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혼불 4 (최명희, 한길사, 1997)
읽을수록 빠져드는 묘한 힘이 있는 책이다. 어떻게 이토록 묘사가 진중할까?
철학과 역사의 뿌리가 정말 깊구나..작가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신중한지 작품을 읽으면서 감탄만 나온다. 이런 대작가의 혼을 따라갈 수 있을까? 와닿는 구절을 써본다
18쪽: 정신이고 경치고 인생이고 결혈의 묘처는 오직 한 군데 아니면 많아야 두 군데에 불과한 것인즉, 이 자리를 소중하게 아끼고 잘 갊아서 제 생애를 다한 집을 세워야 하리라. 그래야만 생애는 이 집을 바라보고 집은 생애를 돌아보는 묘미가 있지 않겠느냐
19쪽 눈은 곧 빛인데 빛이 밝으면 저 혼자서만 제 것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빛에 의지해서 모인 다른 사람들 것도 잘 볼 수 있게 해준다.
20쪽 사람이 내 마음을 추리고 추리고 또 추려서 균형을 잡고 훌륭한 스승의 지도를 받아 그 자리를 밝혀 가는 수련을 하는 것이 바로 공부니라. 부디 이 갈고 닦는 일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오직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숨쉬는 일처럼 몸에 익어 일상이 되도록 자신을 건사하고 이재하듯이 정신을 관리해야만 정신의 토양이 비옥해질 것이다. (이재:理財)
43쪽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이야. 오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오늘의 '나'다.
44쪽 이미 기러기 자취 끊어진 강기슭에 이빨같이 허옇게 물고 있는 자갈밭, 을씨년스러운 엄동, 버리고 달아나며 내다보는 명승은 무정하리만큼 삭막하였다.
178쪽 그 향내는 뭉글뭉글 고샅의 어둠을 배로 핥으며 나직이 기어내려 사립문으로 들어왔다.
195쪽 그림자는 옷고름이 거꾸로 늘어진 저고리와 무명치마 그리고 구깃구깃한 핫바지들이 섞여 걸린 대나무 횟대를 거멓게 덮고 그 옆에 웅긋중긋 일룽이는 사람들의 머리통이며 어깨로 무슨 산봉우리 능선 마냥 이어진다.
199쪽 언제 머 어째 본 일도 없이 나이만 먹어 갖꼬 속 빈 강정맹이로 허우대만 멀쩡헌디, 그 속을 니가 지은 니 정으로 채우그라. 따숩게.
236쪽 인연도 재신인디 멋 헐라고 내불라고 애를 써어..
253쪽 욕계 제 4천에서는 드디어 그 손조차 놓아 버리어 오직 미소만으로도 합일하여 향기가 가득한 곳이라.
254쪽 향의 소리가 참 맑습니다. 향의 소리가 참 은은하군요.
270쪽 그 상극해서 흩어진 기운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추모도 하고, 또 부모 생전의 일을 돌이켜 자신의 정신을 돌아보고 반성도 하고, 이런 것은 이렇구나 저런 것은 저렇게 하는 것이 옳았을텐데, 내 마음으로 취사해서 자꾸 자손의 마음에 응결시켜 덩어리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바로 천추 효성이야
271쪽 마음을 지켜라, 성품을 지켜라, 정신을 차려라, 원기를 안 잊게 하려고
상례를 할 때 부모의 정신을 잘 갈무리하여 자신의 빛으로 삼으려는 정성...
292쪽 끝간데 보이지 않는 들판에 봄이 오면 저절로 쪽이 돋아나 이윽고 무성하게 어우러지며 아마득히 넘실거리는 것...
301쪽 욕이선난: 힘 안 들이며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루는 것을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어렵게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용필이 간단 정결하게 되려면 무수한 연습 속에 반드시 용필에 공들이는 공부부터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 허나 종신토록 그 법식에 매이는 것은 좋지 않은 일, 처음에는 아무리 그를 엄수해서 연습에 골몰한다 해도 궁극에는 법식을 떠나 자유자재로 변화 무궁해야만 잎사귀 하나를 그리거나 점 하나를 찍더라도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달라지는 게지요..
