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와 바늘 귀

2012. 3. 8. 오전 11:03:42

글자

 

 
(2010년 5월 24일  연중 제 8주간 월요일)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라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첨부이미지첨부이미지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그대로 ‘구원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과 구원은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사로잡히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재물로 자선을 베푼다면 오히려 축복의 원인이 됩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재물만이 아닙니다. 재능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습니다. 그것에 ‘노예가 되면’ 언제나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노예가 되는 것의 시작입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면 노예 상태로 진입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이의 아픔은 외면한다면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청년은 순박했습니다. 계명에 충실하며 순종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외곬의 성향’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재물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재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재물을 ‘있게 하신’ 주님의 힘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나누는 자유로움을 체험한 뒤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승과 저승의 삶이 바뀔 수 있는 ‘만남’을 그는 놓치고 있습니다. 재물에서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진정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사막으로 탈출한 낙타 

 
십자가를 안테나로!

  얼마 전에 영화배우 이은주씨가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자살동기가 ‘지나친 노출연기로 인한 우울증이다’, ‘금전문제다’ 등 여러 가지 추측이 무성하였지만 그녀의 이런 유서내용이 발견되어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합니다. “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 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나도 돈이 싫어...”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새해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대신에 “부자 되세요!”, 혹은 “돈벼락 맞으세요!”라는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복음(마르 10, 17-27)에서 영생을 묻는 젊은이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라’라고 하시며 ‘참으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선 이 비유에 관해 김호경님의 묵상을 들어봅시다.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비유는 마태오 복음(19장 24절), 마르코 복음(10장 25절)과 루가 복음( 18장 25절)에 각각 병행구가 있습니다.  세 복음서 모두가 매우 인상깊고 과장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성서학자가 이 과장된 표현이 적절치 못하다고 하여 필사자들의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나름대로는 합리적으로 고쳐보려고 다음과 같은 시도를 해 보았다고 합니다:


   1) "낙타"를 뜻하는 그리스어 "까멜로스"를, "밧줄, 끈"의 뜻을 가지면서 비슷한 발음인 "까밀로스"로 바꾸어 읽기

   2) "바늘귀"를 예루살렘 城의 城壁에 있는 보행자 전용의 "좁고 낮은 문"이라는 城門 이름으로 해석하기

   그런데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오히려 이런 시도가 억지해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고 합니다.  그런 결론을 내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이런 엉뚱한 과장된 표현이야말로 유다인들의 기호에 딱 맞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탈무드>에는 "바늘귀를 지나는 큰 코끼리"라는 어귀가 있으며, 같은 마태오 복음서 23장 24절("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같은 곳에서도 이런 표현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있는 그대로 두면서, 사물의 극단적인 곤란함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사실상 불가능함을 표현하기 위한 과장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즉 마태오 복음 19장 24절은 재산을 자신의 사욕의 도구나 악덕의 미끼로 사용하고 있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라는 해석보다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음을 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 최고의 부자로 경주 만석(萬石)꾼 최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3대를 못간다’는 속담과는 달리 이 집안은 조선 중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12대에 걸쳐 300년 이상 부(富)를 누리고 지켜 왔다고 합니다. 그 비결(?)에는 ‘재물은 일만 석 이상 갖지 않았고(검소), 벼슬은 진사(進士) 이상 하지 않았으며(겸손), 주변 몇 십 리 내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베풀었다(선행)...‘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비록 부자(낙타?)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 즉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와 선행을 베풀라’라는 말씀을 실천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참고로 우리가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동물원’에서 해방되어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막’으로 나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박정현님의 ’엄마낙타와 아기낙타‘를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엄마 낙타와 아기 낙타>


엄마 낙타와 아기 낙타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기 낙타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큰 발톱이 세개나 있어?"

"아가, 그건 우리가 사막을 걸을 때 모래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있단다."

아기 낙타가 다시 물었다.

"엄마, 그럼 내 길다란 눈썹은 왜 있어?"

"아가, 그건 우리가 사막을 여행할 때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우리 눈을 보호해준단다."

아기 낙타가 또 물었다.

"엄마, 그럼 내 등에 큰 혹은 왜 있는거야?"

"아가, 그건 우리가 사막을 오래 여행할 때 섭취할 양분을 그곳에 저장해 놓는단다."

아기 낙타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엄마!"

"왜, 아가?"  

. "그런데 우리... 동물원에서 뭐해??"   

  낙타와 바늘 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아마 이 구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리고 그 센 강조를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보려고 많은 시도를 하기도 했다.
개신교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로 그 부류에 속하는데 그들은 낙타(약대)라는 단어가 밧줄을 뜻하는 단어와 비슷하니 아마 밧줄을 낙타로 잘못 적은 것 아닌가 여겼다. 바늘귀의 설명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여러 문들 중에 문이 협소해서 ‘바늘귀’라는 별칭을 얻은 문이 있었다고 말하며, 낙타가 바늘귀라는 문을 지나가려면 모든 짐과 사람이 내려야만 겨우 낙타만 통과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부자가 모든 재산을 나눠 주어야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를 비유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바늘귀는 실제 재봉에 쓰는 바늘의 귀가 아니라 무기인 창에  솔기를 다는 구멍이 있는데 이를 바늘귀라고 불렀다는 설명도 추가한다. 이러한 설명은 어찌 보면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 해보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 대목 뒤에 바로 나오는 질문이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이다. 제자들은 그 시대의 유대인들이 지녔던 의문을 대표해서 묻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재물과 부자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전혀 새로운 가르침에 의아했던 것이다. 축복받았다고 여겨지던 사람들마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것인가?


  인간의 어리석음 중에 하나는 바로 모든 대상을 소유로 보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주 하늘나라와 영생을 소유의 대상으로, 획득 가능한 그 무엇으로 보았다. 특히 부자 청년은 자기가 율법에서 말하는 계명을 다 지켰으니(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시지만) 제 생각으로는 충분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놓친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 선한 스승님께서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재물처럼  하늘나라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인 것이다.


  제자의 질문에 예수께서 “눈여겨보셨다.(emblepas)"라는 단어를 저자는 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중요한 대목을 말하실 때 저자가 쓴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부자에 대한 경고를 단순히 부의 축적을 경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무엇인가 옹색하다. “소유” 와 “따름” 이 서로 병존할 수 없는 요구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제대로 된 “따름”엔 다른 것을 모두 비워야 한다.


  ‘앤드류 마리아’ 가 지은 이야기 중에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는 제목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하느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겠다.


한 신비가가 주님의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주님은 문을 열지 않고 닫힌 문 안쪽에서 말씀하셨다.

"뭐라도 가지고 왔느냐?"

"네, 제겐 저의 덕행이 한 자루 있습니다." 그래도 열어주시지 않았다.

"네, 주님. 저의 좋은 행실과 거룩한 공적이 한 자루 있습니다."

"아주 고무적이야. 하지만 아직 문을 열어 줄 수 없네."


"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저의 명상과 간절한 기도가 한 숟가락 있습니다."

"너 참, 생각이 깊어졌구나. 하지만 아직 문을 열어 줄 수 없네."

신비가는 한 번 더 떠났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왔다. 그는 다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주님, 제발 들여보내 주십시오."

"뭐라도 가지고 왔느냐?"

"주님, 제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들어오너라!"

드디어 주님은 이렇게 소리치며 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덕행과 공적, 명상과 기도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화이다.  주님을 제대로 따르려면 모든 종류의 소유욕을 덜어내야 한다. 그저 주님과 일치하는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된다. 하느님은 인간더러 본성마저 바꾸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눈으로 하느님 나라의 사정을 “눈여겨보라(emblepo)"는 요구이다. 모든 것을 제 것이 아닌 선물로 감사히 받아들이라는 요구이다.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내 놓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비록 세속적으로는 낙마하고 실명을 했지만 주님을 만난 사울)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필립 3, 7-9)
 

 아라비아 낙타(육봉이 하나입죠)


 *낙타(약대) 대한 상징*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다. 

(마19장23-24절,)

약대(낙타)는 성경에서 구약에 57회, 신약에는 6회 만 언급을 하고 있다.

낙타(CAMEL) "히-까말'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영어 번역본에는 "낙타"로 나와 있습니다. <히-수컷은=빠랄이라 부르며 -암컷은=버크라>라고 한다.

이외에 단봉(單峰)낙타{KJV,ASV}, 낙타새끼{RSV}가 언급 되지만 이 부문은 이사야 60장 6절과 에례미야 2장 23절에만 나와있습니다.

낙타라는 말은 <헬:카멜로스>로서 모든 영어 번역본에 나와 있으나, 원래 낙타(ca-mel)라는 말은 어원이 히브리어로서 헬라어를 거쳐 파생된 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19장23-24절 본문)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동안 수 십년씩의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때로는 목사님들로부터 들어보셨을지도 모릅니다. 천국가는 문이 너무 좁아서 성문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배워왔다면...그것은 분명히 불충분한 증거라고 사전은 말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셨을까?
참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디 비유를 하실대가 없어서 큰 덩치의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간다고 하셨을까?

그런데요, 성도님들,
우리 예수님은 없는 말씀을 절대로 하시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모두가 이유 있는 말씀만 하셨고 실제로 전개되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물론 부자들에게 가진 재물을 풀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약대는 수명이 깁니다. 보통은 50-60년. 길게는 80년도 넘기는 약대가 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자기 발로 걸어다니기만 하면, 그때부터 인간을 위한 봉사를 합니다. 등에 짐과 사람을 태우고 죽는 날까지 인간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리고는 종말에는 자기들이 희생하고 봉사했던 사람들에게 잡혀 가죽은 벗겨서 사람들의 옷이 되고, 살은 사람들의 음식이 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낙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지만 사마리아나 다른 유대 지역에선 낙타고기를 아주 즐겨 먹습니다. 이집트나 그리스에서도 낙타를 먹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립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19장23-24절 본문)

저는 이 이야기가 분명히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을 방문하여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유대민족들은 유목민 생활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집을 옮기는 생활도 해왔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짐을 실어다 날라 주는 낙타가 분명히 필요 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낙타를 수십 마리씩을 기르고 있었 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목민들이 살아갈 집입니다. 반듯하게 브록크나 나무를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 또 옮겨야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 천막을 깁기 위하여 바늘을 사용합니다. 대략 우리나라 이불을 깁는 바늘처럼 크지요, 길이는 15센치쯤, 두께는 이쑤시게 정도입니다.

그곳으로 낙타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상상이나 됩니까?
그런데도 낙타는 그곳으로 유유히 들어갑니다.
그것은 인간들을 위한 희생이요, 봉사요, 사랑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목민들은 천막을 자주 바꿉니다. 바람에 찢기고 이웃병사들에게 빼앗기고, 그렇기 때문에 자주 만듭니다. 그래서 그만큼 실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시절에 마땅한 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족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각 족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약대(낙타) 한 마리씩을 선택하여, 전날 저녁에 잘 먹이고나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생명이 다해갔습니다.

유목민들은 큰 가마솥을 큰 아궁이에 올리고 그 속에 올리브기름을 3/1, 물을 3/1정도 넣고 3000도 이상이 되는 열기로 펄펄 끌입니다.

그 솥 밑 부분에는 아주 작은 바늘 구멍들이 20개 정도 있고, 그곳은 진흙으로 발라져 있으며 솥 주위는 1메타 정도의 도랑을 파서 차가운 물이 흐르게 합니다.
이렇게 준비가 다 끝났을 때에 그 낙타의 껍질은 벗겨서 천막을 만드는데 가죽으로 쓰이고, 몸체는 가마솥 속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낙타가 가마솥에서 완전히 녹아 흔적도 없어질 때가지 뜨거운 열을 가합니다.

완전하게 녹아진 것을 확인하고 가마솥 밑에 있는 구멍을 막고 있는 진흙을 뜯어내면, 그 작은 구멍으로 하얀 실 같은 것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도랑에 준비되어 있는 물로 떨어져서 새림새림의 모양을 갖추고 사람들은 그 실이 식었다고 판단 되었을 때에 낙타를 녹여 만든 그 실을 타래에 감아서 천막을 기울 때에 그 실을 바늘귀에 넣어서 사용을 합니다. 그때 당시에는 다른 짐승을 다 해보았지만 낙타처럼 질긴 실은 없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낙타는 바늘귀로 쉽게 들어갔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녹아서 바늘귀로 유유히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너무도 어려운 길입니다.

첫 째는 자신이 죽어야 하고, 이것은 성도들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둘 째는 인간을 위한 봉사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죽여야만이 하는 엄청나게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아무리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내 놓은 낙타만큼이나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서 내가 죽어야 삽니다. 우리가 죽음으로 예수가 살고 내가 살아 있으면 예수가 죽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낙타의 희생이 인간들이 쓰기 좋은 실이 되어 바늘귀로 들어가서 천막을 만들고 인간들에게 봉사를 하였듯이 우리도 그런 봉사와 사랑과 희생의 마음이 갖추어져 있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중앙 아시아 낙타(육봉이 두갭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비밀

[낙타 駱駝 (약대) 대한 비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다.(마19장23-24절,)

약대(낙타)는 성경에서 구약에 57회, 신약에는 6회만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낙타(CAMEL) "히-까말'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영어 번역본에는 "낙타"로 나와 있습니다.
[히-수컷은=빠랄이라 부르며 -암컷은=버크라]라고 합니다.

이외에 단봉(單峰)낙타{KJV,ASV}, 낙타새끼{RSV}가 언급 되지만 이 부문은 이사야 60장 6절과 에례미야 2장 23절에만 나와있습니다.
낙타라는 말은 [헬:카멜로스]로서 모든 영어 번역본에 나와 있으나, 원래 낙타(ca-mel)라는 말은 어원이 히브리어로서 헬라어를 거쳐 파생된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19장23-24절 본문)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수 십년씩의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자주 목사님들로부터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가는 문이 너무 좁아서 성문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배워왔다면..그것은 분명히 불충분한 증거라고 사전은 말합니다.솔직하게 인색한 부자 신자들 공격용으로 많이도 씌여왔고 너무 자주 듣다보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입니다. 저 역시도 들은 것을 전하다보니 "바늘귀란 작은 쪽문을 말하는 것이랍니다" 라고 하면서 그대로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가지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두가지가 다 예수님의 시대부터 존재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셨을까? 참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디 비유를

 


 유대민족들은 유목민 생활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집을 옮기는 생활도 해왔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짐을 실어다 날라 주는 낙타가 분명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낙타를 수십 마리씩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목민들이 살아갈 집입니다. 반듯하게 브록크나 나무를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 또 옮겨야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 천막을 깁기 위하여 바늘을 사용합니다. 대략 우리나라 이불을 깁는 바늘처럼 크지요, 길이는 15센치쯤, 두께는 이쑤시게 정도입니다. 그곳으로 낙타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상상이나 됩니까? 그런데도 낙타는 그곳으로 유유히 들어갑니다. 그것은 인간들을 위한 희생이요, 봉사요, 사랑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목민들은 천막을 자주 바꿉니다. 바람에 찢기고 이웃 병사들에게 빼앗기고, 그렇기 때문에 자주 만듭니다. 그래서 그만큼 실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마땅한 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족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각 족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약대(낙타) 한 마리씩을 선택하여, 전날 저녁에 잘 먹이고 나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그 생명도 끝이 났습니다.

 유목민들은 큰 가마솥을 큰 아궁이에 올리고 그 속에 올리브기름을 3/1, 물을 3/1정도 넣고 300도 이상이 되는 열기로 펄펄 끓입니다. 그 솥 밑부분에는 아주 작은 바늘 구멍들이 20개 정도 있고, 그곳은 진흙으로 발라져 있으며 솥 주위는 1메타 정도의 도랑을 파서 차가운 물이 흐르게 합니다. 이렇게 준비가 다 끝났을 때에 그 낙타의 껍질은 벗겨서 천막을 만드는데 가죽으로 쓰이고, 몸체는 가마솥 속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낙타가 가마솥에서 완전히 녹아 흔적도 없어질 때가지 뜨거운 열을 가합니다.

완전하게 녹아진 것을 확인하고 가마솥 밑에 있는 구멍을 막고 있는 진흙을 뜯어내면, 그 작은 구멍으로 하얀실 같은 것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도랑에 준비되어 있는 물로 떨어져서 새림새림의 모양을 갖추고 사람들은 그 실이 식었다고 판단 되었을 때에 낙타를 녹여 만든 그 실을 타래에 감아서 천막을 기울 때에 그 실을 바늘귀에 넣어서 사용을 합니다. 그때 당시에는 다른 짐승을 다 보았지만 낙타처럼 질긴 실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하게 나무를 붙히는 목공용 접착제인 아교를 만들때 소의 뼈를 녹여서 사용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분명히 낙타는 바늘 귀로 쉽게 들어갔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녹아서 바늘귀로 유유히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너무도 어려운 길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인간을 위한 봉사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죽여야만이 하는 엄청나게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아무리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내 놓은 낙타만큼이나 하겠습니까? 낙타는 녹아서 실(絲)이 되야 바늘귀로 들어가는데 말입니다.
 
 마19장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이미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죽어야 삽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기로 오신 희생양입니다. 예수가 살았다면 나는 아직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하나님이 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삽니다.

  여러분은 제사장입니까? 손에 예수의 피가 들려 있습니까?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9) 왕은 다스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다스릴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왕같은 제사장은 나를 다스리고 나의 죄를 예수의 피를 드려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과 중간에서 죄인의 죄를 처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죄있다고 한다면 잘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양 되셔서 내 대신 죄를 다 처리해 주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중간 역할을 잘못하는 것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지금 성도님은 왕같은 제사장의 역활을 충분히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들은 모두가  예수를 죽인 죄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내 대신 죽이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든지 생명을 내어놓던지 우리는 아무것도아니요, 아무것도 유익되지 못하지만 낙타처럼 자기 몸을 다 녹여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천국갑니다. 이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역사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를 죽여 십자가에 못밖아 놓고 마리아와 교황과 성인들과 착한 행실을 앞세워서 천국가기를 원하고 있지만, 우리는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가시길 원합니다. 예수이름과 그를 높혀주신 이름을 힘입어 갑니다.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고 하셨으니 불가능 하다는 뜻입니까? 다 내려 놓으면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성문은 닫쳐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작게 들어가야 합니다.

 낙타는 바늘귀를 통과 하였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천국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듯이 낙타처럼 몸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낙타의 실이 되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과 꿔매는 역활을 감당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원합니다. 낙타의 희생이 인간들이 쓰기 좋은 실(絲)이 되어 바늘귀로 들어가서 천막을 만들고 인간들에게 봉사를 하였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온몸을 다 주신 것같이 그런 봉사와 사랑과 희생의 마음이 갖추어져 있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와 그전에도 전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지역마다 성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성안에서 살았습니다. 성안에 산다는 것은 외적이나 강도의 위협에서 보호를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출입하며 마차가 동시에 몇 대씩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어서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성문을 열고 저녁때가 되면 또 정해진 시간에 성문을 닫았습니다. 절대로 밤에는 열어주지 않습니다. 

 

 군인들이 지키는 성문이 닫친 후에는 큰 문으로 들어갈 수 없고 성문 옆에 있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 문은 아주 좁아서 이 문을 통과하려면 머리를 숙여야 하며 거추장스런 짐을 들거나 지고서 통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짐을 버리고 몸을 낮추어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노숙을 하면서 낙타등에 짐을 많은 짐을 실고 다니며 장사하는 대상들은 강도의 위협을 당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 입니다. 그래서 항상 안전한 곳을 찿아서 어느 성이든지 밤이 되기전에 성안에 들어가서 쉽을 얻어야 합니다.

 

 만약에 해가 지기전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위해 낙타의 모든 짐을 내려서 하나 하나 들고 들어가고 등치 큰 낙타를 넣는 일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좁은 문을 구원의 문, 열처녀 비유나 어두움이라고 표현된 것은 성문밖을 표현하며 성안을 천국 가는 문으로 비유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실데가 없어서 큰 덩치의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간다고 하셨을까? 그래서 배경을 모르니 별 상상을 다 하여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른 것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미웠을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예수님은 없는 말씀을 절대로 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모두가 이유 있는 말씀만 하셨고 실제로 전개되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물론 부자들에게 가진 재물을 풀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부자는 누구냐? 입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세리, 로마의 앞잡이들, 권력가들, 이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자들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부자들이 백성들의 고통을 몰랐을까요? 구약의 말씀중에 가난한 자에게 하라는 법을 생략했고, 안식일을은 지키려면 안식년 법을 지켜야했고, 안식년을 지키려면 희년의 법을 지켜야하는데 그런법은 생략하였기에 예수님은 부자들의 행위를 미워하였습니다.  

 문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보다  낙타(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약대는 수명이 깁니다. 보통은 50-60년. 길게는 80년도 넘기는 약대가 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자기 발로 걸어다니기만 하면, 그때부터 인간을 위한 봉사를 합니다. 등에 짐과 사람을 태우고 죽는 날까지 인간을 위하여 일합니다.
힘도 써어서 약 500K의 짐을 등에 실고 다닌답니다. 

 그리고는 종말에는 자기들이 희생하고 봉사했던 사람들에게 잡혀 가죽은 벗겨서 사람들의 옷이 되고, 살은 사람들의 음식이 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낙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지만 사마리아나 다른 유대 지역에선 낙타고기를 아주 즐겨 먹습니다. 이집트나 그리스에서도 낙타를 먹습니다만 이스라엘에서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립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19장23-24절 본문)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