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인간 실존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교

2015. 5. 21. 오후 2: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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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고전(조직신학)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인간 실존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교

 

 이전에 나는 한창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같은 책과 실존주의적인 사고의 영향 때문에 무능력할 뿐더러 인간을 억압하기까지 하는 신이 과연 인간에게 무슨 구원자가 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인 나 자신에게조차 공상적인 듯 하였고 더군다나 이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확신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지만, 정작 나는 도대체 고등학생 시절의 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무엇을 구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나는 그때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억눌려 있었고, 학교에서는 언제나 열등의식과 강박관념 속에 짓눌려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 속에서 도대체 내가 무슨 구원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알려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지만, 억지로 맞지 않는 신앙 속에서 내 삶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언제나 답답했다. 

 개인적으로 틸리히는 이 시절에 나에게 정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었다. 틸리히는 인간이 처한 존재 상황을 철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의 한계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또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었다. 틸리히가 인간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교리에 의해 공식 외우듯이 이야기되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가 교리나 기존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는 표면적인 교리와 전통의 상징들이 인간의 어떠한 실제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 그 상황에 대해 다시금 어떠한 대답을 주고 있는지를 분석하며 그리스도교가 현대인들에게 줄 수 있는 철학적 의의를 탐구하였다.

 가령 그리스도교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라고 표현되던 상징들을 틸리히는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설명해 낸다.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죄의 문제로 고민하며 인간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지를 논의한 것은, 현대 학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간 삶에 근본적으로 퍼져 있는 '불안'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었다는 것이다. 

공포와 불안

 현대철학에서는 '공포(fear)'와 '불안(anxiety)'이라는 개념을 구분한다. 전자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인 반면 후자에서는 대상이 부재한다. 따라서 공포는 그것을 일으킨 구체적인 대상들을 직면하여 그에 대해 분석하고 파악하여 견뎌내었을 때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불안은 그렇지 않다. 불안에는 대상이 없다. 만약 불안에 대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대상은 모든 대상들의 부정일 뿐이다."1 그리고 이로 인해 불안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구체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 불안은 특정한 대상이 부재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위로 극복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닌 것이다. 가령 불안한 사람은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움직이거나, 벽을 긁거나, 손톱을 깨물거나 하는 등 분주하게 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자신이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불안 속에서 방향 없이 헤매는 일일 뿐 불안을 대면하는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아니다. 틸리히의 말대로, 불안은 "방향성의 상실에서, 부적합한 행동에서, 고의성의 부족에서"2 표현될 뿐이다.


유니언 신학 대학교, 틸리히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이곳에서 처음 신학을 가르쳤다.

 틸리히는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불안의 종류를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한다.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 '공허함과 무의미에 대한 불안', '죄책감과 정죄에 대한 불안'이 그것이다. 이러한 불안들에는 뚜렷한 대상이 부재한다. 가령 '죽음'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벌어지는 구체성을 지닌 사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존재를 상실하는 사건, 틸리히의 표현대로라면, '비존재(nonbeing)'이다. 그러나 이 대상 없는 비존재는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시키고, 이 불안에 대해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가 없다. '무의미' 역시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궁극적 관심'을 상실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의미의 부재는 적극적인 내용이 있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내용의 상실이며 따라서 이것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비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정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정죄는 자신의 실현을 잃어버리는 데서 나타나는 불안이다. 우리는 도덕에 의해 우리 자신을 가능성을 실현시킬 것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실현을 잃어버리고 스스로에게서 소외된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우리가 판단하는 일이 벌어진다. 정죄란 이러한 자기 실현의 상실에서, 바로 비존재에 의해서 야기되는 불안인 것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불안이란 단순히 병리적인 증상만은 아니다.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으로 병리적인 불안은 치료하고 없앨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병리적인 불안의 더 근본 원인으로서의 존재론적인 불안을 해결할 수는 없다. 틸리히는 인간에게 불안이 야기되는 이유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분석하며 이 불안이 존재의 근본적인 구조 속에서 야기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존재와 비존재

 틸리히는 존재가 비존재를 품으며 그것을 영원히 극복해 나가는 구조를 자신의 존재론의 대략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존재는 그것의 신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영원히 현전하고 영원히 극복해 나가는 것으로서 그 자신 '안에' 비존재를 지닌다."3 이 말은 틸리히의 존재론을 은유적으로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만약 누군가 어떻게 비존재가 존재와 관계되느냐고 묻는다면, 오직 은유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는 그 자신과 비존재를 '끌어 안는다.' 존재는 그것의 신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영원히 현전하고 영원히 극복해 나가는 것으로서 그 자신 '안에' 비존재를 지닌다. 모든 존재하는 것의 지반은 운동과 생성이 없는 죽은 동일성이 아니다. 그 지반은 살아있는 창조성이다. 창조성은 영원하게 그것의 비존재를 극복해 나가는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 그러한 것으로서, 이 창조성은 모든 유한한 존재들의 자기 긍정의 패턴이며 존재의 용기의 근원이다."4
 그에 따르면 존재 속에는 비존재의 요소들이 항상 포함되어 있다. 가령 죽음을 떠올려 보자. 삶 속에는 언제나 죽음이 찾아온다. 우리의 존재는 죽음이라는 비존재에 의해 위협받는다. 삶은 이렇듯 비존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한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존재 자체는 비존재에 의해 완전히 무화(無化)되지 않는다. 개별 존재들은 비존재에 의해 사라지지만, 존재 자체는 자신 안에 비존재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영원히 극복하며 계속 존재를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자체는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존재 자체는 단순히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자신에게 저항하는 비존재에 대응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실현시켜 나가는 역동적인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존재"를 이중부정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존재는 존재에 대한 부정의 부정으로 생각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의 힘"이라는 은유를 통해 존재를 가장 잘 서술하는 이유이다. 힘은 다른 존재의 저항에 대항하여 존재가 그 자신을 실현시켜나가는 가능성이다. 만약 우리가 존재 자체의 힘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존재가 비존재에 대항하여 자신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5 
 그리고 이렇듯 존재 자체의 구조 속에 이렇듯 비존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불안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제거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불안은 구체적인 존재의 내용들을 상실시키는 비존재의 위협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속에 포함된 비존재는 개별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정신분석이 병리적인 불안을 제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존재의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근본적인 의미의 불안은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상태로 언제나 우리의 삶을 위협하며 남아 있다.

문화에 대한 분석

 『존재의 용기』에서 틸리히는 이러한 분석에 의거하여 역사 속에서 불안이 어떠한 형태들로 나타났으며 또 그 불안에 대면하여 어떠한 자기-긍정의 형태들, 다시 말해 용기의 형태들이 출현하였는지를 살핀다. 이 과정에서 틸리히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철학, 문학, 예술 등의 여러 문화 현상들 속에 스며들어가 있는 불안의 요소들을 밝혀낸다. 문화 현상들을 분석하며 그것을 성립시킨 불안의 요인들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틸리히는 '문화 신학자'라거나 '문명 비평가'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사르트르, 카프카, 엘리엇, 카뮈.
틸리히는 이들의 작품에서 현대의 불안을 찾아낸다.

 특별히 그가 주목하는 문화 현상은 당시 20세기 초에 새롭게 등장한 실존주의적 사조들이다. 그는 이것이 그 이전까지의 '참여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와 달리 '자기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의 형태이며, 집단 질서 속에서 인간이 도구화되는 것에 반대하였던 의미 있는 용기의 형태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틸리히는 실존주의에서 긍정하고자 하는 자기는 그가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 외에는 사실상 아무런 내용이 없는 자기인 반면 실제 인간은 유한한 자유 속에서 구체적인 자기의 내용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자존성과 무한한 자유에 대한 긍정은 우리에게 가능하지 않으며, 이러한 긍정이 만약 구체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내용들과 충돌한다면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틸리히는 이렇듯 자기로서 존재하려는 용기가 실패했을 경우에 오히려 이 실존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도리어 집단주의로 변모하게 되거나 아니면 모든 체계에 대한 냉소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받아들임을 받아들이는 용기

 틸리히는 '참여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와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가 지닌 한계점들을 지적한 후 그것들을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용기로서 그리스도교의 용기인 '받아들임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제시한다. 불안에 대면하는 용기란 불안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감정 상태가 아니다. 도리어 그 용기는 불안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는 힘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이 '죄인 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선언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 용기 속에서 인간의 죄책이나 무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 그는 여전히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자이고, 비천한 자이고, 죄 많은 자이며, 죽을 자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죄책, 무의미, 죽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자신을 사랑하며 또한 그 사랑 안에서 그가 받아들여졌다는 용기를 얻고 불안을 극복해 나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로 표현된 이러한 용기는 바로 존재 자체에 참여하고자 하는 용기의 한 모습이다. 다시 말해 이 용기는 존재가 비존재를 품고서 그것을 영원히 극복해 나가는 힘에 참여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마르틴 루터의 '칭의'와 같은 교리를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모습 속에는 바로 그가 죽음과 무의미와 정죄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다시 긍정하고자 하는 용기가 들어 있다. 그는 자신이 직면한 거대한 불안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긍정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 올 것을 알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며, 자신이 정죄 속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고자 한다. 그는 그가 지닌 불안을 부인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 불안을 끌어 안는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존재 자체에 참여하고자 하며, 불안 속에서도 용기 있게 자신을 긍정하고자 한다.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존재 하고자 하는 힘에 의해 사로 잡힌 상태이다. 틸리히는 신앙을 단순히 특정한 교리를 믿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는다.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고자 하는 힘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어 자신 안의 불안과 싸워나가게 되는 상태가 신앙이다. 

 "신앙은 존재 자체의 힘에 의해 사로잡힌 존재의 상태이다. 존재의 용기는 신앙의 한 표현이며, 신앙이 의미하는 것은 존재의 용기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비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존재의 자기-긍정을 용기라고 정의해왔다. 이 자기-긍정의 힘은 모든 용기 있는 행동에 유효한 존재의 힘이다. 신앙은 이 힘에 대한 경험이다."6
 그리고 만약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기도와 예배 속에서 강조되어 왔던 내용이 바로 이러한 존재의 용기였다면, 그리스도교가 사용했던 모든 상징들이 바로 이 용기에 대한 경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면, 이제 유신론은 초월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유신론적인 상징들 자체가 아니라 그 상징들이 나타내고 있는 존재의 용기에 대한 경험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인 유신론적 상징들을 과감히 넘어서서 그것이 진정으로 가리키는 바를 깨달아야 한다.

초월된 유신론과 하나님 위의 하나님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그동안 죄인을 용납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인격적인 신의 모습으로 그려내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표현은 그동안 수많은 문제들을 낳았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주체-객체의 구조 속에서 나와 괴리되어 있는 하나의 인격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주체였고, 우리는 그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객체였다. 그는 나의 주체성을 빼앗고 나를 위협하는 전지전능한 폭군이 될 수도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인격신을 수용할 수가 없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그를 객체화 시키기 위해 애썼다.



 이 때문에 틸리히는 유신론을 초월한 '하나님 위의 하나님(God above God)'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가 오랜 신앙의 역사 속에서 경험하였고 또 표현하여 온 것은 실존 속에 만연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였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라는 상징을 통해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존재에 참여하고자 하는 용기를 얻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존재의 용기의 근원으로서 경험한 하나님은 단순히 전지전능한 인격신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경험 속에 드러난 하나님, 존재의 용기의 근원으로서 제시된 하나님은 '존재 자체(being-itself)'이다. 유신론에서 이야기되었던 '하나님'이라는 상징은 바로 존재의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존재 자체의 힘을 가리켜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론의 하나님 위의 하나님은 비록 감추어져 있지만, 신성-인간의 만남이 있는 어디에서나 현존한다. 성서적 종교들은 프로테스탄트 신학만큼이나 이 만남의 역설적인 특징을 잘 깨닫고 있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난다면, 하나님은 객체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며 그러므로 유신론을 그에게 강요하는 모든 도식들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모든 기도의 역설적인 성격을 그들은 깨닫고 있다. 그들이 대화하고 있는 누군가는 '누군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대화할 수 없는 누군가이며, 그들이 구하고 있는 누군가가 그들이 구하기에 앞서서 주기도 하고 주지 않기도 하는 누군가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구할 수 없으며, '당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누군가는 사실 나보다도 더 나에게 가까이 있다는 그 역설적인 성격 말이다. 이러한 각각의 역설들은 유신론의 하나님 위에 있는 하나님에 대해 종교적인 의식이 향하게 한다."7
 따라서 설령 그리스도교의 모든 상징들이 의심의 대상으로 던저진다 하더라도, 죄인을 용서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스운 것으로 치부된다 하더라도, 이 상징들을 통해서 말해졌던 존재의 용기가 계속되는 한 우리는 불안을 이길 힘을 얻는다. 절대적인 신앙은 이러한 회의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것은 모든 상징들이 의심으로 빠져버리는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남아 우리에게 그 상징들이 가리켜 주었던 존재 자체의 힘으로 비존재의 위협을 이겨낸다. 틸리히는 이에 관해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존재의 용기』를 끝낸다. 내가 개인적으로 번역한 내용보다 다른 분의 번역이 훨씬 더 틸리히의 의미를 잘 살려 놓았다고 생각되어 인용한다. 고등학생 시절에 읽고 정말 많은 감동을 받은 부분이다.

 "그리고 또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전통적 상징들이 그 힘을 잃었을 때에도, 우리는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을 통하여 유신론의 하나님 위의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심리적 착각으로, 그리고 죄사함을 ‘아버지의 이미지’로 해석할 때에도, 전에 이와 같은 상징들을 통하여 나타났던 힘은 여전히 현존하여 현실의 우리와 당위의 우리 사이에 놓인 무한한 간격에 대한 체험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려고 하는 용기를 창조할 수 있다. 즉 루터교적인 용기가 다시 소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하고 용서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지지하는 용기가 아니라, 죄책을 정복하는 어떤 특정한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긍정할 수 있는 절대적 신앙의 형태로 다시 소생하는 것이다.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을 자기 자신이 짊어질 수 있는 용기는 존재에의 용기가 도달 할 수 있는 한계선인 것이다. 그 이상은 단순한 비존재이다. 모든 형태의 용기는 다 그 안에서 유신론의 하나님 위의 하나님의 힘을 통하여 재확립된다. 존재에의 용기는 하나님이 회의에 대한 불안을 통하여 사라져버렸을 때 다시 나타나는 하나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8
틸리히에 대한 평가

 내가 틸리히 신학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가 인간이 처한 현실의 문제들과 상황에서부터 그 대답으로 그리스도교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고전적인 죄 개념을 '불안'이라는 인간의 실존에서부터 설명해내고, 그 불안을 극복하는 '용기'로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한다는 사실은 고등학생 시절이나 지금이나 나에게 굉장히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인간의 상황에 대한 대답으로서 신학을 전개하는 이러한 틸리히의 신학 방법은 '상관관계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면 헬무트 틸리케 같은 신학자는 틸리히 신학을 '데카르트주의적 신학의 극단'이라고 비판하며 이러한 신학이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계시를 인간에게 속박시키고 왜곡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에도 역시 일리가 있지만, 나의 경우는 결국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자신의 존재 의의를 정당화하고 신학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수행해온 작업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문제와 그리스도교 신학을 긴밀하게 연결짓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도 '계시'라는 것이 인간을 향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이상 인간의 상황과 분리된 계시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으며, 또한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도 성서나 교리를 수용하는 데 있어 그것이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해석하는 작업이 배제된 채 순수하게 계시 그 자체만 전달되는 일이 가능하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다만 틸리히는 20세기 초의 실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불안'을 통해 현대의 문화적 경향과 특징을 설명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이제 실존주의는 철학사에서 그 열기가 한물 식어버렸고, 최근에는 푸코와 같은 이들이 권력 구조나 지식 구조들을 통해 사회 체계와 문화를 설명한 내용이 많은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틸리히의 문화 비평이 지닌 의의, 존재론과 실존신학이 지닌 의의는 오늘날의 다른 철학들과의 비교 속에서 검토되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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