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가사키(長埼) 열차역 근처에 있는 니시사카(西坂) 공원은 일본에서 최초로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세계에 알려진 순교지이다. 키리시탄 금교령 하에서 순교장소가 불명확 했었는데 1947년 니시자카로 확정되었다. 26인 순교자가 시성된지 100년이 되는 1962년에 기념비와 기념관이 건립되고 니시자카 공원이 조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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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 것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1597년 2월 5일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 사제인 바오로 미키(三木) 등 일본인 17명이 이곳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 이들은 1862년 성인 반열에 올랐고, 시성 100주년을 맞이한 1962년 6월 10일 기념비가 완성되었다. 26성인 중에는 조선인으로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와서 영광(領光)한 후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하여 역행을 쌓다가 순교한 성 바오로 이바라키, 그의 동생 성 레오 이바라키, 그의 아들 12세 소년 루도비코가 포함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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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해지는 사료에는 「16∼17세기 나가사키(長崎)는 일본의 로마(良摩) 같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나가사키현이 유럽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인 데다가 현을 지배하던 다이묘가 대부분 가톨릭신자였던 것에 기인한다. 전국적인 금교령이 내려진 1614년 나가사키의 신자 수는 5만 명, 성당은 16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엄청난 숫자다. 이후 에도 막부의 박해로 신자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잠복 신앙은 큐슈 일대 수많은 섬에서 부모에서 자식에게 확실하게 전승됐고, 1865년 오우라 성당에서의「신자 재발견」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신앙 박해기, 일본에서는 신자를 가려내기 위해 예수의 초상화나 마리아상이 조각된 메달을 발로 밟게 하는 ‘후미에’(踏繪)라는 방법이 동원됐다. 신자로서 차마 메달을 밟지 못한 사람은 모두 처형됐다. 후미에는 나가사키의 우라카미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자행되었고, 이에 발각된 신자들에게는 배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상상을 초월한 갖갖은 고문이 가해졌다.
나가사키시내 여러 곳에 마련된 사료관에는 후미에 진품을 비롯해 일본에 상주하던 예수회 등 수도회 사제들이 본국으로 보낸 편지, 마카오에서 가져온 성인의 유해, 순교당시 상황을 묘사한 「순교화(畵)」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인연이 깊다. 하지만 악연이 깊어서인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처럼 일본은 아직도 우리에게 먼 나라이다. 일본 가톨릭교회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일본 가톨릭교회의 성지는 놀라움을 주기 충분했다. 200여 년 가까이 박해를 겪으며 스러져간 수많은 순교자들과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한국의 신앙 선조들이 겪은 것과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열도의 최남단 큐슈지방의 나가사키현(長琦縣)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앙의 흔적들과 순교자들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진 곳이다." (가톨릭신문 이승환 기자)
일본 규슈[九州] 북서부 나가사키 현[長崎縣]의 현청소재지이자 현 최대 도시.
나가사키 항으로 흘러 들어가는 우라카미 강[浦上川] 어귀에 자리잡고 있다. 나가사키 항은 남쪽의 노모[野母] 곶과 북서쪽의 니시소노기[西彼杵] 반도가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좁고 깊게 패인 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도시는 만의 안쪽을 에워싸고 있는 언덕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과 집들이 계단식으로 들어서 있어 원형경기장을 연상시킨다. 해안의 간척지와 우라카미 분지는 평지를 이루고 있다.
나가사키 항은 히라도 항[平戶港]에 이어 일본이 2번째로 외국과 무역을 개시한, 역사적 의의가 깊은 항구이다. 1639~1859년 다른 항구들이 외국에 대하여 문을 닫고 있었을 때 도쿠가와 바쿠후에 의해 개방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16세기 중반 이곳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일본에 가톨릭교와 조총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1639년에 경쟁자였던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과 함께 추방되었고 무역은 네덜란드, 그리고 소규모이지만 중국·조선에 국한되었다. 1864년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은 1597년에 순교한 26명의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1862년에 시성(諡聖)되었다. 나가사키는 19세기에 동아시아의 주요 석탄공급항이 되었고 1903년까지 러시아의 극동 함대가 이용하던 부동항(不凍港)이었다. 20세기초에는 조선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5년 8월 9일, 미국의 2번째 원폭투하로 시 중심부가 대부분 파괴되었다. 인명과 재산 피해는 히로시마[廣島]에 비해 덜했으나 3만 9,000명이 즉사했으며 2만 5,000명이 부상당했고 시가지 건물 중 40% 정도가 완전히 파괴되거나 심하게 파손되었다. 전후에 재건되자 반핵운동의 정신적인 거점이 되었다. 산업은 항구의 서쪽과 안쪽에 모여 있는 조선소를 기반으로 한다. 나가사키에는 역사적 유적지가 많아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중국 승려들이 살았던 소후쿠 사[崇福寺]는 중국 명대(明代)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19세기 영국 상인의 저택으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Madama Butterfly〉의 무대이기도 한 글로버 저택에서 내려다보이는 나가사키 항의 전망 또한 장관이다. 우라카미 천주당이 굽어보고 있는 우라카미 강변의 원자폭탄 투하 지점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인구 423,163(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