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통은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다양한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것)
시편은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말을 들려준다.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142,5)
이 말을 한 사람이 살던 때는 이미 오래전이지만 말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말은 오랜 세월 동안 기억되는 말일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하는 말이다.
이 말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보잘것없고 비참하게 느낀다.
주목받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는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얼마나 빨리 치명적인 자기 상실감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자기 상실감은 우리가 가진 최상의 능력을 마비시키는 독과 같은 것이기에,
영성의 대가들은 그런 자기 상실감에 단호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고 권고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사면을 받은 다음 추방되기 전 다시 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 형제에게 쓴 편지다.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는 오늘이나 내일 이송될 것 같습니다.
나는 절망하지도 용기를 잃지도 않습니다.
생명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것이고, 그들 속에서 사람이 될 것이며, 늘 그렇게
있을 것입니다.
나는 불행에 굽히지도 굴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을 삶이라 부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나는 사랑하고 고통을 겪는, 갈망하고 기억하는 마음과 살과 피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에게 분명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태양을 바라봅니다 On voit le soleil. 형제여, 잘 살기를 빕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절망하지도, 자기 상실감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미래가 참담해 보일지라도 자신을 새로운 힘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희망으로 가득 채워 나간다.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들려주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을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마태 11,28-29)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 말씀은 모든 고독과 버림받음과 슬픔 등을 이겨내는 구원의 도구로
작용한다.
모든 사람은 이 초대를 받았다.
이 초대는 모진 운명을 겪는 사람, 환자,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
깨진 우정으로 상처 입은 사람, 실직한 사람, 스스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사람, 그 어떤것에 종속되어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 등에게
주어진다.
아울러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 악습에 괴로워하는 사람, 외적으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도 내적으로는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 등도 이에 해당된다.
우리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아닌가?
페터 리페르트 Peter Lippert는「엥가딘에서 보낸 편지」에서
실스 마리아 Sils Maria에서 본 콘서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약간 멍한 상태에서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에게 '이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선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고통스러운 일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들 모두는 마음 깊은 곳에 선한 감동적 의지를 가지고 있고, 그들 삶의
은밀한 곳에서 큰 근심과 고통과 환멸을 느끼며,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모습과
깨진 모습을 보며 침묵 중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란다.
이들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가!
이들을 해방하고 지탱하고 구원하고 귀 기울이는 사람은 위대하고 넓은 마음,
선하고 강인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인류 전체에 비해 이 50명에서 60명은 얼마나 적은 숫자인가!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수고와 고통과 선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들의 죄악과 갈망과 더불어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이 과연 있는가?
그 마음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들 모두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참으로 놀랍고 불가사의한 것은 우리 각자를 위한 위대하고 넓고,
선하고 강인한 마음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의 마음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분과 함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인간 삶의 모든 신비를 이해하시는 그분에게서만 안식을 찾을 수 있다.
그분이 우리의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짊어진 짐을 때때로 받아주시지 않는다.
수고를 겪을 때 성장할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성장하겠는가?"(루이제 린저)
한편으로 예수님은 다양한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멍에를 제안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를 주신다.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있는 힘은 그분의 온유와 겸손에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온유는 내적으로 고요하게 된 사람들의 태도다.
온유는 주어진짐에 대해 싸우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뜻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짐에 적응하고 짐은 우리에게 적응한다.
이런 적응의 관계에서 우정이 자라고, 여기에서 뜻밖의 힘이 나온다.
이에 비해 겸손은 우리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곧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보여주신 태도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이렇게 모든 고통에는 우리를 정화하고 강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심오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알프레드 델프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확신과 현명과 술책으로 기울인 모든 노력은 혹독하고 참담한 불행속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저는 이번 달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은 이 일을 전적으로 감독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이전보다 내적으로 더 자유롭고 더 순수하고 더 진지하고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알프레드 델프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로 내적 안식을 찾았고 자신을 혹독하게
괴롭히던 상황 속에서도 안식을 누렸다.
-주님의 향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