의무적인 목표이다. 그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권이 방해받거나 제도적으로 부인되는 사회, 노동자들에게 만족스러운 수준의 고용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제 정책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윤리에 합당하다고 인정할 수없으며, 사회적 평화를 달성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우리가 노동에 대해 생각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노동은 다름 아닌 하느님 창조의 일을 이어 받은 인간의 거룩한 소명이라는 것이다.
미사 때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전례인 미사 안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축성할 재료인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수고와 땀을 통해, 즉 노동을 통해 얻어진 것을 제단에 바쳐지는 것이다. 그것이 미사 안에서 사제의 축성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고, 우리는 또한 그것을 받아 모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기념하는 미사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성사이고, 죽음에서 다시 생명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낳게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를 살도록 이끈다.
미사 안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이루는 빵과 포도주가 우리의 수고와 땀, 즉 노동을 통해서 제단에 바쳐진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한다. 우리의 노동은 단순히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을 위함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하느님 창조의 역사와 함께 그 완성인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이끄는 거룩한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노동은 외적인 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나와 나의 가족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를 사랑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일, 즉 성사가 되는 중요한 협력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교회는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단순히 자본의 이익만이 아니라 인류 구원이라는 거룩한 사명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의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상병 루도비꼬· 전의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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