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은총은 어떻게 받는가?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이란 단어가 친근하고,
그 분을 둘러싼 교회적 분위기에도 익숙하다.
주일학교에서 만난 하느님은 인자한 할아버지이고, 예수님은 우리들의
친구이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고,
형제와 친구들과 다투지 않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힘든 친구를 위해 기도를 하고, 대림절이나 사순절에 평일 미사에 참석해서
은총표를 받거나, 남몰래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
것임을 배운다.
한 마디로 어린 시절 신앙은 하느님을 친근하게 느끼며 그 분 말씀을
잘 들으면 사랑을 받는다는 순진한 삶이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 순진하게 믿었던 하느님 모습은 점점 사라진다.
내가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고, 교회에서 배운 대로 살면 바보가
된다는 것을 느낀다.
하느님께 잘못한 일들이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여겨지고, 하느님과 했던
약속들도 이제는 쉽지 않다.
약속을 하더라도 언제나 조건이 따른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은 은총을 몽땅 채워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라던 은총을 얻지 못했을 때 터지는 원망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을
원한 내가 아니라, 언제나 바란 만큼 주지 않으신 하느님이시다.
대개 일상적인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일에 그다지 목을
매지 않는다.
사제들의 일상적인 축복과 교회의 의무를 지키는 정도로 만족한다.
주일 미사에 빠지거나, 금육을 지키지 못한 정도가 고해성사의 고백거리일
뿐이다.
신앙은 "좀 더 여유가 있을 때" 혹은 "내가 하느님을 정말 필요로 할 때"
찾는 것이라며 적당히 타협하며 살거나, 판공성사 때 성사표 한 장으로
고작 냉담자 리스트에 오르지 않으려는 것이 일상의 신자들이 지닌
일그러진 군상이다.
그래도 우리 곁에는 여전히 열심한 신자들도 많다.
하느님을 진하게 느낀 탓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노력도 제법
진하다.
평소에 하지 않던 기도도 자주 하고, 성체 조배, 묵주기도, 본당 봉사에도
적극적이다.
적당한 기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묵주기도 1만단에 도전하고, 성서 필사를 위해 매일 2시간
이상을 투자하며, 특별한 지향으로 묵주의 9일기도를 54일 동안 빠짐없이
바친다.
요즘은 성경통독피정이나 성모송 2천번기도회, 성령철야기도 등을 통해
하느님께 충심을 바치려는 신자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약속에 매달릴수록 대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나약한 모습과 자신 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타인들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대는 모순적 감정들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사제 서품 후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유학 중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개인피정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얻은
하느님의 은총 체험은 침묵과 기도가 주는 참맛이었다.
나는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하느님 은총을 사제 서품 이후에도 이어가고
싶어서 영성지도 신부님께 수품 후 매일 한 시간씩 묵상 기도를 기쁘게
바치겠다는 결심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신부님은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심은 좋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약속은 하지 마세요.
그 약속은 또 다른 굴레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첫 미사를
정신없이 다니며 축하를 받던 어느 날 내가 그 때까지 하루에 단 몇 분도
침묵 속에 하느님을 느끼는 묵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그제서야 내 헛된 결심과 약속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적이 있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난관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대개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을 받기 위해 직거래를 하곤 한다.
"제가 이러저러한 기도를 열심히 바칠테니, 하느님 당신도 제 청을
들어주세요."라든지, "제 기도를 들어주시면, 앞으로 열심히 성당에
나오겠습니다."라는 상투적인 거래들이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약속은 대개의 경우 조건적이다.
받은 만큼 주고, 준 다음에는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자들은 하느님께 받을 은총을 개인의 열심의 정도나 물량적인 기준과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다.
약속한 기도를 제대로 바치지 못했을 경우에 받아야할 은총을 자신의 잣대로
막아버리거나, 특정한 삶의 방식에 하느님을 끼워 맞추기도 한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자동 판매기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때에 나타나셔야 하고, 필요한 은총을 주셔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둘 중의 하나다.
내 정성이 부족했거나, 하느님이 날 버리셨거나. 무당이 영발이 안 붙으면
"어이, 정성이 부족하다"라고 외칠 때 제사상의 돼지 입에 만원권 지폐를
더 꾸겨 넣는 것과 동일한 논리이다.
은총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산타 할아버지처럼 우리의 물량 공세에 맞게
선심 쓰듯 주시는 선물이 아니다.
은총을 물량적 잣대로 생각하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은총은 하느님
자신이라고 말한다.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로 작정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 자신이야말로 우리에게 선사된 은총 자체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은 계약은 하느님을 잃느냐 마느냐의 실존적인 결단에
대한 요청이지, 우리가 고난과 역경 중에서야 겨우 찾는 하느님의 특별한
기적이나 능력의 조건은 아니었다.
우리가 청하는 하느님의 은총은 어린 시절 조건 없이 내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던 사랑의 체험이지, 그 사랑을 증명해주는 조건이나 약속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은 하느님 은총에 대한 감사는 될 수 있어도,
우리의 열정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의 가치가 상대에게 얼마나 효용적 가치가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선물에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신앙이 전하는 하느님의 은총은 인색한 우리들의 마음을 꿰뚫는 하느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가장 빛난 곳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