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2011. 10. 30. 오후 9:32:43

글자

 

  누군가가 말이지, 그간 읽은 문학 서적 가운데에서 제일 감명받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적잖이 당황할 거야. 비록 어깨 펴고 자랑할 만큼 방대한 독서량은 아니지만 한두 권을 들 수는 없으니 말야.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J.D.샐린저의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ey)』을 나는 아마 평생토록 못 잊을 거다. 읽으면서 정말 몇 번이나 주인공의 생각에 공감하고 형편없는 어른들에 대해 분노했던지.

 

  울적할 때 뒤적거린 것까지 합치면 더 많겠지만 어쨌든 이 작품을 네 번이나 읽었으니 잊을래야 잊을 수 없지. 그래서인지 여기 나오는 얘기들은 모두 허구가 아니라 실재로 느껴져. 아니, 틀림없이 이 책의 내용은 현실이야. 지금도 세상에는 이 거리 저 도시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무수할 테니까. 게다가 나와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흡사한 주인공 녀석ㅡ홀든 코울필드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그의 순진하면서도 충동적인 성격이 좋았고, 대취하여 센트럴 파크를 헤매는 그의 방황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순진하다는 것은 물론 아냐. 단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은데, 그것은 차차 얘기하기로 하지. 그러나 우선 이 말은 해야겠다. 나만은 홀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 학교 저 학교 전학을 가봤자 퇴학이나 당하는 미운 오리 새끼일지 모르지만 그의 모든 반항에 박수를, 좌절에 격려를 보낸다고. 헤이, 홀든. 기운을 내!

 

  저자 샐린저는 유태계로 뉴욕 태생이고, 이 작품의 무대 또한 주로 뉴욕이다. 샐린저는 몇 군데 대학에 다녔지만 졸업장 같은 것은 받은 바 없다고 하는군. 도회지를 싫어해서 뉴햄프셔의 숲 속에서 철저히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꽤나 괴팍한 사나이야. 장편보다는 중·단편을 많이 쓰는 그의 작품 경향은 도시 중류층의 부모를 둔 미국 젊은이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이상적인 인간형을 어린이에게서 찾으려는 것이지. 그가 말하는 호밀밭이란 곳은 뉴욕이라는 이름의 메트로폴리스(거대 도시)이다. 마천루의 군집, 검은 아스팔트로 뒤덮인 땅, 숱한 차량과 인파로 상징되는 호밀밭은 퇴폐적이고 삭막할 따름이야. 이 호밀밭에서 뛰노는 어린이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파수꾼이 되기를 홀든, 즉 샐린저는 열망하고 있지.

 

  "……애들이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달리면 내가 어디서 불쑥 나와 그 애들을 붙잡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고 싶어. 이게 미친 생각인 줄 나도 알아."

 

  무엇 때문에 홀든은 딴 급우들처럼 변호사나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고 몽상가와 다를 바 없는 파수꾼이 되려고 할까? 우리는 과연 홀든이 유치하다고, 어리석다고 탓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의 줄거리는 복잡하지도 않고 별 재미도 없어.

 

  성적 불량으로 펜실베니아주 어거스타운에 있는 팬시(영문으로 'fancy'는 공상이나 상상이니 작가가 풍자적으로 지은 학교 이름임) 고등학교를 퇴학당한 홀든은 식구나 급우들 중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잠적한다. 사춘기 소년으로서의 순진성과 때묻지 않은 감수성은 그를 학교와 사회 등 모든 주변 세계의 부조리에 순응치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지. 사흘 동안 여러 곳을 헤매면서 만나는 사람과 회상 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위선과 가식의 가면을 쓰고 있어. 누구와도 진실된 감정의 교류를 할 수 없어 절망한 끝에 홀든은 먼 서부로 가서 벙어리 흉내나 내면서 살겠다고 결심하지. 그러나 결국 그는 어린 누이동생 피비가 주는 무구한 사랑에 그 어떤 구원을 얻고는 귀가하기로 마음먹는다. 에필로그에서 홀든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요양하고 있음을 밝힌다. 9월 학기에 새 학교에 들어가면 열심히 공부하겠느냐고 의사가 자꾸 물어보지만 그는 대답을 회피하지.

 

  "실제로 하게 될 때까지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거야?"

 

  그다운 생각이 아니니? 병원에는 휴양차 입원한 것인지, 어른들이 그를 약간 돈 애로 간주해 입원시킨 것인지는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승하야, 너랑 비슷한 놈이 등장하는 소설인데 한번 읽어보지 않을래? 되게 재미있고 유명한 작품이다."

 

  형은 그 당시 자신의 권유가, 나의 가출벽의 한 계기가 되리란 것을 전혀 몰랐을 게다. 처음 이 작품을 읽고, 얼마나 공감하고 감동했던지.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이렇게 부르짖게 했다.

 

  "좋아, 떠나자. 다시는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어."

 

  1975년의 봄은 내게 참으로 우울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때를 구태여 상세하게 회상하고 싶지는 않군.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유서를 써놓고는 집을 나갔었는데 애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야. 계획이 무엇인지는 묻지 말아주어. 영원한 비밀이니까. 게다가 얼굴이 신문에 나는 바람에 일약 유명해져서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였다. 좋은 날씨면 오히려 하늘을 저주하는 그런 나날이었지. 또 학교를 그만두었으니 검정고시를 쳐야 하는데 2개월 남짓밖에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거든. 암담하더군. 그런 때 이 책을 읽었으니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 아니고 무엇이랴. 용기백배했지. 절망하지 말자. 나랑 생각이 흡사한 녀석이 딴 나라에도 있었구나. 나 같은 불효자식이 또 있었구나.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신들린 듯 공부했다. 8월 1일의 시험일 전까지 영어와 수학은 비교적 쉬운 빈출문제만 풀었고, 암기과목은 요점이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을 두세 번씩 볼 수 있었다. 시험은 하늘이 도우셨는지 과락(科落)도 없이 합격되었고, 나는 또 짐을 꾸려 몰래 집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어른들이란 언제나 자기네들이 말하는 것이 전부 옳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나는 조금도 모르고 있어. 다만 나이답게 행동하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지루하게 생각되는 수가 있지."

 

  네 번씩이나 퇴학당하지만 홀든은 저능아도 아니고 이유 없는 반항아도 아니지. 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실망시키지. 순결하고도 꾸밈이 없는 인간애, 진실한 우정, 이해와 관용의 관계를 그렇게도 간절히 희구하는데도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 거야.

 

  기숙학교 팬시 스쿨의 서머 교장은 토요일 밤의 메뉴로 늘 "조그맣고 단단하고 바싹 말라 좀체 벨 수 없는" 스테이크를 내놓는다. 일요일에 많은 학부형들이 학교로 자식을 찾아와 "어젯밤에 무엇을 먹었니?" 하고 물어볼 것을 예상하고서는. 아, 이 학교에서는 우리 애 배곯지 않게 고기를 자주도 먹이는구나. 학부형들이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홀든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홀든이 보기에 교장은 교육자가 아니라 천하에 둘도 없는 구두쇠야. 거짓말로 여자 친구와 성적 교섭을 가졌다고 누누이 자랑하거나, 자신의 발달한 신체를 자랑하려 늘 상체를 드러낸 채 돌아다니거나, 승용차에서의 더블데이트 때 뒷자리에서 안면 몰수하고 난삽한 짓을 한 친구와도 그는 어울릴 수 없다.

 

  허름한 호텔에 투숙한 날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호텔의 객실을 쳐다보다 거기서 일어나는 변태성욕자들의 이상한 행위를 목격한다. 백발의 남자가 가방에서 여자 옷을 차례로 꺼내 완벽하게 여장을 하고는 왔다갔다하는 광경과, 남녀가 마주 서서 상대방의 얼굴에 물을 뿜어대는 광경을 보고는 어른들이지만 저런 지저분한 짓거리는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홀든은 자신이 투숙해 있는 호텔에도 정상적인 인간은 하나도 없을 거라 생각하다가도 얼굴에 온통 물벼락을 맞고 있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껴 자신을 최고의 색골로 간주할 만큼 순진하기도 하지.

 

  하즈 선생이라는, 전에 다니던 학교의 교장 얘기도 들려준다. "서머 교장보다 열 배나 더한 얼간이요", "이 세상에서 만난 최대의 엉터리"인 하즈 교장이란 작자가 일요일에 학교를 방문하는 학부형들의 옷차림이 좋으면 아양을 떨고, 옷차림이 보통이면 억지 웃음을 던지고서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을 보고 홀든은 구역질이 나서 미칠 지경이 되어 학교를 떠나 방랑 길에 오른다. 기숙학교를 떠나 집으로 가지 않았으니 자동적으로 가출하게 된 거지.

 

  방황하는 도중 그는 평소 존경하던 앤톨리니 선생님 댁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밤에 그 선생님에게서 변태에 가까운 행위를 당하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세상에 믿을 어른은 한 사람도 없더라는 얘기지. 그 자신 솔직하게 "동정을 잃을 뻔했던 기회는 꽤 많이 있었으나,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던 거야"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섹스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맹세코 나는 모르겠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요컨대 그의 눈에 비친 세상 사람은 위선자가 아니면 온통 섹스에 미쳐 있었던 거야. 그는 여자 친구 샐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하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잖은가. 자동차에 미치고 있지 않은가. (…) 그리고 새 차를 손에 넣으면 곧 그것을 더 새 것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가. 나는 헌 차라도 좋아하지 않는다. 자동차엔 아예 관심이 없단 말야. 난 차라리 말을 갖고 싶어. 말은 적어도 인간적이야."

 

  만약 모든 것이 형식 위주가 되어가고 기계화에만 치중하면 인간이 어떻게 변모할지는 자명하지. 명심하고 있자고. 인간이 인간임을 망각하는 시대는 결코 먼 미래가 아님을. 시험관 아기의 탄생과 더불어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는 도래하였고,

 

 『1984년(조지 오웰)』은 바로 3년 후이다. 고도 문명사회로의 진입은 한편으로 메커니즘에의 노예화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어야만 한다. 교환가치만 중시하는 어른들의 비인간성에 그는 염증을 느끼며 거기에 줄곧 반항하지. 어떻게?

 

  지금은 생각을 달리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학교와 집이란 데가 한때는 어둡고 싸늘한,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감옥'이었지. 난생 처음 와서 보는 서울 거리는 정말 휘황찬란하더군. 책과 옷가지가 든 두 개의 가방은 팔이 빠질 듯 무거운데다 아침도 점심도 굶어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결국 시내 버스 속에서 보기 좋게 나둥그러지기도 했었지. 광화문통으로의 길을 물은 그 여학생은 어쩜 그렇게도 예쁘게 생겼던지…….

 

  "다소 어리석은 여자일지라도 이쪽은 반쯤 반해버린단 말야. 여자들이란 대단한 존재야. 이쪽을 미치게 만드니 말야."

 

  17세, 사춘기에 들어선 홀든은 고등학교 선배를 만나 요즈음 성생활은 어떠냐고 짓궂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 그러나 그는 오히려 벽에 그려놓은 외설스러운 낙서를 열심히 지우는 도덕관념을 지니고 있었어. 어린이들이 보면 안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지.

 

  "물건에 따라서는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은 저 큰 유리 케이스 안에라도 넣어,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마땅하다."

 

  이 역시 어린이들을 두고 한 말이지 싶어. 그렇다고 성장이 곧 타락을 의미할까? 샐린저의 견해로는 성장의 부패에 물들지 않은 어른은 없지.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반은 오류야. 보다 중요한 사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타협이야.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긍정의 마술에 걸려들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는 각종 형태의 폭력과 악, 가장과 기만, 엉터리와 더러움이 충만해 있는 현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용납하고 만다. 굴복하고 마는 거지. 우리는 세속주의자를 경멸해야 해. 에고의 성에 안주하느니 차라리 불안한 마음으로 헤매는 영원한 에트랑제가 되는 것이 좋아. 난 이렇게 주장하고 싶어.

 

  "젊은 탕아들이여, 귀가하지 말기를. 너희들은 아직 철들지 않았노니."

 

  맞아, 홀든은 맨하탄의 이방인이지. 즐겨 쓰는 빨간 사냥 모자(늘 창을 뒤로 돌려서 쓴다)는 그의 부단한 이탈 욕구를 상징하고 있어. 타성과 안일을 뿌리치려는 그의 고독한 반항을 말야.

 

  조잡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이고, 비굴한 모든 것에서 탈피해보려는 홀든의 노력은 자못 처절하지. 어른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줄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고, 여자도 사고(그는 성적 교습을 받는 대신 사기만 당하지), 춤도 추는 등 온갖 흉내를 다 내지만 기성사회는 끝끝내 그를 기만한다. 홀든의 절규가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난 어쨌든 이 녀석에게 뜨거운 우정을 느꼈지.

 

  "언제든 남학교에 한번 가보는 게 좋을 거야. (…) 하는 일이라곤 장차 캐딜락을 살 수 있는 신분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뿐이야. 게다가 모두들 더러운 파벌을 만들어 굳게 뭉친단 말야."

 

  가물거리는 눈을 하고 대문을 열자, 나가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누이동생이 부엌에서 뛰어나왔어. 내 팔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더군. 또 나갈 거냐? 어머니의 다그침에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지. 왜냐구? ……난 말 잘 듣는 로봇이 되고 싶진 않았거든.

 

 『호밀밭의 파수꾼』은 아메리칸 드림의 색다른 모습이지. 그 꿈은 희망과 절망, 진실과 허위, 참여와 도피가 부단히 상충하고 있는 악몽이야. 대중사회는 개인의 존재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지. 그래서 날카로운 자의식의 소유자인 홀든 같은 녀석이 학교사회에서 소외되어 정신병원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어. 그의 섬세한 투시력이 뚫고 나가기엔 이 사회가 너무나 두꺼운 장벽을 갖고 있어.

 

  샐린저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설정한 것은 어린이들이야. 홀든이 진정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오직 열 살 먹은 그의 누이동생뿐이다. 10대 때의 나 역시 방학 중 며칠 와 있다가 대구로 가버리는 형을 빼놓고는 두 살 밑의 누이동생만이 유일한 말벗이었지. 그런데 요즈음 보면 어린이들의 정서가 너무 물질과 밀착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아. 나는 동네 골목길에서 유행가 대신 동요를 합창하는 아이들을 본 적이 전혀 없어. 내 어릴 때 역시 그랬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해야 한다는 타산적인 사고방식은 유년의 푸른 꿈들을 멍들게 하고 있어. 탈출해야 한다. 규격화된 일상으로부터. 가장(假裝)의 의례로부터. 기성(旣成)의 허식으로부터. 자유에로의 모험은 험난할지라도…….

 

  용기도 영웅심도 나이었다. 두 번째 가출한 곳에서 나는 맹장염이라고 집에 전보를 칠 수밖에 없었지. 병원에 갔더니 맹장염이 아니래서 주는 약만 먹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나의 시도는 또다시 실패였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침묵하셨고 어머니는 호되게 꾸짖으시더군. 엄마 미쳐버리는 꼴을 네가 봐야겠냐고. 나는 그 뒤로도 두 번 더 집을 뛰쳐나갔었지만 신경이 약한 어머니가 잠을 못 이루고 계실 것 같아 며칠을 못 버티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집에 기어 들어왔었지. 집에 왔을 때, 한 마디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는 건 내 누이동생뿐이었어. 홀든의 경우도 그랬듯이 말야.

 

  이 소설 전체의 분위기는 언제나 탈출 직전의 칙칙한 분위기야. 세상을 보는 저자의 시야가 경직되어 있는 일면도 있고 주인공의 방황도 상당히 맹목적이지. 이런 몇 가지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유년기에 대한 향수를 희망의 조건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점에서 독일의 교양소설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봐. 그리고 '잃어버린 세대'와 '비트(beat) 세대'와의 교량 역할을 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로서의 가치도 있지. 1950년대의 미국은 풍요로운 사회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었지만 버려진 동심에는 무관심했거든. 그리하여 젊은이들의 거센 반발인 비트 문학이 곧바로 등장하지. 샐린저의 신랄하고 해학적인 문체는 독보적이지만 그가 취한 피카레스크 형식은 미국 문학의 전통 ㅡ『허클베리 핀의 모험』(마크 트웨인)에서 『오기 마치의 모험』(솔 벨로우)으로 이어지는ㅡ에 따른 것이야.

 

  하나의 과정을 겪고 있을 따름이라고, 누구나 여러 가지 시기를 통과하는 것이라고, 그래, 홀든의 말은 옳았다. 나도 이제 성인이다. 그렇다고 지난날의 방황이나 모색이 전혀 철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날의 고뇌와 좌절은 내 일생의 등대가 되어주리라 믿어.

 

  홀든 코울필드, 그는 내 10대를 그대로 빼다박은 나의 자화상이다. 이만 줄일게. 잘 지내라.

 

댓글 1

  • 2011년 10월 31일 오전 8:44

    학생들에게 많이 소개할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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