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2)-신앙선조들의 발자취

2021. 4. 13. 오전 5: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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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2)-신앙선조들의 발자취


사제 수품과 사목활동 그리고 선종

최양업은 동료 김대건과 최방제와 6개월이라는 긴 여정 속에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대표 르그레즈와(Legrégeois) 신부, 부대표 리브와(Libois) 신부,
교장 칼레리(Callery) 신부, 메스트르(Maistre) 신부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사천(四川) 선교사인 데플레슈(Desflèches) 신부 등의 지도를 받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1839년 4월부터 11월까지는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Lolomboy)에서
신학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여러 과정을 거치다가 조선 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l) 주교가 있던
길림성의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844년 12월 10일경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그는 부제품을 받은 후 5년 뒤 상해에서 1849년 4월 15일 예수회 마레스카
(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와 약속했던 백령도(白翎島)까지
갔으나 마중 나온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상해로
되돌아갔다.
1849년 5월 만주 요동으로 가서 7개월 동안 만주교구장 직무대행 베르뇌 신부
밑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당시 그가 활동하던 지역은 요동의 전교중심지인 양관(陽關, 현 개주시 羅家店)과
차쿠(岔溝, 현 장하시 蓉花山)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따라서 그는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에게 최초로 공식적인 사목을 담당한 한국인
사제라고 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보낸 조선교회의 밀사를 봉황성 책문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3일 압록강을 건너 귀국에 성공하였다.
1836년 신학생으로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에, 1842년 마카오를 떠난 지
7년 6개월, 모두 여섯 차례의 시도 끝에,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만난 뒤 한덕골
(현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교우촌에 가서 중백부 영겸(榮謙)과
동생 신정(델레신포로)을 만났으며,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동골(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교우촌을 거점으로 삼고 사목활동을 하였다.

입국 이후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해서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5개 도에 걸쳐 있는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였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간은 장마와 무더위, 농사일 때문에 순회할 수 없는
7-8월 한두 달에 지나지 않았다.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는 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고,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했으며,
날이 새기 전에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등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박해가 수그러진 듯하여지자 그는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방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기로 했다.
하지만 극심한 피로가 누적되었던 최양업 신부는 상경 도중 과로로 인한
장티푸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경상도 문경 땅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1861년
6월 15일 선종하였다.
선종 후 그곳에 가매장 되었다
가 11월 초 신학교 푸르티에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배론 신학교 뒷산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참조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 연구소, 1999. 여진천,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2006.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2018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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