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共感)

2021. 10. 19. 오전 6: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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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共感)


대학로를 걷다 보면 뮤지컬 배우와 길 위에서 대화를 나누려 줄 서 있는
팬들을 봅니다.
유명 연예인과 달리 뮤지컬 배우는 sns나 공연 후 짧은 대화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기회가 비교적 많기 때문입니다.
상대방과 소통·공감할수 있는 부분이 커지면 그만큼 관계성이 깊어지는
이유입니다.
공감이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을 뜻합니다.
이번 주일 하느님 말씀을 관통하는 주제는 '공감'입니다.

제1독서(이사 53,10-11)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에 관한 예언입니다.
바빌론 타향에서 고통스럽게 포로 생활을 하던 하느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이사야서 속 주님의 종은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고통받으며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메시아로 묘사됩니다.
이 구약의 메시아는 고통받는 우리와 공감하는 메시아, 즉 신약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한편 제2독서(히브 4,14-16)에서 '대사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히브 4,15)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신 대사제, 우리와 하느님을 화해시켜주시는
대사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고통받는 우리에게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우리와 공감하며
사랑과 은총을 베푸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마르 10,35-45)은 스승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누는 대화로 구성됩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라고 청하는 야고보와 요한은 '낙수 효과'를
기대했던 것일까요?
한편 옆에 있던 다른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불쾌해합니다.
그들 또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다른 이와 공감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3-45)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공감의 아이콘'이 되어 주십니다.

오랜 시간 계속되는 고통의 일상을 살다 보니 우리의 축처진 어깨와 공허한
마음에 공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비록 우리가 무관심할 때에도, 우리와 공감해 주며 말 걸어오는 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과 어떻게 소통하며, 얼마만큼 공감하고 계십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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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자비로우시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칠 줄 모르는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돌아가십니다.
이천 년 전에 그러셨고 지금도 매일 그렇습니다.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분의 현존을 느끼며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미사 후 제대 촛불이 꺼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우리의 마음을 담아
주님께 올려드리는 듯합니다.


-홍덕희 아녜스 | 가톨릭사진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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